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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6.01.26 07:43

[김윤석의 드라마톡] 육룡이 나르샤 33회 "대의, 인정을 넘어선 잔혹한 당위를 위해"

정몽주, 정도전과의 우정과 신뢰마저 이용하고 볼모로 잡다

▲ 육룡이 나르샤 ⓒS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육룡이 나르샤. "그러니 소중한 사람을 버리게 하는 것, 소중한 사람과 적대하는 것, 그 정도 각오가 없다면 그만둬!"

어머니다. 어린 딸이다. 십수년만에 만난 어린 딸은 어느새 훌쩍 자라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에 딸이란 아무리 자라도 그저 어리고 어설프고 미숙하게만 여겨지는 법이다. 진정 자신이 선택한 길이 모두를 위해 옳다고 바르다고 믿는다면 설사 어머니인 자신과 적대하게 되더라도 흔들림없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어머니들과는 많이 달랐다. 어린 자식들과 일상을 함께 하며 자신이 배우고 익히고 경험한 것들을 매순간 풀어 가르치는 다른 어머니들과는 달리 연향(전미선 분)은 벌써 십수년 동안 자식들과 떨어져 있었다. 신분까지 바뀌어 있었다. 한낱 농부의 아내가 아닌 무명이라는 조직을 이끄는 무극이 되어 있었다. 이미 어른이 되어 자신의 앞에 나타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어머니들과 같은 그런 평범한 일상의 가르침이 아니었다. 무명의 수장으로써 자신의 어린 딸 분이(신세경 분)를 위해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가르침을 전한다.

대의란 것이다. 대의란 보편이다. 연향은 그것을 '책임'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었다. 자신을 믿고, 자신을 따르고, 자신에 의지하는 모두에 대한 책임이다.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한다. 개인의 모든 인정과 사정으로부터 대의를 분리해낸다. 더이상 자신은 개인으로써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방지(변요한 분)와 분이라는 장성한 자식들을 둔 어머니지만 그 이전에 연향은 무명이라는 조직을 이끄는 수장으로써 무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도 수많은 사람의 생사가 결정된다는 것은 말 한 마디도 온전히 자기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작별인사를 한다. 설사 자식들과 적대하더라도 무극으로서 자신을 결코 자신의 책임을 소홀히하지 않겠다. 무명은 바로 전쟁고아이던 자신의 지금이 있게 해 준 조직이다.

바로 이번 회자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였다. 하필 공교롭게도 이성계(천호진 분)와 정몽주(김의성 분) 모두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장차 자신의 뒤를 잇게 될 큰아들이었었다. 혈육보다 더 가깝게 서로를 존경하며 아끼던 오랜 친구였었다. 그런 이들을 배반해야만 했다. 아버지의 대업에 대해 알게 되자 큰아들 이방우(이승효 분)는 정면으로 반발하며 아버지 이성계를 비난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끝내 고려를 배신한다면 다시 자신이 그런 아버지를 배신하겠다. 끝끝내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저버리려는 자식을 그대로 놓아둔 채 대의라는 이름으로 혁명을 고집해야만 하는 것인가. 백성들 또한 그동안 자신으로 인해 흐른 피들로 인해 더이상 전처럼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만일 자신이 혁명을 일으켜 왕조를 바꾼다면 백성들은 다시 자신에게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오로지 자신을 믿고 자신에게만 털어놓았던 이야기였다. 자신이 먼저 다른 곳에 가서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단도리를 치고 있었다. 그 믿음을 배신한다. 그동안도 자신을 향한 정도전(김명민 분)의 한결같은 존경과 우정을 이용하여 그를 속이고 이용해왔었다. 이번에도 정도전이 자신만을 믿고 털어놓은 약점을 무기삼아 정도전의 자신을 향한 존경과 우정을 인질로 잡는다. 자신의 앞에서 거짓을 말해보라. 자신의 앞에서 자신에게 했던 말들을 부정해 보라. 차라리 그러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자신을 부정하고 배신하라. 이제까지 어떤 드라마에서도 볼 수 없었던 비열하고 사악하기까지 한 정몽주였었다. 과연 실제의 역사에서도 정몽주는 이런 느낌이었을 것인가.

과연 마지막 순간까지 갈등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도 되는 것인가. 하지만 자신은 고려의 신하였다. 고려의 신하인 이상 자신에게는 고려를 지켜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아무리 정도전(김명민 분)이 하고자 하는 일을이 옳고, 그동안의 정도전과의 신의와 우정이 자신에게 소중하더라도, 그런 정도전을 자신이 얼마나 아끼고 존경하든, 결국 고려와 정도전 사이에서의 판단은 정몽주 개인을 뛰어넘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을 제거해야만 고려를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고려를 저버리더라도 정도전을 지켜야 한다면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 둘 모두를 가질 수는 없다. 어느 한 가지는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정몽주의 대의였다. 고려를 지킨다는 것. 그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정도전과의 오랜 우정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방원(유아인 분)의 판단과 선택은 과연 남달랐다. 굳이 고민이랄 것도 없었다. 너무나 빠르게 스승으로 모시던 정도전을 배반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를 위해 오랫동안 마음에 두어왔던 분이마저 베어내고 있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는 무휼(윤균상 분)에게마저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털어 놓을 수 없다. 알고 있다. 자신의 선택이 모두에게 배신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외롭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모두를 위해 자신이 권력을 쥐고 자신의 정치를 해야 한다는 당위다. 권력의지다. 자신이 권력을 가지고 자신의 정치를 하는 것이 곧 대의다. 어떤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타고난 왕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다행히 그의 곁에도 부부라기보다는 오랜 정치적 동지였던 아내 민다경(공승연 분)이 든든히 버티고 있었다. 오로지 그녀에게만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다.

