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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칼럼
  • 입력 2014.07.06 06:46

임병장의 왕따와 극기훈련, 강해야 사는 사회

사회가 요구하는 통과의례, 강한 인간을 위한 과정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아마 지금도 지구 어디선가는 한 사람의 어른으로 인정받기 위해 성인식이라는 통과의례를 치러야 하는 젊은이들이 있을 것이다. 가장 인기있는 레저스포츠 가운데 하나인 번지점프 역시 원래는 비투아누 제도에서 치러지던 성인식에서 유래되었다. 높은 장대에서 발목을 묶은 끈 하나에 의지해 뛰어내림으로써 자신의 용기를 증명했다.

전통사회에서도 일정한 크기의 바위를 들어올리거나 특정한 계곡을 단 번에 뛰어넘는 등의 육체적인 능력을 검증하기 위한 과정이 존재하고 있었다. 과연 어른으로서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는가. 한 사람 몫을 온전히 할 수 있게 되고서야 품삯도 한 사람 몫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가정도 꾸릴 수 있었다. 어른이라는 말 그대로 제 짝을 찾아 가정을 이루어 독립하려면 한 사람 몫은 온전히 할 수 있어야 했다.

생산에 종사해야 할 노동력으로써, 혹은 짐승을 사냥하고 혹은 외부의 적과 맞서싸워야 하는 전사로써, 대부분의 사회에서 남성들은 한 사람의 어른으로 인정받기 위해 먼저 자기자신부터 증명해야 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들이 그러했듯, 자신과 자신의 자식과 그 자식들 대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차피 세상은 바뀌지 않으니까. 환경도 자신들이 해야 할 일도 전혀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성인식이라는 것이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도 다르고 할 수 있는 일도 다 다르다.

불과 얼마전이었다. 고등학생들이 해병대 캠프에 참가했다 바다에 빠져 사망한 불행한 사고가 있었다. 도대체 고등학생들이 굳이 적지 않은 비용까지 지불해가며 군사훈련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고등학생만이 아니다.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극기훈련이라는 이름 아래 유사군사훈련에 동원되고 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국가대표운동선수들이 커다란 국제대회를 앞두고 해병대캠프에 참가하는 것이 심심찮게 뉴스로 보도되고는 했었다. 국가대표쯤 되면 평소 소화하는 훈련의 양만 군사훈련의 그것을 우습게 넘어서기도 한다. 그런데도 일부러 군사훈련에 참가함으로써 정신력을 배양하고자 한다.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마 이번 임병장의 총기난사와 무장탈영, 정확히는 그 원인으로 지목된 왕따에 대한 일반의 반응 가운데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작 3개월이다. 남들은 다 아무일 없이 참고 견디는 것들이다. 죽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고 어떻게든 견디며 다시 사회로 돌아온다. 심지어 그것을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 이야기하는 사람들마저 있었다. 설사 왕따가 있었더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마지막까지 참고 견뎌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임병장에게 모든 잘못이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원래 군대는 그런 곳이기에 그런 군대에 적응하지 못한 임병장에게 모든 책임이 지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군대 갔다온 사람에게 다시 군대 가겠냐 묻는다면 다시 가겠다는 사람은 거의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아직 군대 가기 전인 사람에게도 군대에 가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묻는다면 거의 대부분 군대에 가지 않겠다 말할 것이다. 그만큼 힘든 곳이 군대다. 그만큼 모두가 가기 싫어하는 곳이 군대다. 필자 역시 군복무에 대한 기억 가운데 좋은 것이 그다지 없다. 힘들고, 더럽고, 불편하고, 답답하고. 부당하고 불합리한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부조리하고 불공정한 일들도 너무 많았다. 그래도 군대니까 하며 참아야 했다. 어떻게든 2년만 참으면 군대에서 나갈 수 있으니까.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임병장에 대해서도 전역을 3개월 앞두고 있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 섞인 원망을 보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다만 이대로 좋은 것인가? 흔히 전역자들이 하는 말이 있다. 군대 좋아졌다. 그래서 군대 돌아가는가? 경험에 기댄다. 자신이 겪어온 과정들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판단하려 한다. 자기가 이등병이던 시절처럼. 자기가 병장이 되고서도 후임병 역시 그때처럼 스스로 견뎌내고 이겨내야 한다. 자기가 그래왔었기에 자기 이후의 후임병들 역시 똑같이 견디고 이겨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자격이다. 그것을 해낸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다. 원래 군대는 그런 곳이며 그것을 견뎌낼 수 있어야 비로소 자격이 주어진다. 통과의례와 같다. 군대는 변하지 않기에 따라서 개인이 군대에 맞춰가야만 한다.

당연한 것이다. 어째서 극기가 필요한가? 어째서 그렇게 절박하게 자기를 이기려 하는 것인가? 편하고 싶다. 즐기고 싶다. 누리고 싶다. 누구나 가지는 당연한 본능적인 욕구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꽉 짜여진 현실에 대해 요구하게 만드는 이기이기도 하다. 바로 자기가 그토록 이겨내야 하는 자기의 정체일 것이다. 조금 불편하고 조금 답답하고 조금 억울하고 부당하다 생각되어도 참고 견디라. 그렇게 여기는 자기의 본능과 욕구를 철저히 억누르고 배제함으로써 현실에 맞추도록 한다. 어차피 어떻게 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바뀌어서는 안되는 것이기에 개인이 그에 맞추도록 철저히 자기를 억압하도록 하는 것이다. 왕따가 아무리 부당해도 그에 저항하기보다 남들처럼 참고 견디며 그에 맞춰가야 한다. 왕따를 당하지 않도록 스스로 주위에 맞춰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말빈 러너 교수의 '공정한 사회에 대한 믿음'에 관한 실험이 있었다. 피실험자인 여성이 지속적으로 전기충격을 받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어떤 판단을 내릴까에 대한 실험이었다. 두 사람의 피실험자에게 퍼즐게임을 풀도록 한 뒤 결과와는 상관없이 임의로 상금을 줄 때 역시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하는가에 대한 실험도 있었다. 심지어 후자의 실험에서는 상금이 실험자의 자의로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보다 많은 상금을 받은 피실험자에 대해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더 똑똑하고 재능있고 퍼즐도 잘 풀었다. 전자의 실험에서는 전기충격을 받는 피실험자에게 그만한 이유가 있어 그러는 것이라 이유를 찾으려 하고 있었다. 아마 실험의 시작은 우연히 복권에 당첨된 한 학생에 대한 주위의 평가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소 성실했고 공부도 열심히 했을 것이다.

