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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칼럼
  • 입력 2014.08.18 08:40

계속된 군대내 인권유린,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해

계량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우리 사회의 현재를 진단하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권력이란 권리다. 타인의 권리다. 위임받거나, 혹은 강제로 빼앗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흔히 권력이라 부른다. 한 마디로 구속한다. 그리고 강제한다. 인신의 자유를 빼앗고 예속시킨다.

권력은 원래 효율을 위해 만들어졌다. 집단의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보다 효과적으로 개인을 동원하고 사용할 수 있어야 했다. 개인이란 단지 전체를 위한 수단이고 대상에 불과했다. 그것들을 관리할 책임이 권력에 주어졌다. 이를테면 강제에 의해 동원된 개인들에 대한 거의 전적인 권한을 가지는 대신 승리에 대한 강한 책임을 요구받는 군지휘관들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유사시 휘하장병들은 지휘관에게 자신의 생명까지 맡겨야 하지만, 그것은 결국 개인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궁극적으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밀림을 개간하고, 둑을 쌓고, 수로를 만들고, 외부의 적들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야 하고, 하나같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면서 집단의 역량을 최대한 동원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들 뿐일 것이다. 아직 개인의 육체적 능력에 많은 부분을 기댈 수밖에 없었기에 얼마나 많은 개인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가에 그 성패가 달렸었다. 황제의 명령이 있었기에 내정이 피폐할 정도로 노동력이 동원되어 중국대륙의 남과 북을 잇는 대운하는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이 힘들고 고되도, 그로 인해 생업을 돌보지 못해 헐벗고 굶주리게 되어도, 당장 먹을 것이 없어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운 상황에서도, 그러나 황제의 명령이 있으니 운하는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개인들에게 권력과 맞설 힘이 주어진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내가 힘들면 거부해도 된다. 그로 인해 내게 불이익이 돌아온다면 마땅히 저항할 수 있다. 그럼에도 권력이 그를 강제할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결국 타협을 해야 한다. 개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국의 존왕은 귀족과 런던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해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해야 했던 것이다. 마그나카르타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다. 비록 소수에 불과하지만 왕권에 대한 귀족과 자유민들의 권리를 명문화하고 있었다.

하기는 왕권이 제후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기에 봉건사회라 불리는 것이기도 했었다. 왕과 신하인 영주 사이에 맺어진 계약 안에서만 왕은 권리를 가지고 영주는 의무를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계약에 없거나 한도를 넘어선 요구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거부할 권리까지 가지고 있었다. 봉건사회에서 봉건영주를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지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설득하고 타협해야 할 대상이었던 셈이다. 유럽에서 개인과 인권에 대한 개념이 나타나게 된 것이 그냥 우연한 결과는 아니었던 셈이다. 대영주에서 소영주로, 부유한 지주와 상공인에서 일반 시민에게로, 나아가 노동자와 농민, 여성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근대사란 그같은 개인의 권리가 확장되어가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권력에 맞설 수 있는 개인, 개인에 대해 제한된 권력, 결국은 평등이다. 개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평등을 전제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며 같은 가치를 가진다. 권력이란 단지 같은 인간 사이에 필요에 의해 발생한 역할의 하나에 불과하다. 전투중 지휘관은 병사에게 명령할 권한을 가지고, 병사는 명령에 복종할 의무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전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역할의 구분일 뿐 개인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구분은 아니다. 월급을 주는 사장도 월급을 받고 일하는 직원도 결국 동등한 인격체로써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에 따른 충분한 예우와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개인에게는 얼마든지 자신에게 걸맞는 예우와 보상을 요구하고 누릴 권리가 있다. 물론 그 수준은 충분히 높은 정도에서 결정될 것이다.

문득 지난번 철도노조파업 당시 불거졌던 임금논란과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군대내에서의 인권유린이 아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고작 그런 정도의 일을 하면서 그렇게 많은 임금을 받고 있는가. 철도노동자의 가치란 그들이 받는 임금보다 한참 낮다. 그들이 자신의 일을 위해 노력하고 투자해 온 시간들의 가치란 그들이 받는 임금에 한참 못미친다. 그보다 몇 배의 연봉을 받는 사람들도 분명 현실에 존재함에도 철도노동자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없다 단정짓고 만다. 마찬가지로 계급이 낮거나, 군인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 경우 그만큼 권리는 제한되어야 한다. 구타와 가혹행위, 폭언, 왕따 등의 인권유린을 당하면서도 그것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군복무경험자 가운데 가해자의 입장에 공감하고 동정을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기는 무엇보다 장병들을 통제하고 관리해야 할 군 스스로가 국가에 의해 징집되어 동원된 개인들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당장 인신에 대한 권한과 함께 책임까지 위임받은 개인의 사고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은폐하고 축소하려 시도하는 자체가 그 증거일 것이다. 개인의 가치보다 군이 져야 할 책임의 무게가 더 큰 것이다. 군에 가해질 비판과 질책이 더 무거운 것이다. 심지어 목숨을 잃은 병사가 생겨도. 그들의 죽음으로 절망하게 될 가족들이 있음에도. 최저임금은 커녕 며칠 일당도 안되는 급여를 받고 복무하는 병사들이니까. 국가의 강제에 의해 별다른 타협이나 설득의 시도 없이도 끌고 올 수 있는 병력들일 테니까. 어떤 개인도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어떤 불합리도 부조리도 그것을 감당하는 것은 병사들의 몫이다. 개인들의 몫이다. 그것을 병사들 역시 배우게 된다.

