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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6.03.15 06:55

[김윤석의 드라마톡] 육룡이 나르샤 47회 "정도전의 죽음과 승자의 아량 '쥐새끼처럼 도망치다'는 빼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극과 죄책감, 이방원 분이를 스쳐지나다

▲ 육룡이 나르샤 ⓒS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육룡이 나르샤. 그저 살아있으니 살았던 것이 아니었다. 살고자 해서 살았던 것도 아니었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책임과 사명이 있었다. 그래서 더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졌을 때 살고자 하는 의지 역시 흩어져버리고 만다. 어차피 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더구나 죽는다고 더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다면, 번거롭게 살려고 애쓸 필요 역시 사라지게 된다.

극단적으로 정도전(김명민 분)과 이방원(유아인 분) 두 사람을 대비시킨다. 이미 수많은 처참한 죽음들을 바라보면서도 이방원의 표정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죄책감도 미안함도 없었다. 곧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될 권력에 대한 기대에 들뜬 웃음만이 보일 뿐이었다. 정도전을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고 나서도 회한에 빠진 듯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아주 잠시 뿐, 겨우 하륜(조희봉 분)이 미리 써온 사초에서 '쥐새끼처럼 도망쳤다'는 내용만을 선심쓰듯 빼주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살생부 가운데 정도전의 이름을 불태우는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다. 

바로 권력이다. 권력의지다. 한때는 정도전에게도 그 비슷한 것이 있었던 때가 있었다. 고려를 무너뜨리려 했을 때였다. 이성계(천호진 분)을 왕으로 삼아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을 때였다. 하지만 그런 때조차 오랜 친구인 포은 정몽주에 대한 미련을 저버리지 못한 탓에 하마트면 모든 것을 망쳐버릴 뻔했었다. 만일 정도전이 먼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나라를 새운 뒤 정몽주의 생사마저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어쩌면 정몽주를 그토록 비참하게 오욕속에 죽어가게 한 것은 정도전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말과는 달리 전혀 독하지 못했던 정도전의 어설픈 대처가 이방원에게 파고들 틈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더 철저하고 더 집요하게 어떤 비열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이방원이 더이상 왕위에 욕심을 내지 못하도록 그를 몰아붙였어야 했었다. 이방원을 상대로 한 정도전의 독한 수단이라는 것조차 결국은 자신의 이상에 지나지 않았다. 사병을 혁파하고 장차 기회를 노려 요동을 공략하자. 그러나 이방원의 반격으로 모든 것은 이제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만다. 많은 사람이 죽고 많은 것들이 좌절된다.

결국은 권력을 먼저 가져야 했다. 그럴 수 있는 힘부터 가져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었다. 더 높은 자리에서 더 큰 힘을 가지면 더 많은 것들을 해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를 위해 일단은 먼저 권력부터 가지려 하는 것이었다. 정도전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오면서 하륜은 오늘까지 있었던, 그리고 앞으로 있게 될 역사에 대해 미리 사초로 써서 가지고 오고 있었다. 이렇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만들 것이다. 설사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만들 힘이 정변에만 성공한다면 자신들에게 주어진다. 진실마저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정도전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살해한 충격에 잠시 회한에 잠겼다가도 이내 돌아와서 하륜이 써 온 사초에서 단지 몇 글자만 바꾸자 말하는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어떤 거짓도, 기만도, 죄업조차도 기꺼이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 이미 후회를 말하기에는 그 과정에서 치러야 했던 희생들이 너무나 참혹하다. 권력의 길에 과거란 없다. 권력을 가지고 난 이후만이 있을 뿐이다. 정도전의 말처럼 오로지 살아남은 이들만이 내일을 결정할 수 있다. 자신이 정한 진실만이 오로지 내일의 진실이 된다.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하다.

참혹한 대가를 치른다. 그 대가를 직접 눈앞에서 보게 된다. 침묵했다. 애써 모른 척했다. 모르지 않았다. 아니 알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아닌 반촌사람들이 치르게 될 대가와 겪어야 할 일들이 분이(신세경 분)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래도 오라비 이방지(변요한 분)는 괜찮겠거니. 친언니와도 같던 연희(정유미 분)는 무사하겠거니. 그러나 연희가 죽었다. 정도전이 자신의 앞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이방원에 의해 살해당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어차피 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알아도 말할 수 없었고, 말하고 싶어도 전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어느것도 선택하지 않았었다. 결과는 오로지 저들의 사정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그런데도 애꿎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 큰 은혜를 입은 은인이 위험에 빠졌는데도 그를 도울 아무런 수단도 방법도 없었다. 그저 맡긴 편지와 물건을 틀림없이 전하는 것이 전부다. 

하기는 그래서 이방원도 권력을 가지려 그토록 발버둥쳤던 것 아닌가. 살아있는 한 아무거라도 해야 한다면, 그 아무거라도 하기 위해서도 힘을 가져야만 한다. 필요한 때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다면 때로 그 자체로 죄가 되기도 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에 힘이 없다는 사실 자체로 죄가 되어야 한다. 부조리고 모순이다. 하지만 현실이다.

결정은 결국 이방원이 했다. 무휼(윤균상 분)은 단지 그 결정을 따랐을 뿐이었다. 무휼을 위해 할머니 묘상(서이숙 분) 역시 이방원을 도왔다. 그런데 그로 인해 연희가 죽었다. 정도전이 죽었다. 그리고 이제 이방지와 싸우게 되었다. 연희도 구하지 못했고, 정도전을 구하러 가는데 이제 무휼과 마주치고 말았다. 싸우고자 해서가 아니다. 싸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칼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누군가를 해치는 것이 아니다. 이방원의 정변에 동원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한 병사들 역시 누군가를 죽이고자 해서 죽인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죄인이 되어야 하고, 누군가는 적이 되어야 하고, 누군가는 싸워야 한다. 항상 결정은 저 위에서, 그나마 누구인지 알 수 있으면 다행인 이들이 한다. 역사의 비극일까? 인간의 비극일까?

이미 역사를 알기에 결론이 어떻게 내려질지 안다. 전작 '뿌리깊은 나무'의 프리퀄이기에 대충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도 안다. 그래서 더 어렵다. 벌써 불과 몇 해 전 KBS에서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정도전'이라는 명품이라 할 만한 드라마를 만들어 방영한 바 있었다. 무협이라는 장점을 살린다. 죽고 죽이는 원초의 잔혹성을 극대화한다. 원래 2차 왕자의 난이란, 혹은 무인정사란 실제로도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정변이었다. 

이론도 명분도 없었다. 대의도 인정도 없다. 서로 죽이고 죽는, 그러면서 그 위에 노골적으로 드러난 탐욕과 본능만이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산 자는 모든 것을 가지고 죽은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모두가 죽어 쓰러진 전장에 순백으로 차려입은 척사광(한예리 분)이 무심히 스쳐지나간다. 아직 그녀에게도 비극은 끝나지 않은 것일까. 죽은 이들도, 그리고 아마도 이방지와 분이 역시 살아있다는 이유로 더 참혹한 시간들 견뎌야 할지 모른다. 피가 흐른다.

아름답지 않다. 멋지지도 않다. 그래서 아름답다. 그래서 멋지다. 인간은 참혹하다. 인간의 역사는 잔혹하다. 인간의 삶은 잔인하다.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누군가는 살아남아 이후의 역사를 써나간다. 정도전을 살해하고 이방원은 무심히 분이의 곁을 지나간다. 더이상 분이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들이 역사의 주인이다. 오늘의 주인이다. 승자가 결정된다. 무심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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