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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사회
  • 입력 2014.05.03 09:59

[기자수첩] 세월호 침몰과 천민자본주의 사회의 비루한 몰락

잃어버린 미래들에 미안해지지 않기 위해서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아주 어렸을 적 기억이다. 동네 골목에서 아주머니 두 분이 싸우고 있었다. 웃옷도 모두 벗어던진 채 머리채를 휘어잡고 그야말로 동네가 떠나가라 온갖 욕설을 서로에게 퍼부어대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다. 형님동생하며 사이좋던 두 분이 그리 험하게 싸우게 된 이유가 단돈 5만원 때문이었다는 것을. 물론 그 무렵 5만원이면 꽤 큰 돈이다.

가난이란 비루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5만원이란 한 끼 밥값도 안되는 푼돈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5만원이란 한 달을 살아갈 수 있는 적지 않은 생활비일 것이다. 며칠을 공치다가 겨우 일이 생겨 어렵게 손에 쥐게 된 유일한 수입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그깟 돈에 불과할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존 그 자체였다. 쌀을 사고, 연탄을 사고, 집세도 내고, 내 새끼 내 식구 굶지 않고 따뜻한 방에서 떨지 않고 잠들 수 있다. 벌거벗은 알몸을 드러낸다는 수치심은 이미 안중에 없다. 그것이 바로 절박함이라는 것이다.

며칠을 굶고 나면 찬밥 한 덩이에도 감사하게 된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당연해진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않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자식마저 내다판다. 스스로 자신을 내다팔기도 한다. 스스로 다른 사람의 노비가 되어 자신을 예속시킨다. 그렇게라도 살아야 한다. 한 입이라도 줄이기 위해. 남은 가족이라도 살기 위해. 그래도 남의 집에 가면 밥은 굶지 않겠거니. 그렇게 위로하며 제 배로 낳은 자식을 다른 사람에게 몇 푼 돈에 팔아넘기기도 했었다. 양심이든, 존엄이든, 심지어 본능이 시키는 모성마저 생존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여러 해 되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연설을 통해 우리도 이제 어느 정도 살만해졌으니 어려운 처지의 다른 나라들을 도와야겠다 말한 적이 있었다. 난리가 났었다. 우리도 어려운데 누구를 돕는가. 우리 자신도 부족하다. 국민소득 1만달러. 2만달러. 3만달러. 경제규모 세계 몇 위. 수출 얼마. 무역수지 얼마. 사실 얼마가 되어야 충분할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언제나 되어야 만족할 수 있을 것인지 역시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더 잘살아야 한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아직 모든 것이 부족하고 아쉽기만 할 뿐이다. 가난할 뿐이다.

한국식 자본주의의 현주소다. 물론 출발이 그러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폐허 뿐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수탈에, 한국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죽음들이, 고향을 잃고 삶의 터전마저 빼앗겼다. 오로지 알몸에 맨발로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남기 위해 견뎌야만 했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했었다.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었다. 그 앞에 어떤 정의도 가치도 의미가 없었다. 법을 어기고, 양심을 속이고, 도덕을 비웃는다. 그렇게라도 돈을 벌고 지금의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면 그것은 옳았다.

"너만 잘되면 돼!"

그 시절을 경험한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들려주던 주문이었다. 나누어 먹기에도 너무 적었다. 서로를 배려하기에는 내 것도 너무 부족했다. 할 수 있으면 알몸이 되어 머리채를 부여잡고 흙바닥을 뒹군다. 망신을 당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들어도 결국 내 손에 쥐어지는 돈이 그 가치를 증명할 것이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더 부유해져야 한다. 하필 1997년 대한민국을 절망으로 몰아넣은 IMF는 그것을 한국인의 유전자에 새기게 만들었다. 당장 돈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 그런 처지가 되어 보며 돈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겼다. 돈이 곧 정의다. 돈이야 말로 옳다.

