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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0.23 09:12

내사랑 내곁에 "고석빈의 몰락, 최고의 순간을 기다려 끌어내리는 통쾌함!"

배정자, 고석빈 모자, 마침내 그동안의 악행에 대한 대가를 받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당연한 것이다. 어차피 떨어뜨릴 것이면 보다 높이 들어올렸다 떨어뜨릴수록 그 충격도 더하다. 가장 영광된 순간에 가장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춘향전'에서도 하필 암행어사가 출도하는 것이 변학도의 생일잔치다.

화가 난다. 분노가 들끓는다. 제작진에 대한 비난이 상당했었다. 어째서 그 순간 강정애(정혜선 분)는 정신을 잃어 몰락 직전에 놓였던 배정자(이휘향 분)와 고석빈(온주완 분)에게 기회를 주는가? 그러나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마지막 감춰두었던 악의마저 드러내도록 함으로써 보다 통쾌하게 그들의 죄를 응징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농락이다.

과연 강정애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고석빈이 그동안 확보해두었던 비자금을 동원해 지분을 확보하고 마침내 사장의 자리까지 노리려 하겠는가? 심지어 강정애의 호흡기를 떼려고까지 하고, 끝내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된 이소룡(이재윤 분)을 가짜로 몰아붙이며 강정애로부터 떼어놓으려 들고, 아예 강정애의 친구인 정말자(사미자 분)와 봉선아(김미숙 분)조차 배정자로 인해 얼굴조차 보지 못한다. 마침내 사장의 자리에 오르려는 고석빈과 그런 고석빈을 자랑스러워하는 배정자의 모습은 얼마나 추하고 혐오스러운가 말이다. 차라리 울고불고 애원하고 악다구니를 쓰던 지난주보다 지금의 파멸이 더 통쾌한 것이다. 그를 위해 강정애는 쓰러진 것이고 배정자와 고석빈은 마지막 발버둥을 친다.

아무튼 개연성이란 다름아닌 논리일 것이다. 논리란 퍼즐이다. 각각의 요소를 얼마나 모순없지 적절히 끼워맞춰 재구성하는가? 그래서 픽션이란 퍼즐이고 그래서 그같은 구조를 파괴하는 것이 우연인 것이다. 좋은 이야기란 그래서 논리의 퍼즐이 완벽하다. 각각의 요소가 모순없이 정확히 제 자리를 찾아간다. 필자가 드라마에 항상 감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자신이 버린 외손자 생각에 강정애는 희망보육원을 찾아 기부하고, 도미솔(이소연 분) 역시 과거 자신이 취재했던 입양아 출신의 존 쿡과의 인연으로 비슷한 처지의 미혼모를 돕느라 희망보육원을 찾게 된다. 둘은 희망보육원에서 마주치고, 그리고 필연처럼 원장실에서 도미솔은 강정애가 남긴 흔적을 찾아 이소룡에 알린다. 결국 알아낸 전화번호는 자신의 회사 오너이기에 중요한 프로젝트까지 맡아 추진하면서 당연하게 저장해 놓은 회장의 전화번호다. 이미 공순호는 이소룡의 주변에 있고, 그녀 또한 강정애의 전화를 받으며 그녀의 핸드폰에도 강정애의 전화번호는 입력되어 있을 터다.

전혀 신기한 것이 없다. 무언가 대단하다거나 절묘한 우연이나 인연은 없다. 철저한 개연성 위에,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상식 아래 모든 과정이 이루어진다. 전화를 걸었으니 전화번호가 핸드폰에 남게 된다. 회사 직원으로 사장이나 회장과 마주할 기회가 많았으니 핸드폰에 그 번호가 저장되어 있는 것도 당연하다. 강정애가 희망보육원을 찾는 것도, 도미솔이 역시 희망보육원에서 그녀를 만나고, 그녀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 역시 우연이지만 필연으로서 이루어진다. 진짜 예정된 사건처럼 아주 오랜 어떤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인연이 하나씩 점층되며 그렇게 한 자리에 만난다. 진실이라는 이름을 등에 지고.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랬었나 하는 느낌조차 받지 못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이소룡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장애는 강정애의 잃어버린 핸드폰, 그러나 그조차 배정자와 고석빈을 직접 마주하며 어떤 확신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하필 그 순간이 고석빈이 사장취임을 예고하고 기쁨에 들떠 그 준비를 위해 배정자가 자리를 비운 바로 그 때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사건이 이소룡이 마침내 자신의 외할머니를 만나는 감격의 순간을 배정자와 고석빈이 그토록 꿈꾸던 모든 것을 이루는 절정의 순간과 정확히 교차시킨다.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이제 드디어 저 얄미운 배정자와 고석빈에게도 마지막이 다가오는구나.

두근... 두근... 두근... 바로 이런 것이 조이는 맛일 것이다. 그동안 배정자의 악행에 분노하고 고석빈이 지은 죄를 원망하던 마음이 최고조로 이르는 순간 모두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그들에게 당연히 돌아갈 결과를 벌써부터 차근차근 조이듯 보여준다. 한 걸음 한 걸음 이소룡이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그조차 고석빈과 배정자의 악의에 부딪히고, 그러나 마침내 강정애가 눈을 뜨며 이소룡과 만나게 되고, 고석빈의 의도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그 순간에 반격은 예고되고 있다. 정대리가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고석빈과 박이사의 대화를 녹음하고 그것을 이소룡에게 건낸 순간 모든 것은 끝나고 만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고석빈이나 배정자처럼 모두가 당장의 이익을 위해 양심을 저버리지는 않는 것이다.

