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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공소리 칼럼니스트
  • 칼럼
  • 입력 2015.12.01 13:03

[공소리 칼럼] 양성평등을 말하기 전에 양성은 다르다

[스타데일리뉴스=공소리 칼럼니스트] ‘여자는 남자보다 높은 신분이지 않다.’라는 명제가 있다고 가정하자면 이(異)는 ‘여자는 남자보다 높은 신분이지 않거나 같다.’
 
명제 문장에서 이(異) 속에 ‘같음’이라는 철학적인 공존이 있다. 학창시절 수학 시간에 명제라는 단원을 배운다. 명제에는 역(逆), 이(異), 대우 그리고 참, 거짓 등이 나온다. 명제를 처음 접한 것은 수학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철학적인 단원이었다.
 
선사시대에 양성은 대개 평등했으나 달랐고, 청동기 계급 사회의 발생 이후로 양성은 거의 불평등했다. 하지만 양성은 평등 여부와 상관없이 다른 모습과 구조로 언제나 달랐다.
 
현재나 역사적으로나 양성은 평등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양성이 완벽한 평등을 이룰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각자의 모습으로 다른 구조라는 것을 인정한다. 양성은 뇌 구조부터 다른데, 똑같이 군다면 그게 결코 인권이고, 자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양성평등을 이룰 수 있을까?
 
OECD 회원국을 비롯해 태국 등 여권이 많다. 한국이 아무리 세계 강국으로 부상했다지만 많은 국가 중에서 양성평등이 뒤처지는 건 사실이다. 사회 구조적으로 만져줄 필요성은 다소 있다. 남성할당제, 군대가산점 등 불균형을 해소하는 의미에서 사회 구조적으로 융통성 있게 대화하고, 교정할 부분이 많다. 균등을 맞추기 위해 양성을 강제로 징용, 선발, 고용, 입석 등 극단적인 구조를 짤 수도 있지만, 그것이 과연 양성평등을 넘어 평등과 자유의 길인지 돼 물을 필요가 있다.
 
실제로 교육대학에서 남성 할당제를 시행한다. 남·여학생 비율을 정해놓고 선발하며 여학생의 경우 훨씬 높은 경쟁률·커트라인을 기록하지만, 여전히 여교사 비율이 높다. 이 얘기는 교사를 지원하는 여성이 훨씬 많다는 거다. 여성이 사회적, 개인적으로 교사를 더 선호하는 건 평등의 여부가 아니라 구조의 차이다.
 
이런 개인적 구조의 차이는 평등 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비단, 타고난 뇌 구조에 따라 남성이 더 시장성 있는 전공 혹은 높은 연봉의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여성은 임신·출산·육아로 인해 경력단절 등으로 사회적으로 활약하는 여성과 아닌 여성으로 구분된다. 
 
이는 각자 다른 뇌 구조와 생리구조 등 여러 다름에서 나오는 모습인데, 사회에서 종종 연봉의 차이 등 평등의 문제로 부딪히는 경우를 만난다. 이는, 사회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 막연하게 분열을 일으키는 문제 제기라면 바람직하지 않다.
 
재작년 특수단체 남성연대 대표가 투신하고 결국 변사체로 발견(자살 목적이 아닌)됐다. 남성연대는 여성가족부가 폐지된다면 남성연대 또한 없어질 거라고 주장한다. 여성 중심 연대는 결국 성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것으로 본다. 두 대상 규모와 목적은 다른 부분이 크지만, 비교하자면 여성연대(여성가족부)와 남성연대가 존재해도 양성 균등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체감된다.
 
여성연대·남성연대가 존재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양성을 편을 갈라 연대하는 것은 자연에서 도태되는 길이다. 양성은 근본적으로 연합해야 하는 존재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연합했기 때문이다.

양성은 다르다. 여성은 남성보다 육체적으로 약하거나 혹은 같다. 남성은 여성보다 공감능력이 약하거나 혹은 같다. 어떤 명제의 다름도 결국 같은 수직선에서 ‘같음’이라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평등과 불평등을 따지기 전에 우리는 다를 수도, 그리고 다르다 하여도 결국은 같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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