전문성이 요구되는 배의 선원들을 비정규직으로 채워넣는다. 이직률도 높다. 굳이 오래도록 책임감을 가지고 근무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돈이 너무 든다. 무엇보다 말이 너무 많다. 군소리 말고 시키는대로 주는 돈이나 받고 묵묵히 일만 해줄 사람들을 바란다. 배의 안전에 문제가 있어도 침묵하며, 배가 당장 위험해져도 아무일 없이 시키는 일만을 해줄 사람들이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낡은 배를 사들여 불법으로 개조하고, 시간과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는 안전에 대해서도 그만큼 소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신 돈이 남는다. 굳이 세월호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아니 세월호가 침몰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이미 이 사회의 보편적 관행 가운데 하나였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법이니 규정이니 일일이 지켜가며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에도 말했듯 그것은 '안전불감증'이라고 특정지어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안전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어야 더 잘살 수 있다. 그를 위해서는 안전은 다소간 희생할 수 있다. 위험도 조금은 더 감수할 수 있다. 돈과 안전을 바꾼다. 그 끔찍한 비극을 겪고도 기업들이 더 돈을 잘 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선박의 안전에 대한 규제들을 대거 풀려 하고 있다. 이미 전에도 그같은 시도들은 국민적 동의와 지지 속에 시행되고 있기도 했었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있는 것이다. 돈으로 바꿀 수 있으면 그것으로 가치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결국 돈 이외의 어떤 가치도 찾아내지 못한 우리들 자신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아직까지 돈이다. 아직까지 더 많은 돈을 버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돈도 되지 않는 정의니 양심이니 하는 것들 따위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한다. 어째서 법을 지켜야 하고, 도덕과 윤리는 무엇때문에 중요한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존엄에 대해서도. 무엇이 존엄인가에 대해서 조차 진정으로 우리들 자신들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오로지 좋은 대학에 가는 것.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이 그런 것밖에 없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어른들이 만들어낸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이들은 그렇게 배워야만 한다.

단지 재수없어 사고가 났을 뿐이다. 사고만 없었으면 아무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해오던대로 적당히 최대한 비용을 줄이고 더 많은 이익을 거둬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래서 사고는 단지 선장의 책임이다. 선원의 문제다. 해경이나 해운사의 잘못이다. 그보다 근본의 원인을 찾으려 한다. 그래서 단지 잘못한 사람들만 찾아 벌을 준다면 다시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까. 단지 그것만이 문제였을까? 이번만이 아님을 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이런 일들이 벌어질 것도 반성이 없이는 미래도 없다.

딱 어울리는 말이다. 천민자본주의. 천민이 비천한 것은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가난해야 하기 때문이다. 천민들은 부를 소유할 수 없다. 부를 누릴 수도 없다. 비천한 자신에 만족하며 안주하고 살아간다. 그들은 여전히 천민일 수밖에 없다. 여전히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 사회를 위한 초상이다. 가난하고 가난하고 또 가난하다. 그래서 부자가 되고자 한다. 부자란 생존이다. 절박함이 그 과정에서의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예의도 품위도 존엄도 없다. 자존심도 양심도 없다. 신앙이라기보다는 가난한 자의 절박함이다. 아직도 한국인은 절박하다.

대한민국이 폐허를 딛고 지금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 그같은 절박함이 크게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 반드시 부자가 되고야 말겠다. 그러나 여전히 대한민국은 가난한 채다. 주위도 돌아보지 못하고 그저 앞만보고 달려가는 중이다.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지.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빌딩도 여러 채 가지고 있으면서 폐지를 가지고 허름한 노인들과 실랑이하며 다툰다. 고작 돈 몇 만원에 얼굴을 붉히며 인심을 잃는다. 지금의 자신에 어울리는 모습을 갖출 필요가 있다. 벌써 21세기이고, 대한민국은 세계속 경제강국 가운데 하나다. 우리들 자신에게 어울리는 모습이란 과연 무엇인가.

정치인의 책임이 크다. 정확히는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이다. 그 첨단에 정치가 있다. 과연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디까지 와 있는지. 어디까지 갈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일반의 국민보다 한 걸음 앞서 그 답을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리더인 것이다. 앞서가는 자들이다. 과거의 가난에 사로잡혀 현재를 보지 못한다. 현재를 바로 보지 못하면 미래로 나가지 못한다.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그저 쉽게 가난에 편승하려는 것은 아닌지. 정부의 역할을 묻게 된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가.

미래를 잃었다. 그래서 더욱 미래를 고민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들려줄 것인가. 무엇을 가르쳐 줄 것인가.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 돈 많이 벌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라. 그것으로 좋은가. 어른들의 가르침이 결국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우리들 자신들의 모습을 본다.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린 자신들의 초상이다. 수백의 영혼을 제물로 이제서야 비로소 자신들을 돌아본다. 아니 돌아봐야 한다. 그들에게 미안해지지 않기 위해서.

안타까운 비극이다. 그러나 이미 예정된,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경고해왔던 비극이기도 하다. 어느새 납득하고 말았다. 밝혀지는 사실들이 너무나 익숙한 자신들의 모습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들을 억울한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위해. 침몰하는 배에서 기회조차 없이 질식해가지 않기 위해서. 죄를 빈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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