아들인가? 천하인가? 백성의 비난인가? 아니면 백성을 위한 대의인가? 하기는 정도전도 선택을 해야 했다. 천하와 백성들을 위한 혁명인가? 아니면 정몽주에 대한 개인의 의리인가? 아직까지는 정몽주에 대한 개인의 신의와 우정을 더 우선하는 듯 보인다. 고려를 위해 정몽주는 정도전을 버렸지만 정도전은 혁명을 위해서도 정몽주를 부정하지 못했다. 실제 역사와는 다리 이성계가 정몽주와 공양왕(이도엽 분)의 설득을 받아들여 사실상 정도전의 탄핵을 방관한 것처럼 묘사한 것도 이성계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였었다. 차라리 혁명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이성계 자신 역시 극심한 혼란과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선택해야 한다. 정몽주가 그랬듯 누구도 모든 것을 다 가지지는 못한다.

과연 바른 정치란 무엇인가. 분이를 따르는 개경의 유민들을 통해 작가는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아무것도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세금만 1할로 줄었을 뿐 땅을 나누어주겠다는 약속은 지켜질 기약조차 없다. 하지만 백성들의 얼굴에는 벌써부터 웃음꽃이 피고 있었다. 명장이란 싸워서 이기는 장수가 아닌 싸우면 이길 것 같은 장수다. 좋은 정치란 국민들에게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만드는 정치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한다면. 조금만 더 자신들이 열심히 한다면. 그렇기에 당장은 아쉽고 모자르더라도 만족하고 더 열심히 내일을 위해 살아갈 수 있다. 본능적으로 안다. 전작 '뿌리깊은 나무'에서 정기준이 말했던 어리석기에 현명한 백성이란 이런 것을 말한다. 이론에 빠지고 논리에 빠진다. 진정이 사라진다. 정도전의 '폭두'는 이론도 논리도 배제된 백성들의 진심을 꿰뚫었다.

원래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한 사회의 영혼을 바꾸는 것이나 같다. 종교란 세계다.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완결된 체계다. 그 체계 위에 위로는 국왕부터 아래로는 비천한 천민까지 하나로 묶일 수 있다. 역사상 수많은 세속권력들이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려 애써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체계를 부순다. 그 세계를 부수고 다시 쌓아 올린다. 결코 한순간에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 리 없다. 종교를 믿고 따르는 사회의 다수의 반발을 감수해야 한다. 그들과 적대할 것도 각오해야 한다. 힘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충분한 충격을 사회의 안팎에서 가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아직 왕씨의 고려에서, 더구나 명분을 가진 국왕이 불교를 비호하려 하는데 몇몇 개인이 앞장서서 주장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것이다. 무모하다. 당장 이성계마저 신실한 불교신자로써 정도정등의 주장을 낯설어하고 있었다. 바로 위기로 돌아오고 만다.

같은 성리학을 배웠음에도 이색과 정몽주가 정도전과 달리 굳이 불교를 적대하거나 배척하려 하지 않은 이유였었다. 이미 불교는 고려와 하나이다시피 했었다. 세속권력은 불교와 이해로써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백성들은 오로지 불교에 의지해 현실의 고단함을 잊어야 했었다. 말 그대로 불교를 적대한다는 것은 고려사회 전체를 적대하는 것이고, 불교를 배척한다는 것은 고려사회 전체를 배척한다는 것이나 같은 뜻일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을 인정하며 그 안에서 변화를 꾀할 것인가, 아니면 근본부터 모든 것을 부정하고 새롭게 쌓아 올릴 것인가. 그래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것이고, 그래서 고려를 지키기 위해 정도전과 맞섰던 것이었다. 불교의 폐단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불교를 지키는 것이 고려를 지키는 것이다. 불교를 부수고 고치는 것이 고려를 부수고 고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가 여기서도 드러난다. 불교개혁이 아닌 고려를 둔 싸움의 시작이다.

정도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몽주가 자신을 속이고 있으며 결국 자신을 탄핵하여 실각시킬 것이다. 어쩌면 질투였다. 그렇게까지 정도전은 정몽주를 한결같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 정몽주가 정도전을 탄핵하여 죄인으로 만들고 있었다. 역사의 동기를 보다 직접적인 개인의 감정으로 단순화시킨다. 어쩌면 역사 자체도 그처럼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몽주는 이겼고, 정도전은 스스로 패배를 선택했다. 이성계는 선택을 해야 한다. 모두의 마음이 복잡하게 시대와 얽혀간다. 역사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과연 길선미(박혁권 분)의 말처럼 홍대홍(이준혁 분)은 척사광(한예리 분)이 익힌 곡산검법의 파훼법을 찾아냈는가? 또 하나 흥미롭게 지켜볼 부분이다. 약점이 없다던 천하제일검 척사광을 뚫고 정몽주를 죽이고 고려를 무너뜨린다. 그러고 보니 하필 무휼이 척사광과 만나고 인연을 만들고 있었다. 무휼은 조선제일검이 되어야 한다. 의도한 것이면 짓궂다.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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