상징적이며 통쾌한 장면이었다. 더구나 하필 그 순간 강정애도 눈을 떴다. 모든 것이 고석빈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에 불만과 바람이 엇갈리며 고조되는데 강정애가 눈을 뜨며 기대한 바가 이루어지려 하고 있었다. 불만이 컸던 만큼 바로 눈앞에 보이는 통쾌함이 안타깝고, 바람이 간절했던 만큼 그것이 이루어지려는 순간이 더욱 멀게만 느껴진다. 오히려 바라고 기대한 것들이 다가옴에 따라 보고 있는 긴장도 높아진다.

이런 맛에 드라마를 보는 것이다. 암행어사가 출도하여 변학도를 혼내주고 춘향을 구해줄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생일잔치에 춘향을 불러 죽이려 하는 변학도의 모습에 마음을 조이고. 동생이 부자가 된 것을 시기하여 일부러 제비다리를 부러뜨리고 박씨를 얻은 놀부가 박을 타는 장면에서 주먹을 꽉 쥐고. 그래서 나쁜 놈은 나쁜 놈이어야 한다. 악역이 악역다울 때 그 성취감도 그만큼 크다. 이휘향과 온주완의 탁월한 연기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이휘향의 연기는 마지막까지도 그녀를 연민하면서도 혐오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경찰도 소용없다. 법도 소용없다. 잘못을 저질러 잡혀가는 순간에조차 그녀에게는 오로지 아들 고석빈 뿐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잘못이기도 하다. 내 아들이니까. 내 형제니까. 나 친구니까. 내 동료니까. 세계가 좁다. 한 마디로 무지하다. 그래서 내 아들만 잘되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내 아들만 잘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옳은 것이다. 그것으로서 정의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것으로 보편의 원칙으로 삼는다. 마치 아이처럼. 그런 부분에 대해서조차 배정자의 불우한 성장배경을 세밀하게 배치한 작가의 섬세함에 감탄할 뿐이다. 이해가 되면서도 그로 인해 고통받고 피해 입은 이들을 떠올리게 되기에.

하기는 그래서 고석빈은 자식으로써 어머니 배정자에게 한 가지 가장 못할 불효를 저지른 것이기도 하다. 원래 가장 큰 효도는 부모를 영광되게 하는 것이고, 가장 큰 불효는 부모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부모보다 더 나아지라 하는 것은 단순히 사회적 지위나 부, 명예를 의미하지 않는다. 부모가 떳떳이 자식을 자랑할 수 있도록. 부모가 스스로 자식을 말하며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결국 고석빈으로 인해 배정자는 다시 한 번 강정애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더 배우고 더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었던 고석빈이 배정자의 무모함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면. 그녀의 탐욕을 그가 먼저 나서서 제어할 수 있었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도 또한 작가는 쓸데없이 세밀하다.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무엇도 하지 못하고 좋아하는 도미솔과 도미솔이 임신한 아이를 버려두고 도망쳤다는 사실로 인해, 더구나 그로 인해 도미솔은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아이마저 지웠다고 말한다. 자존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어머니 배정자의 탐욕이 그의 아들로서의 어머니에 대한 본능적 연민을 자극한다. 파멸로 질주하던 열차였다. 멈추는 방법을 몰랐다.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으니. 그토록 파렴치하고 무도한 행위를 일삼던 인물이었음에도 때때로 보여주는 복잡한 아련한 표정이란. 온주완이 이렇게까지 연기에 능한 배우인가 새삼 깨달았다. 누가 뭐라 해도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기둥은 다름아닌 이휘향이 연기한 배정자와 온주완이 연기한 고석빈 둘이었다. 이 둘이 아니었다면 드라마는 어디로 흘러갔을까?

아쉬움은 있다. 결국 드라마는 처음 그토록 인상깊게 보여주었던 어려서 미혼모가 된 도미솔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과 싸우며 이겨나가는 모습을. 하지만 그러기에는 세상이란 너무나 거대한 벽이었으니까. 겨우 지금처럼 이소룡과 더불어 작은 행복을 지켜나가는 것조차 도미솔에게는 너무 버겁다. 그토록 모두의 비난을 듣는 고석빈에 대해 법으로 싸우면 도미솔의 모정이 그들을 버리고 떠난 고석빈의 부정에 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라. <내사랑 내곁에>를 통해 보는 현대의 대한민국의 솔로몬의 판결은 모정이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권리란 아이를 아이의 아버지와 공유하는 것 뿐이다.

아마 그런 점에서도 아이의 아버지 고석빈과 그의 어머니인 배정자는 파렴치한 악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미워하고 원망하지 않을 수 없는 그들 모자이건만 여전히 그는 봉영웅에게 아빠이고 그녀는 봉영웅에게 할머니다. 예고편에 잠시 나온 결말은 따라서 그러한 모든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어떤 상징적 답이었을까?

도미솔의 비중이 너무 없다. 원래 이소룡은 비중없이 비중이 컸다. 이소룡이 스스로 움직였다기보다는 이미 준비된 무대 위로 그대로 이끌려 다녔다. 덕분에 마지막까지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배정자와 고석빈, 악역이란 이런 것이다. 통쾌하다. 지켜본 보람이 있다.

과연 오늘 마지막회에서는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마무리지으려는지. 결국 여기에서 주제는 드러나게 될 것이다. 모든 극적 긴장과 갈등이 해소되 난 이완의 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기에는 드라마는 시사교양프로그램이 아니다. 기대하게 된다. 재미있다. 최고로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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