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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1.17 09:23

뿌리깊은 나무 "내가 너희들을 죽이는 사람이냐?"

권력은 그 자체로 두려운 것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태어난지 겨우 한 달이나 되었을까 싶은 새끼고양이를 맡게 되었을 때 너무 작고 약한 것에 놀라고 말았다. 꼬물거리며 귀여운 것이 손에 힘을 조금만 주어도 그대로 뼈가 부러지고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 미묘한 잔혹감과 애처로움, 그리고 두려움이란.

그래서일 것이다. 벌써 함께 산 지도 6년이 넘어가고 있음에도 녀석들이 필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직전까지 무릎위에 또아리를 틀고 누워 필자의 손에 자신을 맡기고 있다가도 조금만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겁을 먹고 멀리 구석으로 도망쳐 버린다. 필자가 녀석들을 어쩌려 해서가 아니다. 단지 필자가 녀석들을 어쩔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혹시나 모르는 것이다. 어제까지 모이를 주던 주인의 손이 오늘은 닭의 목을 비틀어 죽인다. 바로 직전까지 쓰다듬고 간질이던 손이 다음 순간 개의 목을 매달아 죽이게 될 지 모른다. 당장에 위협이 되지 않더라도 언제 사정이 달라질 지 모른다. 그럴만한 힘이 상대에게 있는 한 미리 경계하여 대비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본능인 것이다. 그 만일을 대비하지 않았을 때 그 개체는 마침내 다치고 상하여 심지어 죽게 된다.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다. 눈앞에 무언가 나타나면 사람은 반사적으로 눈부터 감는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서가 아니다. 그것이 반드시 자신에게 위해가 될 것을 알아서가 아니다. 단지 그 앞에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예민하고 약한 눈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눈을 다치고 사람이 자연상태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어째서 길을 가다가도 덩치가 크고 인상이 사납게 생긴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한쪽 구석으로 몸을 피하게 되는가? 사실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심지어 생긴 것과는 달리 무척 착하고 순진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은 당장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내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무언가다. 반대로 인상이 선량하고 덩치도 작다면 그 실체와는 상관없이 보다 안심하고 살갑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

"내가 너희들을 죽이는 사람이냐? 어째서 자꾸 나에게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냐?"

물론 세종(한석규 분)이 백성들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백성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보려 위험을 무릎쓰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지역을 몸소 찾았던 참이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세종을 - 아니 그가 세종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그저 엎드려 그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단지 세종이 목소리를 높여 그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당장 죽임이라도 당할 것처럼 비루하게 세종의 용서를 구한다. 어째서일까?

결국은 강채윤(장혁 분)이 대의를 말하며 세종에게 돌아가려 하는 소이(신세경 분)를 말리며 하는 다음의 말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담아, 담아, 정신차려! 너랑 나, 아무리 신분을 바꿨어도 이 조선바닥에선 가장 밑바닥인 노비야. 그 윗분들이 대의로 죽으라고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하는 노비일 뿐이라고, 담아!"
"글자를 알았으면 그런 일 안 당했을 것 같아? 글자를 알았어도 그것들은 그런 짓을 했을 거고, 우리는 또다른 방법으로 그런 일을 당했을 거라고. 이 병신아!"
"그런 네 마음을 이용하는 거야, 임금은. 그것들은 다 그렇게 이용하고 다 그렇게 버리는 거라구!"

