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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6.03.09 06:53

[김윤석의 드라마톡] 육룡이 나르샤 46회 "마침내 패업의 길 위에서, 약속된 비극이 시작되다"

분이의 안타까운 선택, 정도전의 고민이 전작 '뿌리깊은 나무'를 예고하다

▲ 땅뙈기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육룡이 나르샤. 진심으로 작가에게 감탄하게 된다. 얼마든지 대의로 치장할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럴 기회가 있었다. 정도전(김명민 분)의 요동정벌은 분명 치명적인 실책이었었다. 자칫 나라를 최악의 위기로 내몰 수 있다. 조준(이명행 분)과 무명 모두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개인의 욕심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라도 이방원(유아인 분)은 정도전을 제거해야만 한다.

굳이 요동정벌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그동안 많은 다른 드라마들에서도 그렇게 묘사해 왔었다. 정도전이 주장한 재상총재제에 대해 나라의 주인으로서 오로지 국왕이 국정을 주도하는 왕권중심제를 주장했었다. 신하인 재상이 국정의 중심에 서는 정도전의 신권과 국왕이 국정의 중심에 있는 이방원의 신권이 충돌했다. 

조선은 정씨의 나라가 아니라 이씨의 나라다. 나라의 주인은 국왕이고 자신들은 그 국왕의 자식들인데 어째서 나랏일을 하는데 철저히 소외되어 있어야 하는가. 이방원의 두 형들 이방과(서동원 분)와 이방간(강신효 분)의 불만이기도 했었다. 오히려 정도전에 의해 이미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마저 빼앗겨야 했다.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하지만 없었다. 욕망은 단지 욕망일 뿐이다. 아무리 휘황한 말들로 꾸미고 감추려 해도 결국은 권력에 대한 순수할 정도로 끝없는 탐욕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바로 권력의지다. 이유가 있어 권력을 가지려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가지고자 하기에 이유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미 권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 이유는 권력을 가져야만 했던 당위가 된다. 대의가 되고 명분이 된다. 

안보이면 찾고, 없으면 만든다. 아버지를 거스른다. 나라의 중신이자 한때 스승이었던 이를 친다. 심지어 피를 나눈 형제마저 죽여야 한다. 하지만 그래서 권력을 가질 수 있다면 이유는 그 다음에 천전히 생각해도 상관없다. 권력이 모든 것을 정의롭게 만들 것이다. 아무리 당장은 정도전이 더 옳아도 정도전을 죽이고 나면 그때부터 내가 옳은 것이다. 정도전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욕망이 욕망을 부른다. 꿈이 꿈을 부른다. 정도전의 어쩌면 무모하게만 보였던 큰 꿈이 연희(정유미 분)와 분이(신세경 분)의 작은 꿈들마저 끌어당겨 하나로 만들었다. 정도전의 꿈이 자신의 꿈이다. 자신들의 꿈이 곧 정도전의 꿈이다. 스스로 충분한 실력과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여기기에 왕이 되고자 하는 바람도 가져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만한 실력과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면 왕이 되고자 하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바람을 맡겨야만 한다. 

권력자가 갖추어야 할 능력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바람과 기대를, 꿈과 욕망을 맡길 수 있도록 주위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카리스마라 말하는 것이다. 각각의 이유들이 명분이 되고 그를 위한 병명들이 대의가 되어 준다. 결국은 정도전의 개혁으로 인해 기득권을 잃게 된 왕자와 종친, 공신들을 선동하여 행동에 나서는 것이지만, 그러나 오로지 나라와 백성과 왕실과 조정을 위해 큰 일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잘못을 바로잡고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린다.

어쩌면 그래서 더 매력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당당하다. 너무 솔직하다. 심지어 아버지 이성계(천호진 분) 앞에서조차 거짓으로 자신을 꾸미거나 감추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자신을 제거하려는 정도전 앞에서도 너무나 솔직하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며 정면으로 맞서려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카타르시스다. 지켜보고 있는 자신의 내면에 억눌려 있던 욕망이 그를 통해 대신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희생하고 많은 것을 잃게 되더라도 반드시 자신은 그 욕망을 이루고야 말겠다. 모두가 바라지만 그러나 차마 입밖에 내어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동안 다른 많은 드라마에서도 그래서 이방원은 수많은 변명들을 늘어놓고서 겨우 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다. 오로지 한 가지 순수한 욕망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을 뿐이었다. 포기하느니 차라리 실패하고 죽겠다. 욕망하지 않는 삶은 죽은 것과 같다. 다행히 운은 정도전이 아닌 이방원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분이의 고민을 이해한다. 만에 하나 거사에 성공하더라도 더이상 손자인 무휼이 이방원과 얽히지 않기를 바라는 할머니 묘상(서이숙 분)의 마음도 같을 것이다. 가진 것 없는 백성이 힘있는 자들의 싸움에 끼어들어 좋을 일은 거의 없다. 요동정벌과 전혀 다르지 않다. 아무리 정도전이 좋은 말로 꾸미려 해도 기껏 성공해봐야 겨우 나라의 영토나 넓어지는 것이다. 