어차피 세상이란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 불공정하고 불합리해도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이기에 그 자체로써 이미 공정이고 합리가 된다. 그를 거스르는 것이 오히려 일탈이고 배덕이다. 가장 우월한 덕목은 따라서 세상의 원리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아무리 그것이 부당하고 부조리하다 여기더라도 그것을 당연하게 옳다 여기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련을 가한다. 이를테면 통과의례다. 왕따 역시 그러한 하나다. 고통과 응징을 통해 정상으로 돌아오도록 유도하고, 만일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철저히 배제하여 문제가 없도록 한다. 시험에 목을 매는 학생들처럼.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이 사회로부터 도태될 것이다.

하지만 말한 것처럼 문명화된 사회는 열려 있다.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고 따라서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다양한 개인들도 긍정한다. 굳이 바위를 들지 못하더라도. 골짜기를 넘지 못하더라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혹은 사자를 잡지 못하더라도. 그러지 못해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문명화된 사회는 역동적이다. 수백년전의 삶을 수백년 후에도 이어가는 원시의 삶과는 달리 하루가 다르고 또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간다. 굳이 완고한 현실에 적응하며 억지로 버틸 필요 없이 자기가 원하는 세상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문명은 진보하고 인간과 인간의 사회 역시 진보한다.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해병대캠프에 강제로 참가했다 불행한 일을 당해야 했던 고등학생들이 있었다. 나라를 위해 군대에 끌려가 군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해야 했던 병사가 있었다. 왕따를 한 병사들도 결국은 군대라는 조직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어쩌면 소중한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던 무수한 개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출구를 찾지 못한 현실의 억압과 좌절이 또다른 희생자를 낳고 말았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리고 말한다. 참고 견디라. 자기만 잘하면. 자기가 문제없으면. 다들 그러고 산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정도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이 모든 것들의 시작이었다.

역사상 다수가 문제가 되었던 시대는 없었다. 노예제사회에서도 노예들 역시 어떻게든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노예의 삶에 익숙해지면 노예가 아닌 삶이 더 어색하고 불편해진다. 해방된 노예가 자신을 쫓아내지 말라고 옛주인에게 간청하더라는 이야기는 너무 흔하기까지 하다. 일제강점기에도,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서울에서도, 혹은 나치독일이 지배하던 폴란드에서도, 어떻게든 사는 사람은 살아갔다. 문제는 그런 부당하고 불합리한 현실을 견뎌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역사가 발전해 온 과정이었다. 소수의 사람들이 당당히 자기의 주장을 밝히고 자기를 위해 노력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한다. 그 범위를 확대해 온 것이 인간의 역사이고 인류사회의 역사였다. 강하지 못한 사람도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는 그래서 군대가 좋아진다. 세상 역시 좋아진다. 10년 전과 지금도 많은 부분에서 달라졌다. 누군가는 불편해졌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더 편해졌다. 그래서 정치도 한다. 너도나도 정치에 관심을 가지가 자기를 위한 정책을 펴 줄 누군가를 찾아 투표를 한다. 시위도 하고 다양한 경로로 여론도 만든다. 사회운동에 직접 몸담거나 기부 등의 간접적인 수단을 선택하기도 한다. 군대에서도 군대가 더 좋아져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과거와 같은 야만적인 관행들이 다수 사라졌다. 왕따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왕따당할만한 사람이라도 왕따같은 것 없이 어떻게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그런 구조가 된다면.

개인의 강인함을 요구하는 사회는 당연하지만 개인의 나약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약함으로 인한 어떤 요구와 욕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인내하고 견뎌냄으로서만 자기를 증명할 수 있다. 그것만이 자기를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현실의 부당함이나 고통조차 그를 위한 시련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잘 참고 견디며 잘 살고 있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자신의 탓이 된다. 강해야 하는 이유다. 강해야만 살 수 있다. 강하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

어쩌면 한국사회가 추구하는 무한경쟁의 실체일 것이다. 한국사회가 바라는 통과의례인 셈이다. 승자만이 인정받는다. 승자만이 모든 권리를 인정받는다. 패자에게는 철저히 잔인하고 가혹하다. 필요한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모든 것은 개인의 탓으로 귀결된다. 개인이 강하지 못한 탓이다. 강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개인이 강해진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경쟁만이 모두를 강하게 만들 것이기에 경쟁만이 그 유일한 답이다. 모두는 강해져야 한다.

세상이 이미 완전함을 전제한다. 설사 잘못된 것이 있어도 굳이 바꾸어야 할 필요가 없음을 당연히 여긴다. 그래서 군대 가면 사람이 되어 나온다. 어른들이 보기에 불편함이나 불쾌함이 없는 '사람'이다. 이 사회가 바라는 '사람'의 기준이기도 하다. 왕따당할 만했으니 당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기에 왕따도 하게 되었다. 스스로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문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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