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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칼럼
  • 입력 2014.08.27 07:46

세월호 유가족 검증, 유민아빠 김영오씨를 심판하려는 이유

특별한 존재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정치, 피해자에게 자격을 묻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원래 권력이란 신성한 것이었다.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최초의 왕들은 스스로 초월적 존재가 되고자 했었다. 신의 아들이었고, 신의 대리인이었으며, 때로 신 그 자체가 되고 있었다. 신성이야 말로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신성은 피로써 계승되었다.

세속의 권력이 신성을 대신하게 된 뒤로도 그것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권력은 고귀한 신분의 몇몇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구분하는 기준이 바로 피였다. 자신의 몸에 흐르는 특별한 피야 말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하는 가장 명확한 기준이었다. 고귀한 피에 고귀한 권리와 의무가 깃든다. 그들을 흔히 귀족이라 부른다.

근대로 접어들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지배계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피가 아닌 자신의 실력으로 권력을 쟁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규범인 도덕이 그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보다 엄격한 도덕적 규범과 그에 따른 더 크고 무거운 도덕적 책임과 의무야 말로 그들을 다른 보통사람들과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었다. 말과 행동으로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야만 했었다. 자격을 인정받아야 했다.

▲ MBN 방송캡처

이를테면 얼마전 종영한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도전이 주장했던 재상총재제가 그 대표적인 예일 수 있을 것이다. 과거를 통해 실력을 검증하고, 이후 여러 검증과정을 통해 인격과 성품까지 걸러낸다. 그렇게 실력과 덕망을 두루 갖춘 인물을 찾아내어 재상으로 임명하고 정치를 맡긴다. 사대부라는 말 자체가 선비로써 학문을 닦고 덕망을 갖춘 이들을 찾아 그들에게 나라의 일을 맡겨야 한다는 유가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유교사회에서 스스로를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학식과 덕망을 검증받아야 했다.

한국정치문화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로 지목받는 '거물숭배'의 전통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스스로 충분한 학식과 덕망을 갖추고 있다면 굳이 나서서 알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 이름은 널리 퍼지게 된다. 모두가 이름을 알 정도라면 그의 실력과 인품은 굳이 검증할 필요조차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찾아 나라의 중요한 일을 맡긴다. 조광조가 추진한 현량과가 바로 그것이었다. 나라의 명사들을 찾아 그들에게 벼슬을 주어 나라의 일을 맡기려 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정치적 이상이나 포부와는 상관없이.

어차피 그만한 실력과 인품을 가진 이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과연 어떤 방향으로 어떤 형태로 노력을 기울일 것인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당위가 더 중요하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정치인의 이상일 것이다. 개인이란 없이, 개인의 욕망이나 이상은 전혀 아랑곳없이,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 나라가 필요로 하고 백성이 요구한다면 마땅히 그에 응해 이루어주려 노력할 것이다. 이념이나 정책과는 상관없이 따라서 얼마나 크고 대단한 인물인가만을 보고 투표한다. 정책은 국민이 요구하는 대로, 혹은 그가 올바른 정치인이라면 그 정책은 당연히 나라와 국민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자격을 묻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나 나라에 어떤 의견을 말하려 할 때. 어떤 요구를 전하려 할 때.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인가. 사회와 나라의 중요한 일에 관여할 자격이 그들 자신에게는 있는 것인가. 도덕적으로도 완벽해야 한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일에 개인이란 있어서는 안되기에 개인의 성향이나 지향 역시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사회와 사회의 모두를 위해서. 최소한 자신들에게 해가 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멸사봉공, 선공후사, 사기종인, 개인을 죽이고 모두를 위한다. 여전히 우리는 전통사회에 살고 있다.

정치란 서로 다른 욕망과 이상을 가진 다수의 개인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관철해가는 과정일 것이다. 서로 다투고 부딪히고 대화하고 타협하고 양보하고 때로 주고받으며 최대한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해낸다. 어떤 특별한 개인들이 모두를 위해 베푸는 것이 아닌 그렇게 스스로가 답을 찾아내는 과정인 것이다. 조금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어도, 도덕적으로 약간의 약점이 있더라도, 그런 것이 바로 사람이고, 그런 개인들로 이루어진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인 것이다. 그들이 바로 그 주체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한다. 국가와 국민이라는 대전제 아래 모두가 그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는 정치만을 꿈꾼다. 특별한 사람들이 특별하게 무언가를 베푸는 그런 정치만을 기대한다. 자격을 묻고 배제한다. 더 크고 대단한 거물만을 쫓을 뿐, 작지만 구체적인 이야기에는 관심조차 없다. 공약이 아닌 후보의 이름을 보고 투표한다. 정당 역시 마찬가지다. 힘있고 능력있는 정당이라면 내가 요구하는 바도 이루어줄 것이다. 철저히 타율적 정치다.

어째서 딸의 죽음에 대해 그 진상을 제대로 밝혀달라며 목숨을 건 단식을 이어가고 있는 김영오씨에게 그 자격을 묻는 여론이 비등한가. 아버지로서의 자격을 믿고, 그같은 요구를 할 수 있는 순수한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다시 묻는다. 아버지로써 딸에게 얼마나 평소 잘했는가. 시민으로서 얼마나 정치적으로 순결하고 무결한가. 그리고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비난한다. 자격없다. 어째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영오씨처럼 자식에게 항상 잘해주지도 못하고, 나름대로 정치적인 지향이나 성향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것임에도. 심지어 그 출신지마저 공격의 빌미가 된다. 국궁을 취미로 가졌다고 그것으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권력이 그 대상이기 때문이다. 대단할 것 없는 일개 개인이 권력에 도전하고 그에 다가가려 한다. 권력이 그의 존재를 의식하는 순간 그 또한 권력이 된다.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자격을 묻는다. 과연 김영오라는 개인에게 이 사회에 영향을 끼칠만한 능력과 자격이 있는가. 평범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특별한 일을 할 특별한 존재로써. 그저 평범한 개인이기에 그에게는 무엇도 바라거나 요구할 자격이 없다. 특별하지 않은 것이 그에게는 죄가 된다.

비단 김영오씨만이 아니다. 사회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면 한결같다. 나라와 국민에게 무언가를 주장하려 할 때면 한결같이 보이는 모습들이다. 그럴 자격이 있는가. 그럴 주제가 되는가. 그리고 입을 다물게 한다. 가만히 있게 한다. 보잘 것 없는 개인들인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자격이 없다.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 그럴 권리가 주어진다. 결국은. 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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