임금과 권력자들에게 다스릴 땅과 백성이 늘어나는 것이다. 백성들이야 고작 자신이 부쳐먹을 땅뙈기나 얼마 있으면 고작인 것이다. 나라의 땅이 늘어난다고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땅까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죽거나 다치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공을 세우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알량한 포상보다 무사히 돌아와 가족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구의 편을 들든, 어느 쪽에 서든, 결국 죽어가나가는 것은 백성들 뿐이다. 

분이라는 개인의 판단이 아니다. 오라비마저 돌아보지 않는다. 하늘 아래 단 둘 뿐이다. 무명에 있는 어머니를 제외하고 둘 뿐인 남매다. 어머니가 그렇게 떠나고 어려서 항상 의지했고, 십수년만에 만나서도 항상 함께했었다. 그러나 차마 자신을 찾은 오라비 이방지(변요한 분)에게 이방원의 거사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이방원이 거사를 일으키면 오라비 이방지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저 자고 갈 것을 돌려서 권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방원의 거사에 대해 말하려면 반촌에 있던 무기창고에 대해 알려야 한다. 반촌에 있던 무기창고에 대해 알게 되면 반촌 역시 결코 무사하지 못하다. 오라비도 소중하고 정도전의 안위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자신은 어디까지나 반촌의 사람들을 책임져야 하는 행수의 신분이었다. 백성은 선택조차 할 수 없다. 부모와 자식을, 형제와 사랑하는 이들을 참혹하게 잃는 가운데도 그저 바람이 지나고 비가 잦아들기를 인내하며 기다릴 뿐이다. 그것이 백성들이 참혹한 세월을 견뎌내는 방법이다. 살아남은 방법이다.

전작 '뿌리깊은 나무'와 다시 이렇게 이어진다. 정도전이 고민한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다. 오로지 백성을 근본으로 모든 정치는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백성이 주인이 되고 중심에 서야 한다. 그런데 정작 생산에 종사해야 하는 백성들에게는 그만한 시간도 여유도 턱없이 부족하다. 백성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부족하다. 

밀본의 변질도 예고한다. 정도전의 동생 정도광이 요동정벌을 지지하는 여론을 만들려 밀본의 조직원을 동원하려 한다. 꿈이 꿈을 부르고, 욕망이 욕망을 부르고, 권력이 없던 욕망마저 불러일으킨다. 밀본이 가진 힘이 정도광을 도취케한다. 정도광의 어린 아들 정기준이 전작에서보다 더 어린 모습으로 정도전과 함께 밥을 먹는다. 그러고 보니 조말생(최태훈)에게 연희가 정도전의 여인이라 가르쳐 준 것이 바로 젊었을 적의 이신적(이지훈 분)이었다.

공양왕이 남긴 두 아들마저 잃은 척사광(한예리 분)은 깊은 절망과 좌절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 이방지를 위해 벼락맞은 대추나무로 만들었다는 제법 귀한 부적까지 사서 선물한 묘상이 어쩔 수 없이 손자를 위해 이방원의 계획에 한 팔 거들게 되었다. 이방지와 연희가 기약할 수 없는 내일을 약속한다. 벌써 십수년 잔혹한 세월에 미뤄왔던 마음을 잇고자 한다. 

정도전에게서 이방지를 떼어놓아야 성공가능성이 높아진다. 곳곳에서 연희의 화사단이 비국사에 공격을 당한다. 이방원이 사람들을 이끌고 집을 나서는 순간 측근 한 사람만 데리고 밤길을 거니는 연희의 모습이 교차한다. 연희가 건넨 갑주를 기뻐하는 이방지가 보인다. 사람의 인정이, 다정함이, 감미로움이, 그러나 더이상 아름답지만은 않다. 난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간의 욕망이 곧 난세를 부른다.

그나저나 이성계가 병석에 누워 있지 않았다. 최근의 가설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초기기록, 특히 왕조의 정통성과 관련된 부분은 오래전부터 그 신뢰성을 의심받고 있었다. 왕이 병으로 무력해진 상태에서 권신의 횡포를 보다 못해 왕자와 종친, 공신들이 들고 일어나 왕실과 조정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왕이 아직 건재하다면 그것은 엄연히 반란이었다. 왕이 아직 건재한데 군사를 일으켜 세자를 바꾸고 마침내 왕위마저 선위받는다. 

더욱 이방원의 욕망을 더욱 극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장치였을 것이다. 단지 정도전과 세자 이방석만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왕인 아버지 이성계를 거역하는 것이다. 형제들과 함께. 공신들과 함께. 그 참혹함마저 너무나 당당하다. 필사의 각오로 나선 거사의 길이 전혀 비장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어쩔 수 없는 사정에 떠밀린 것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의지이며 자신의 선택이다. 오랫동안 욕망해 온 자신의 간절한 꿈을 이루기 위해 가는 길이다.

물론 모두가 그 끝을 안다. 지금 이방원이 모두와 함께 가고 있는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 지 거의가 안다. 전작을 보았다면 이방지와 연희, 무휼을 기다리고 있을 운명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설레면서도 안타깝다. 약속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참혹한 비극이다. 모순된 감정이다. 어서 왔으면. 오지 말았으면. 시간이 원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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