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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문화
  • 입력 2012.01.22 11:30

설의 유래 "입춘과 대한, 동지, 그리고 설... 지금의 설이 정해지기까지."

한 해의 기준에 대한 오랜 논의를 살펴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여러해 전 명리학적 해석의 기준이 되는 한 해의 시작을 두고 동양철학회와 천문역리학회라고 하는 두 단체가 충돌한 적이 있었다. 과연 한 해의 시작은 입춘인가? 동지인가? 그동안은 입춘을 그 기준으로 삼았지만 문헌을 근거로 천문역리학회는 동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주장했었다.

아마 의외일 수 있을 것이다. 한 해의 시작은 분명 1월 1일인데 어째서 명리학에서는 그것이 입춘인가 동지인가를 두고 다투는가? 하지만 그것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매우 오랜 논쟁 가운데 하나였다. 과연 한 해의 시작을 정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이를테면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에서는 입춘을 한 해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입춘이란 다름아닌 봄의 기운이 움트는 무렵을 일컫는 절기의 이름이다. 한 해 농사를 지으려 할 때 봄이 오기 전에 그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농경사회인 하나라에 있어 입춘이란  그런 점에서 한 해 농사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한 해의 시작이라 이야기해도 좋았으리라.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입춘이 되면 농부들은 한 해 농사를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정월이면 그 상징성으로 인해 제사며 각종 행사가 참으로 번거롭게 이어진다. 제사를 지내고 잔치를 치르고 그리고 바로 농사준비에 들어가야 한다. 어쩐지 불합리하다. 조금은 더 새해의 번거로움 만큼이나 느긋하게 여유를 두고 지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제의적 입장에서도 그쪽이 타당하다. 그래서 하나라를 이은 상나라에서는 추위가 물러가기 시작하는 대한을 설의 기준으로 삼았다. 마침내 마지막 추위가 가시기 시작했으니 충분히 한 해의 시작으로서 의미가 있었다. 대한과 입춘과의 사이에는 더구나 보름이라는 긴 시간적 거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상나라에 이은 주나라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주나라는 그동안의 축적된 천문학적 관측의 결과로 한 해 가운데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동지를 찾아내고 있었다. 중국문화권에서 흔히 쓰는 태음태양력의 24절기란 바로 이 동지로부터 다음 동지가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24라는 숫자로 나눈 것이었다. 양에 해당하는 해가 가장 짧고 음에 해당하는 달이 가장 길다. 다시 말해 점차 양인 해가 길어지고 음인 달이 잛아진다. 한 해의 시작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듯 보였다. 명리학에서 동지가 있는 음력 11월을 12지의 자(子)월로 설정한 이유였다. 지금의 설은 정확히 12지에 따르면 세번째인 인(寅)월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 문제가 있었다. 어느 정도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여유를 두고 새해를 맞으려는 취지는 좋은데, 동지는 그로부터도 너무 멀었다. 동지를 지내고 다시 농사일을 시작하기까지 무려 달 반의 시간이 필요한데 그것은 농경문명에 있어 한 해의 시작이라는 상징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새해라고 모든 행사를 치르고 났는데 아직 한참이 더 있어야 농사일을 시작할 수 있다. 한 해 가운데 낮이 가장 짧고, 따라서 낮이 점차 길어지는 기점이라는 점에서 동지는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도 음력으로 11월을 동짓달이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물론 12월이 섣달인 것은 설날과 관계가 있다.

문제는 그 뒤를 이은 시황제의 진나라였다. 굳이 삼황과 오제의 전설을 끌어들여 황제라는 새로운 칭호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중국최초의 통일왕조를 일구어낸 시황제의 오만은 새해의 시작을 정하는 데에서도 적용되고 있었다. 하나라가 양력으로 2월이었고, 은나라가 음력으로 12월, 주나라 음력으로 11월, 시황제는 바로 여기에 더해 한 달이 앞당겨진 음력 10월을 정월로 삼는다. 씨앗이 떨어져 땅이 그것을 품는 것이 바로 음력 10월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정치적인 의도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주나라보다는 어쨌거나 빨라야 했다.

그러면 언제 지금의 음력 1월 1일이 새해의 시작을 정하는 기준으로 여겨지게 되었는가?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당사자로 또 유명한 한나라 무제 때였다. 기준은 이제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음과 양이 서로 교차하는 동지와 가까우며, 또한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입춘과도 가까워야 한다. 무엇보다 쓰기에 편리해야 한다. 양력은 전문가들이 일일이 계산해야 도출이 가능하지만 음력은 밤하늘을 보면 달이 알아서 날짜의 흐름을 가르쳐준다. 그야말로 이제까지의 모든 천문학적 관측의 결과가 이 하나로 집약된 것이었다. 바로 지금의 음력 1월 1일, 설이었다.

그러한 설의 변천사가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증거가 다름아닌 부여의 영고와 신라의 한가위일 것이다. 신라의 한가위는 바로 지금의 정월이 정해지고 난 다음에 나타난 풍습이었다. 그에 비하면 부여의 영고는 은나라의 설인 동짓달을 기준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고조선을 멸망시킨 것이 한무제라는 점에서 부여의 영고가 한무제 이전 은나라의 설을 기준으로 쓰고 있을 때의 흔적임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지금의 설이 유래된 것이었다.

생명이 움트는 입춘이 그 기점인가? 아니면 음이 승하고 양이 쇠하여 장차 양이 승하는 기준이 되는 동지가 그 기점이 되는가? 대한은 추위의 막바지였다. 그러다가 진시황에 의해 10월이 정월이 되었고, 한무제는 지금의 정월로 확정했다. 신해혁명까지 중국의 정월도 바로 이 음력 1월 1일이었다. 지금은 춘절이라 불리운다. 혁명의 결과 중국은 또 한 번의 다른 설을 가지게 되었다. 양력이라 부르는 설이었다.

하기는 과연 자연은 해를 나누는가? 달을 나누는가? 사람이 임의로 나누는 것이다. 이제는 한 해가 지났고, 이제부터 한 달이 시작되었다. 그것을 필요에 의해 나누고 구분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여 짓는다. 설 또한 그런 예였다. 원래 설이 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의 필요가 설을 찾아내고 그것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정의했다. 그리고 그 정의하는 방법론 가운데 지금의 설이 있다.

참고삼아 말하자면 기록만으로 놓고 보았을 때 동지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천문역리학회의 주장이 옳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입춘이 설이던 것은 실존여부도 불분명한 하나라때의 일이다. 반면 주나라는 확실하다. 주나라의 설은 동지였다. 동지의 다른 이름도 작은 설이었다. 하나라의 입춘에서 상나라의 대한, 주나라의 동지, 그리고 한무제의 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설이라 부르고 대보름이라 부른다.

어쨌거나 어느새 또 한 번의 설이 찾아왔다. 그 이름도 역시 굴곡이 많았다. 음력은 미개하다고 해서 양력설을 쇠며 구정이라 불렀고, 다시 구정을 쇠려는 국민들에 굴복하여 애매한 민속의날로 불렀었고, 요즘은 그래도 설로 부른다. 한국근대화의 왜곡된 단면이기도 하다. 흥미롭다. 재미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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