강채윤의 원래 신분은 노비다. 시키면 따라야 하고, 때리면 맞아야 하고, 죽이면 죽어야 한다. '윗 것'들의 말 한 마디 손짓 하나에도 얼마든지 버러지처럼 살다 갔다는 흔적조차 없이 죽어나가고 마는 것이 바로 노비라는 신분인 것이다. 그날 이제까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모두 죽어나가던 그 순간 강채윤은 참혹하도록 확실하게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아비가 죽는데 한 역할을 했던 세종 이도가 성군이라 불리우는 현실을 통해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세종이 성군이라는 것. 모두가 칭송한다. 모두가 찬양한다. 그의 치세를. 그의 업적을. 그토록 원통했던 아비의 죽음은 아무데도 흔적조차 없다. 그토록 사무쳤던 자신의 원한 또한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사람조차 없다. 하기는 그 잘난 사대부조차 태종의 심복이었던 강상인은 단지 장차 세종의 외척이 될 심온을 죽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태종의 치세를 이야기할 때 누가 강상인의 죽음을 이야기하는가? 오히려 세종의 치세를 이유로 그것을 당연했다 잘했다 칭송하는 이마저 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사람을 죽이고서도 전혀 그 책임을 묻지 않는다. 누가 책임을 묻겠는가? 서슬퍼런 태종에게 신하를 죽인 책임을 묻겠는가? 아니면 그 아들인 세종에게 태종의 잘못을 탓하여 따지겠는가? 사육신과 김종서, 단종까지 모두 신원하고서도 사대부들은 여전히 세조를 대왕이라 부르고 있었다.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이 억울한 것은 밝혔지만 그래도 세조는 왕이었고 이후의 모든 왕들은 세조의 후손들이었다. 주인이 노비를 죽인다 해서 노비가 주인에게 따질 것인가? 아니면 같은 주인들이 노비를 위해 주인에게 따지려 들 것인가?

바로 그것이 권력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야 아무라도 할 수 있다. 다만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같은 무지렁이가 무지렁이를 죽였다면 그 죽인 사람은 살인을 저지른 죄인으로써 체포되어 재판받고 처벌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체포하여 재판하고 처벌할 그 주체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권력이라면 공식적으로 그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묻지 못하게 될 것이다. 책임이 사라지게 되었을 때 그는 과연 어떤 행동을 보이게 되겠는가?

거리낌이 사라진다. 망설임이 사라진다. 다른 어떤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 때 믿을 것이란 상대의 최소한의 자제력과 양심 뿐. 죽여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죽일 수 있는 빌미 자체를 피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사람이 좋아 보인다 하더라도 그만한 권력을 가진 것이 분명한 이상 미리 자신을 굽히고 자비를 구하는 것만이 만일 있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인 셈이다. 비굴이야 말로 아무것도 갖지 못한 약자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항상 통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안다. 백성들 입장에서 그와 같이 권세 높은 양반들의 비위를 자칫 잘못 거슬렸을 때 어떠한 결과가 올아오리라는 것을. 당장 그 자리에서 무지렁이 농투성이따위 몇을 죽인들 죄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죽임을 당하고도 그 가족마저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어쩌면 그만한 양식을 갖춘 자비롭고 관대한 이일 수도 있겠지만 방심한 결과는 무척 크다. 미리 굽히고 목숨을 구걸하느니만 못한 것이다. 오랜 그들 나름의 생존의 지혜였다.

그러나 세종은 그것을 이해 못한다. 어째서 자신을 두고 살려달라 하는가? 살리려 하는데 마치 죽이려는 것처럼 살려달라 말하는가? 당연히 세종은 백성이 아닌 때문이다. 아무것도 갖지 못했기에 겪어야 하는 백성들의 부조리한 삶을 알지 못한다. 아니 설사 알더라도 피상적으로만 알 뿐이다. 당면한 현실이며 실재하는 공포인 백성들과는 달리 세종에게 그것은 좋게 대하면 좋게 돌아오는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배신감은 당연하다. 세종이 머리로 아는 백성의 삶과 백성이 실제 겪는 백성의 삶은 다르다. 그리고 그런 오해 때문에라도 사람들은 죽어나간다.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실제로도 많다. 백성을 위하고, 국민을 위하고, 민중을 위하고, 노동자를 위하고, 그러나 정작 유한계급인 지식인이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 그들과 그들이 직접 겪고 있는 현실은 전혀 다른 것이다. 아무리 <농사직설>을 펴내어 농사일을 독려하려 해도 글을 아는 이가 터무니없이 적다. <향약집성방>이나 <의방유취>같은 책을 내놓아 병으로 죽는 이를 줄이려 해도 글을 아는 이가 적으니 책을 읽을 수 있는 이도 적다. 나라에서 직접 방을 붙여 병을 치료할 방도를 전해도 그것을 전혀 읽지 못해 사람들은 여전히 죽어나가고 있다.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되었을 것을. 조금만 더 쉬는 시간을 줄이고, 자는 시간을 줄여 글을 배우려 노력했다면 그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어리석고 게으르다. 나태하고 무책임하다. 그래서 무지렁이라 하는 것일 게다. 경멸하는 마음이 든다. 처음에는 가엾다가 점차 화가 나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그들이 하찮고 한심해진다 누구보다도 그들을 위하려다 도리어 완전히 등을 돌려 더욱 엄격하고 가혹한 모습으로 바뀌고 마는 것이 그런 이유에서다. 머리로 생각하는 현실과 실재하는 현실이 다르다. 그리고 그 벽을 깨지 못하는 이상 그는 결코 벽 너머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일을 마치고 쓰러져 쉬기에 바쁜 백성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멱살을 잡고 마는 세종처럼.

