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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칼럼
  • 입력 2014.06.28 09:50

무장탈영과 왕따, 군대와 근대사회의 구조와 모순을 살피다

왕따가 존재하는 이유, 인간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는 사회를 위해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근대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 아마 '동원'일 것이다. 더 많은 병력과 노동력과 생산과 자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사회와 인간을 구조화시킨다. 개인이란 단지 전체를 위한 효율과 가치로써만 이해된다. 파시즘을 근대의 끝이라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혀 가치없고 도움이 되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을 철저히 배제하고 말살한다.

그렇다면 '동원'은 무엇으로 단순화시킬 수 있을까? 80년대 유력한 정치인이 유세를 하거나 하면 수만의 군중이 모여 세를 과시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지금도 어디서 시위가 있거나 하면 경찰추산과 주최측추산이 서로 엇갈리며 논쟁의 대상이 되고는 한다. 과연 몇 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동원되었는가? 히틀러와 나치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휘장 혹은 깃발일 것이다. 시위현장에서도 과거의 유세장에서도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 깃발이었다.

깃발이란 정체성이다. 명분이고 정의다. 가치다. 대중은 바로 이 깃발 아래 모인다. 깃발 아래 모여 대오를 이룬다. 많이 들어본 단어다. 깃발 아래 모여 깃발이 이끄는대로 일사불란하게 쫓아서 움직인다. 깃발은 때로 국가이고, 민족이며, 이념이기도 하다. 특정한 가치이거나 정체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 깃발을 든 기수가 곧 리더다. 카리스마라는 것이다. 대중은 깃발과 기수에 자신의 정체성을 맡기고 그로부터 자존과 자아를 찾으려 한다. 자발적이고 열정적인 동원 아닌 참여가 가능한 것은 그래서다. 진정으로 그것은 자신의 존엄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깃발이란 배타적이다. 두 개의 깃발을 동시에 따를 수는 없다. 가는 길이 다르고 목적한 곳도 다르다. 하나의 깃발만을 보고 그 뒤를 따라가야 한다. 더구나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이며 존엄이고 보편의 정의이기도 하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믿음은 당위가 된다. 폐쇄적인 환경에서는 그같은 배타성이 더욱 심해지고 강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심지어 인류전체를 위해서라도, 열등하고 부정한 민족이나 개인은 철저히 말살되어야 한다. 나치가 유대인만 학살한 것이 아니었다. 슬라브인과 집시는 물론 같은 독일인 가운데서도 정상에서 벗어났다 여겨지는 장애인과 동성애자를 마찬가지로 효과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차라리 악의조차 없이 신념에 의해 저질러진 행위들이 끔찍하기까지 하다.

군대란 바로 그같은 근대적 '동원'의 시작이며 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글의 첫머리에서 언급했듯 동원의 목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전쟁을 위해 필요한 인력과 물자의 확보였다.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을 확보하기 위해 굳이 복잡한 과정을 거쳐 사회와 인간을 재구성하려 한 것이었다. 하기는 군대만큼 깃발과 잘 어울리는 조직이 어디 있을까. 각각의 부대기를 든 기수의 뒤로 수많은 장병들이 오와 열을 맞춰 질서정연하게 행진한다. 이탈자는 물론 조금이라도 틀리거나 어긋나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모두가 키도 다르고 보폭도 다르고 걷는 모습도 다른데, 예외없이 똑같은 걸음으로 모두에게 맞춰 걸어간다. 한 사람이라도 튀는 병사가 나오지 않도록 엄격히 '교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하기는 그것은 우리사회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무한경쟁의 논리 뒤에 숨은 야만의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사회에서 무한경쟁이란 곧 시험을 뜻한다. 시험은 시련이다. 시련은 조건이다. 이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을 갖추었는가. 승자란 곧 이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을 갖춘 '정상'을 뜻할 것이다. 국가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이 사회와 사회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다면 패자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도태되어야 할 '비정상'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가 유독 패자에게 가혹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정상은 단지 교정과 배제의 대상일 뿐 대등한 구성원일 수 없다. 모두에게 맞출 수 없다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철저히 배제하여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왕따문제에 있어 오히려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시도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비정상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한다. 교정은 응징의 다른 표현이다.

근대가 추구한 '동원'의 의도가 가장 잘 구현된, 아니 그 이유이며 동기이고 목적인 것이 바로 군대라는 조직인 것이다. 가장 민주화된 국가에서도 가장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집단이 그래서 군대다. 그나마 모병제의 경우 자원자 가운데서 적합한 자원만을 선별하여 받아들이면 될 테니 조금은 문제가 덜하기는 할 것이다. 그래도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더구나 선별되지 않은 불특정한 다수를 대상으로 일방적으로 인신을 징발해야 하는 징병제의 경우 사전에 걸러내거나 예방할 수 있는 장치가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다. 굳이 군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자원인데 병사가 되어 억지로 군복무를 해야만 한다. 전쟁수행을 위한 효율성을 강조해야 하는 군대에 있어 그것은 반드시 문제가 된다. 세상과 격리되어 가혹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해야 하는 경우는 그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얼마전 전방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도중 부대원을 사살하고 총기를 소지한 채 탈영해서 온사회를 긴장케 만들었던 당사자인 임병장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아니 설사 사실이 아닐지라도 그 내용에 공감하는 현역이나 예비역들이 이미 적지 않을 것이다. GOP라는데서 고개를 끄덕이고, 관심병사라는 것에서 대충의 상황을 이해하고 만다. 어째서 관심병사에게 총기와 실탄을 쥐어주고 근무를 세웠는가. 더구나 관심병사가 그토록 같이 근무서기를 꺼려하던 대상과 함께 근무를 세우고 있었다.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도대체 무엇이 전역을 3개월 남겨둔, 더구나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다던 한 병장으로 하여금 그같은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범죄를 결심하도록 만든 것인가.

