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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칼럼
  • 입력 2014.10.03 05:26

'일베'와 한국사회의 좌절과 절망

더 이상 아이를 낳기를 거부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말하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어째서? 자기도 벌어서 사면 된다. 사촌이 땅을 산 것이 그리 부럽다면 자기도 열심히 돈을 모아 땅을 사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동기로 삼는다. 나도 사촌처럼 언젠가는 내 땅을 가지겠다. 그런데 배아파하기만 한다.

현재에 만족할 수 없다면 방법은 두 가지다. 앞으로 나가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현실이 불만스럽다면 방법은 역시 둘 중 하나다. 앞으로 나가 현실을 바꾸거나, 아니면 뒤로 물러나 현실과 타협하거나. 어차피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현실을 대신해서 자신을 바꾼다. 지금의 현실이 대단히 만족스럽고 오로지 이것만이 최선이다.

자기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당연히 사람은 위를 바라본다. 앞을 보고 나아가려 한다. 확신이 없다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적당히 타협하고 주저앉기를 선택한다. 하지만 동기가 현실의 불만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현실과 자신과의 사이에 모순과 괴리를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었기에 현실과의 타협은 또한 하나의 이상으로 여겨지게 된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의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다. 잘못된 것은 그런 현실을 거부하는 다른 누군가다.

▲ 일베저장소 사이트 캡처

같이 땅이 없었다. 자기 땅 없이 소작을 부쳐먹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사촌이 땅을 사게 되었다. 마치 배반당한 것 같다. 자기만 버려진 것 같다. 그렇다고 자기가 이제 와서 땅을 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앞으로 자기 땅을 가질 것이라는 기대나 희망도 가지기 힘들다. 다시 사촌을 끌어내려야 한다. 자기와 같은 위치로. 자기와 같은 한심하고 비루한 처지로. 그러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앞으로도 영영 땅을 살 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지독한 절망이다.

60년대 기존의 세계를 뒤흔든 청년문화의 반란은 청년세대 자신의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마침내 한계를 드러낸 기성세대에 비해 보다 풍요로운 환경에서 첨단의 문명을 경험하며 자라난 새로운 세대들은 시대에 대한 어떤 도덕적 윤리적 책임도 지지 않으며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낼 새로운 주역으로서 자라나고 있었다.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다. 그래서 그들의 투쟁은 미래지향적이었다. 보다 나은,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의 건설을 위해 그들은 기꺼이 나섰고 부딪혔으며 그리고 부서졌다.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강한 의지가 그들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 패전국으로 전락한 1920년대의 독일에서 많은 젊은이들은 실의와 좌절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막대한 인명과 자원을 소모해가며 치렀던 전쟁에서 패하고, 심지어 패전국으로서 지불해야 할 배상금으로 인해 경제마저 처참할 정도로 망가지고 말았다. 최소한 대등한 상대라 여겼던 연합국들이 어느새 승자라는 우월한 지위에서 자신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상처입은 자존감에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현실이 그들로 하여금 극단적으로 현실을 부정하게끔 만들었다. 자신들은 패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전쟁에 패했으니 그 책임은 다른 누군가에게서 찾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껏 미워하고 책임을 물어도 되는 그들은 바로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을 증오하고, 슬라브인을 혐오하며, 집시와 장애인을 경멸하고 배척한다.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 혹은 무정부주의자는 독일인의 강인함과 순수성을 오염시키는 불순한 존재들일 뿐이다. 순수한 독일인만 남는다면 과거와 같은 부당하고 불합리한 상황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퇴행이다. 실패한 과거에 사로잡힌다. 그곳에서 멈춰버리고 만다. 결국 지난 굴욕과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무리한 팽창정책을 펼치다 그나마 이루어 놓은 성과들조차 모두 전쟁의 잿더미속으로 밀어넣고 말았다. 술집에 모여 비루한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하던 젊은이들이 새롭게 이루어낸 세상이란 그렇게 끝나고 만 것이다.

강자가 되고픈 것도 아니다. 승자가 되어 남의 위에 서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이미 오래전에 포기했다. 다만 지금의 자신에 만족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의 자신을 위로하고 싶은 것이다.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일간베스트'라는 이름 자체가 모두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비루한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것이다. 서로를 무시하고 비하한다. 조롱하고 모욕한다. 그것을 쿨하다 여긴다. 그러는 가운데 현실의 비루한 자신을 감춘다. 그것을 치장하고 변명한다. 어떤 가치를 생산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상을 이루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조롱하고 모욕함으로써 만족감을 얻는다. 자기는 잘못되지 않았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격도 그렇게 정당화된다. 약자는 약자인 채로 있어야 한다. 약자가 약자인 채로 있어야 자신도 더 이상 약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스스로 강자가 되어서가 아닌, 약자를 약자인 채로 남겨둠으로써 자신의 빈곤한 자존감과 비틀린 우월감을 충족시킨다. 물론 강자 역시 얼마든지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다. 오히려 더 바라기도 한다. 다만 그것은 그로 인해 자신이 상처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에서다. 그럴 용기도 각오도 없다. 단지 다른 사람을 위에서 굽어보며 경멸하고 조롱하는 쾌감만을 바랄 뿐이다. 그것만이 자신의 가치와 정의를 증명해준다. 어쩌면 자신조차 자신을 증명할 수 없다.

누군가를 증오하고, 누군가를 원망하며, 누군가를 혐오하고 경멸하며, 혹은 무시하고 조롱한다. 비난하고 배척한다. 그렇게 갈갈이 찢긴 채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으면 그 위에 올라가 포효한다. 자신조차 자신을 가치있다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빈곤한 자존감이라 말하는 것이다. 오로지 타인을 통해서만, 타인의 고통과 상처를 통해서만 비로소 자신을 찾을 수 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지금까지의 내용에 답이 있을 것이다. 좌절감, 열패감, 무엇보다 그로부터 비롯된 절망과 체념. 무엇도 희망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나마 인터넷은 그들을 위한 배설의 공간이 되어 준다. 그렇게라도 해소할 수밖에 없다. 견딜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사람들은 인터넷이라는 허무의 공간으로 도망치고 숨는다. 그리고 꿈을 꾼다. 내일이 허락되지 않은 절망과 좌절의 꿈이다. 악과 독만 남는다.

더 나아지면 된다. 더 좋아지면 된다. 더 훌륭해지면 된다. 더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자신이 되면 된다. 그런데 어떻게? 갈수록 출산율은 낮아지고 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사회가 거부하고 있다. 알면서도 단지 외면하고 있는 것 뿐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 전체가 그같은 체념과 절망에 익숙해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을 살아가기도 급급하다.

항상 생각한다. '일베'는 어디에서 왔을까? 과연 '일베'는 우리들 자신과는 다른 별개의 존재들일까? 전혀 다른 인종들인 것일까? 바로 가까이에 함께 숨쉬고 함께 살아가는 그들이 바로 '일베'인 것이다. 다른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무거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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