하기는 세종 또한 그러한 많은 지식인들처럼 처음에는 백성들에 실망하고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노력이란 것도 그만한 여건이 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배가 없는데 물고기를 잡는데 노력을 기울일 수는 없다. 땅이 없는데 농사를 잘 지으려 노력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배도 있고 땅도 있는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러한 세종을 일깨우는 것도 여기 배도 없고 땅도 없던, 사람조차 아니었던 소이였다. 소이가 아니었다면 세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물론 드라마임을 안다. 실제의 세종과는 전혀 거리가 멀 것이다. 과연 세종은 드라마에서처럼 그와 같은 백성들에 대한 환멸과 혐오를 극복할 수 있었을런지. 아니 세종은 그러한 감정 자체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세종은 왕이었으니까. 그러한 감정조차 어느 정도 상대를 대등하게 인식할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세종에게는 그저 백성이란 불쌍히 여기고, 보살피고, 이끌어야 할 피동적 객체이지 능동적 주체는 아닌 것이다. 실망할 것도 분노할 것도 없다.

아무튼 바로 여기에서 소이와 강채윤의 입장도 갈리고 마는 것이다. 사람이 기르다 버린 고양이는 같은 길고양이라도 사람을 대하는 것이 다르다. 원래 길에서 살던 길고양이는 일단 사람을 경계부터 하고 본다. 사람이 자신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고 행동한다. 그러나 사람이 기르던 고양이는 사람이 자신에게 잘해주던 기억을 먼저 떠올린다. 강채윤이 경험한 권력과 소이가 경험한 권력이 다른 까닭이다. 왕의 곁에서 왕의 좋은 모습을 보며 지내온 소이에게 권력이란 따뜻한 것이지만, 권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겪어 온 강채윤에게 그것은 무척이나 위험스런 것에 불과하다.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자신과 같은 비천한 신분은 죽고 만다. 그것은 피지배자로서의 강채윤의 당연한 본능이다. 경계심이다.

그만큼 강채윤이 놓인 현실은 비정하고 냉혹한 것이다. 어린 시절 바로 그날처럼 권력이란 얼마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다. 자신의 주위를 죽일 수 있다.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릴 수 있다. 그에 반해 소이에게 그러한 현실을 직접 몸으로 겪을 일은 이제 그다지 없다. 그래서 소이는 세종의 대의를 믿고, 강채윤은 세종의 권력을 경계한다. 소이는 세종의 대의에 자신을 동화시키고, 강채윤은 끝끝내 죽어간 아버지를 놓지 못한다. 성군이고 태평성대이기에 누구에게도 하소연조차 못하는 가엾은 아버지를. 그런데 소이의 낭만적인 이야기가 그에게 들릴 까닭이 있을까? 소이와는 달리 강채윤은 아직 길들여지기 전이다. 그 차이가 소이로 하여금 세종에게로 돌아가게 만들고, 강채윤에게 다시 세종을 죽이게끔 만든다. 강채윤에게 권력이란 여전히 비정하고 믿을 수 없는 증오스런 것이다.