누구의 잘못이라 말하기에는 그 자체가 바로 군대라고 하는 조직이 가지는 자체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과 다른 병사 하나를 집단으로 따돌린 것도, 그 따돌림으로부터 도망칠 탈출구가 없어 끝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 역시. 그렇게 배워왔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경험했을 것이다. 단절된 환경과 열악한 상황이 그로 인한 약간의 불편함조차 민감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불만은 분노가 되고 짜증은 원망을 불러온다. 갈 곳 없는 증오는 대상을 찾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한 GOP생활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로 인해 희생된 당사자더러 참고 있으라 할 수도 없다.

결국 군대다. 멀쩡한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고갔으면 아무일없이 전역할 수 있도록 끝까지 책임져야 할 것 아닌가. 임병장 개인의 인성에 책임을 돌리고, 게임이나 장르소설 등에서 엉뚱하게 원인을 찾으려 하고, 혹은 그저 임병장 자신이 부대원을 살해하고 무장탈영까지 했던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자라는 사실만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은 군생활을 경험한 이들이 이미 미루어 짐작하고 있는 군대와 징병제가 가지는 모순을 외면하려 해서는 안된다. 군대만 아니었으면 어쩌면 멀쩡하게 아무일없이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을 젊은이들이 어째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어 핏속에 뒹굴게 되었는가.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누구의 책임인가.

군대는 그럴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렇게 읽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9세기의 군대는 지금보다 더 끔찍했다. 20세기의 군대도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 역시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노력해 온 결과였다. 군대라고 하는 모순과 민주주의라고 하는 가치와의 괴리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겪어왔고 그때마다 극복하려 다양한 시도들을 해왔다. 더 많은 비용과 시간과 수고를 할애한다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으로 문제들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했듯 효율의 문제다. 효율을 이유로 최저임금에는 턱도 없는 용돈 수준의 급여만으로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기회와 가능성을 억류하고 있다. 개인이 집단에 맞춰야 한다. 관심병사라는 손쉬운 수단으로 단지 눈앞의 문제만을 회피하려 하고 만다.

당사자들에게는 불행일 테지만 사회 전체로서는 기회일 것이다. 앞으로도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게 될 것이다. 자신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자식이거나, 그 자식의 자식이. 그들에게도 지금의 군대를 물려주고 싶은가. 솔직해져야 한다. 다시 가라고 하면 기꺼이 군대에 가겠는가. 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있는데도 단지 애국심만으로 자원해서 군대에 가려 하겠는가. 어떻게 하면 마음놓고 보낼 수 있는 군대가 될 것인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희생 아닌 의무가 될 것인가. 군복무를 기피한다고 비난하기 전에 스스로 고민하고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희생자가 생기지 않도록. 반성으로부터 한발짝 내딛을 용기가 생겨난다.

대한민국 사회 전체에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왕따에도 이유가 있다. 따돌림을 당했다면 그많나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한다. 그 이유란 대개 다른 것이 아니다. 비효율이다. 불편이다. 번거로움이다. 사회는 군대가 아니다. 개인은 군인이 아니다. 하물며 군대에서도 군인 개개인에 대해 단지 전쟁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로써 대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당당한 구성원이다. 나와 동등한 인격이다. 사소한 문제가 있어도, 그로 인해 적잖은 불편과 성가심을 감수하더라도, 그러나 그는 존중되어야 하는 존엄이며 존재다. 승자와 패자를 나누고,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하고, 우등생과 열등생을 차별한다. 사회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선진국과 부국강병을 위해서. 어느새 자신마저 그를 위한 도구로서 희생된다. 개인의 희생이 너무나 아무렇지 않다.

효율만을 생각할 것이면 비효율의 원인이 되는 부적합 대상자는 처음부터 군에 입대시켜서는 안된다. 일단 입대한 뒤라면 군에 모든 책임이 지워진다. 원해서 간 군대도 아니고 국가의 강제에 의해 가게 된 군대다. 군을 나서면 대한민국의 국민이며 이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다. 잊어서는 안된다. 인간은 수단이 아닌 목적임을.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너무 당연하기에 너무 쉽게 잊는다. 단순한 사건사고로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하고 희생시켜가며 여기까지 와 있다. 그런데도 너무 쉽게 잊으려 하고 있다. 편리함에 길들여진 탓이다.

물론 그럼에도 총으로 사람을 쏘고 탈영하여 민간인과 다른 군인들마저 위협한 행위는 용서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정상을 참작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다만 비극은 한 번으로 족한 것이다. 처벌 역시 한 번으로 족하다. 희생자는 더이상 없어야 한다. 원인을 안다면 비로소 시작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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