군생활을 못하니 맞아야 한다. 주어진 임무와 역할을 잘해내지 못하니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인간 이하의 모욕과 수모까지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그나마 최근의 군대는 많이 나아진 것이다. 민주화와 함께 병영생활의 수준 역시 꾸준히 향상되어 왔었다. 병사 개인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그들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방향으로. 하지만 근본은 다르지 않다. 여전히 많은 병사들이 용돈조차 되지 않는 급여만을 받고 복무하고, 모든 보급이나 처우등에서 열악한 상태에 있다. 병사들을 손쉬운 노동력으로만 여기는 간부들의 인식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쉽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 죽음마저 가볍게 여긴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국가를 위해서. 이 사회를 위해서. 기업을 위해서. 혹은 가족을 위해서. 그래서 참으라. 그래서 견디라. 어떤 열악한 환경도. 어떤 형편없는 대우도. 학습하고 있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는 약간의 위험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경제를 위해서는 조금의 억울함 정도는 억누를 수 있어야 한다. 억울하고 화가 나도 납득하고 동의해야 한다. 자식잃은 부모들을 향해 국가를 말하고 경제를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 슬픔의 가치마저 계량하려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이란 곧 돈이기에 오로지 돈만을 이야기하려 한다. 개인의 가치가 금전적 가치로 치환된다.

권력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너도나도 권력을 쥐기 위해 혈안이다. 그래서 경쟁사회인지 모른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더 잘하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정점을 향해 모두가 한 줄로 늘어서서 달리는 경쟁이다. 누가 더 정상에 가까운가. 법조인이 되고 고위공무원이 되는 것이 곧 사회적인 신분상승을 뜻한다. 그만큼 권력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뜻이다. 그것이 곧 개인의 가치와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비교하기 좋아하는 문화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을 하나의 기준만으로 판단할 수 있다.

권력이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었던 것이 불과 얼마전이었다. 마음대로 개인을 구속하고 고문하고 죽이고 난 뒤에도 오히려 불명예를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이 한 세대나 겨우 지났을 뿐이었다. 권력에 의해 대기업이 무너지고, 권력에 의해 맨손으로도 성공신화를 일구었다. 법도 양심도 소용없었다. 공공의 규범과 가치 없이 의미없었다. 하다못해 평범한 개인들조차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여기면 필요없이 잔인해지고 가혹해진다. 이른바 갑을문화라는 것이다. 권력이 곧 정의다. 누가 권력을 가졌는가만을 판단한다. 그것이 사회에서의 그의 신분과 지위, 나아가 그의 존엄마저 결정한다. 가치를 결정한다.

권위주의 사회의 한 단면이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현주소일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계량한다. 인간의 가치를 판단한다. 인간의 존엄과 양심마저 자의적 잣대로 서열화한다. 그래서 임금 역시 남의 돈이 되고 있을 것이다. 정당하게 내가 받아야 할 댓가가 아니라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노동자에게 지급하고 있는 것이다. 인권이란 당연히 누리는 권리가 아닌 일방적으로 계량하고 판단할 수 있는 어떤 한 기준에 불과하다.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 개인의 모든 것은 결정되고 판단된다. 집행된다. 개인이란 자신의 존엄에 대해서조차 타자로서만 존재한다. 모든 문제들의 이유고 원인이다.

때려도 좋을 만큼 가치없다. 괴롭혀도 좋을 만큼 하찮다. 모욕하고 따돌려도 상관없을 정도로 그는 하찮은 존재다.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해서도 안되고, 더 나은 처우를 요구해서도 안되고, 하물며 존엄을 말하는 것은 외람되다. 사정하는 것은 더 잔인하게 짓밟고 폭행한다. 살고자 하는 발버둥마저 무시하고 비웃는다. 인간이란 나와 같은 존재를 뜻한다.

일제강점기를 증오하는 이유일 것이다. 한국의 근대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일그러졌다. 평등한 인간이어야 했다. 대등한 개인들이어야 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신분과 서열이 나뉘고, 해방 이후 그것은 자본주의의 질서로 이름만 바꾸었다. 마음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군사독재도 있었다. 선과 악이, 정의와 불의가 아무렇지 않게 뒤섞이고 있었다. 무엇이 중요한가마저 잊고 말았다. 아니 아예 배우지도 못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해. 그것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도. 민주주의 사회다. 민주주의 국가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동등한 존엄과 가치를 갖는다. 그 의미를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너무 오래전이라 모두들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권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권력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권력이 인간의 가치마저 결정한다. 인간이 권력을 가진다. 무서운 일이다. 두려운 현실이다.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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