하기는 그래서 세종과 강채윤 다음에 밀본의 정기준(윤제문 분)인 것이다. 태종은 권력을 쥐기 위해 무도하게 정도전을 죽였다. 정도전만이 아니라 민무구를 비롯한 4명의 처남도 모두 죽였다. 심온조차 강상인을 이용해 쥐를 뒤집어씌워 죽이고 있었다. 태종 앞에 사대부란 인간이 아니었다. 단지 태종의 권력을 위한 수단이었다.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죽일 수 있고 대체할 수 있다. 그에 따른 왕의 책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그러한 권력이 세종과는 달리 무도하고 탐욕스런 성향을 띄게 되었을 때 그때 조선이라는 나라는 어찌 되겠는가?

왕은 왕이었다. 자기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자를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며 설득하라. 어쩌면 무엄하기까지 한 소이의 그같은 제안에 오히려 세종은 설레는 감정마저 느끼게 된다. 왕이란 본시 탐욕스러운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도 여전히 모자르다 여기는 것이 권력이라는 것이다. 왕은 그 권력의 정점에 있다. 나라 안의 모든 것이 왕의 것이다. 세종이 굳이 강채윤과 소이의 가족과 지인의 죽음에 대해 아버지 태종에게 책임을 돌리기보다 스스로 잘못했다 사과하고 마는 이유였다. 그는 왕이었다. 왕이라면 강채윤 또한 그의 것이어야 했을 터다. 가장 멀리 있지만 원래 가장 가까이에 있어야 했을 이일 것이다. 입으로는 설레인다면서 표정은 강채윤을 그대로 삼켜버릴 듯하다. 먹이를 앞에 둔 맹수의 모습이다. 한석규는 그 순간 연기가 아닌 실제 세종이 되어 있었다. 감탄한다.

마침내 밀본지서가 정기준의 손에 들어갔다. 전국의 유림을 움직일 수 있는 패가 정기준의 손에 쥐어진 것이다. 그는 또한 왕이다. 오만하고 무도하고 탐욕스럽다. 자신의 정의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정기준과 세종이 충돌하려 한다. 세종과 강채윤이 충돌하려 한다. 강채윤은 다시 정기준과 충돌할 것이다. 정기준의 세상과 세종의 세상과 강채윤의 세상. 강채윤 또한 왕이다. 그는 과연 어떤 왕이 될 것인가? 드라마는 더욱 급박하게 돌아간다.

세종은 물론 훌륭한 군주다. 그의 권력은 분명 옳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지녔던 권력이 옳기만 한가? 세종의 권력을 가지고 탐욕스럽고 우매하다면? 세종의 치세는 분명 많은 이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었지만, 항상 왕이 세종과 같을 수는 없다. 아니 세종이라 할지라도 만일 몇 년을 더 살아 심경에 변화가 있다면 그로부터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세종 앞에 몸을 조아리고 생명을 구걸하던 백성들의 모습처럼.

세종은 분명 훌륭한 왕이었다. 하지만 과연 세종의 치세에 백성들의 억울함이란 없었는가? 억울함에 한을 품고 살아간 이들이 과연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단지 성군이라고 태평성대라고 묻히게 된다면 그 억울함과 한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성군이고 태평성대이니 강채윤은 마냥 이해하고 그 모든 감정을 가슴에 묻고 잊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인가?

세종에게는 대의가 있지만 그 대의는 항상 옳은가? 그 대의는 분명 옳지만 그렇다고 과연 반갑게만 맞을 일인가? 왕이 아닌 백성의 입장에서. 권력을 쥔 자가 아닌 그렇지 못한 쪽에서. 강채윤과 소이의 대립이 그것을 보여준다. 강채윤과 세종의 대결 또한. 왕에 대해. 권력에 대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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