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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박수빈 기자
  • 문화
  • 입력 2022.05.17 22:58

[박수빈의 into The book] #.1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숨겨진 리더, 남자현

도서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강부원 저자, “역사에 감춰진 여성 독립투사 남자현, 독립군의 어머니이자 큰누나”

[스타데일리뉴스=박수빈 기자]

▲ 도서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일제강점기 조선 독립운동 조직에는 ‘리더’와 ‘주인공’은 나뉘어 있었다. 독립운동의 결사 ‘윤봉길’, ‘안중근’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이들이 거사를 행할 수 있도록 조력하고 헌신적으로 뒷받침했던 사람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힘을 보탰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그 이름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임시정부의 부엌살림을 맡고, 독립군의 의복을 제작하고, 전장에서 아이들을 낳고 길러내는 역할을 맡았던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희생과 헌신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서 발표한 ‘독립유공자 포상현황’(2022년 3월 1일 기준)에 따르면 훈장과 포장을 받은 독립유공자 17,285명 중에 여성은 567명(3.28%)밖에 되지 않는다. 

이번에 출간된 도서 도서 ‘역사에 불꽃러첨 맞선 자들’은 이처럼 역사 속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산 인물들을 소개한다. 금번 시리즈에선 여성 독립투사 ‘남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도서 ‘역사에 불꽃러첨 맞선 자들’의 강부원 저자는 남자연을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숨겨진 리더”이자 “세 손가락의 여장군”이라 소개한다.

#. “나는 조선의 총구다” 

▲ 남자현 초상화, 사진= 도서'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일제의 심장을 겨눈 여성 독립투사, 남자현(南慈賢, 1872~1933)을 소개하는 평전(이상국, 『나는 조선의 총구다』, 세창미디어, 2012)의 제목이다. 남자현은 현재 우리나라 여성 중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독립유공자 훈장(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2등급 공적)을 추서받은 인물이다.

남자현과 같은 등급의 훈장을 받은 이로는 ‘신채호’, ‘김좌진’, ‘이봉창’,‘김상옥’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역시 독립운동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인물들이다.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남자현이 여기에 속해 있다. 심지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대명사 ‘유관순’조차 남자현보다 한 등급 아래의 훈장을 받았을 정도다. 독립운동가로서 그녀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 독립운동 조직 통합 위해 ‘단지’도 마다하지 않다

경북 안동(혹은 영양)에서 태어난 남자현은 어린 시절 학자 아버지 남정한(南珽漢)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열아홉 되던 해에 아버지가 아끼던 제자 ‘김영주(金永周, 1862~1896)’와 혼인했다. 김영주는 대한제국 시기 ‘을미사변’을 겪고,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1896년 전사했다. 남자현은 스물네 살에 과부가 된 셈이다.

이후 그녀는 유복자를 홀로 키우며 시부모도 극진히 모셨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20년이 넘도록 영남 양반가의 며느리와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전통적인 여성의 직분에 어긋남 없이 살았다.

남자현이 양반집 ‘규수’에서 독립운동 ‘투사’로 극적 변화한 계기는 ‘3.1 운동’ 경험이었다. 성인이 된 아들과 함께 경성으로 거처를 옮긴 직후 참여한 ‘만세 운동’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이미 중년의 나이를 넘어선 그녀였지만 만세 운동 이후 조국의독립을 향한 열정이 가슴속에 불타올랐다. 3.1 운동은 한 가문의 어머니이자 며느리로만 살아왔던 그녀의 삶 자체를 새롭게 일구고 변혁시킬 정도로 강렬한 동기를 제공한 전환점이었다.

이후 남자현은 47세 나이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의 길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중년 여성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킨 만세 운동의 불씨를 품고 결행한 이주였건만, 만주의 독립운동 상황은 처참했다.

만주 독립운동 조직은 항상 인력난과 물자난에 시달렸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제국 일본인들에게는 피식민자로 차별받고만주 원주민들에게는 이주민으로 핍박받는 ‘이중 억압’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최악은 조선 독립운동 단체가 난립해 서로 간의 반목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일도 제대로 될 리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마침내 손가락을 잘라 조선인 각 단체의 단합과 협력을 요청하는 혈서를 쓰기에 이른다. 1920년과 1922년 두 번의 단지(斷指)를 통해 그녀에게는 ‘세 손가락의 여장군’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 남자현과 시댁 가족사진, 사진=도서'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 여성들이 독립운동 전면에 나설 것을 촉구하다

남자현은 1926년부터 “여성이 독립투쟁 활동을 해야 한다”며 ‘여의군(女義軍)’을 창설하기도 한다. 당시 여성 독립군들은 후방 지원이나 남성 독립군들의 뒤치다꺼리만 떠맡았는데, 남자현은 여성들이 그렇게만 쓰이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녀는 먼저 모범을 보이고자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직접 처단할 계획을 세우고 경성으로 잠입한다. 영화 <암살>에서 ‘안옥윤’이 조선주둔군 사령관 ‘카와구치 마모루’와 친일파 ‘강인국’을 암살하고자 동지들과 만주에서 경성으로 넘어가는 설정이 바로 이 내용이다.

하지만 그녀의 암살 계획은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만난다. 일본군부와 경찰의 경비와 검속이 유례없이 강화된 것이다. ‘송학선’이라는 독립운동가가 엉뚱한 사람을 총독으로 착각해 함부로 칼을 휘둘러 죽이려다 발각됐기 때문이다. 

순종 인산에 맞춰 조문을온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려던 계획은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하고 만다. 조소앙(趙素昻, 1887~1958)이 쓴 『여협(女俠) 남자현 전(傳)』(1934)을 보면 ‘1925년 남자현 선생이 단원 4명을 이끌고 사이토마코토 총독의 암살 사건을 주도했다가 실패한 뒤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적혀 있다.

다시 만주로 돌아온 남자현은 독립운동계의 좌우합작을 위한 노력을 지속한다. 당시 일제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최대 통합 조직이라 할 수 있는 ‘대한독립단’을 와해시키려고 눈에 불을 켠 상태였다. 큰 조직을 흩트리고 조선인을 분열시켜야만 독립운동이 약화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대한독립단 소속 ‘안창호’를 비롯해 47명의 조선인 인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전원 검거하기에 이른다. 이를 독립운동사에서는 ‘길림 사건’이라 부른다. 이때 투옥된 이들을 옥바라지하며 석방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이가 바로 남자현이다. 

그녀는 ‘상해 임시정부’와 소통하며 ‘중국 북경정부’, ‘길림성 당국’과 교섭해, 투옥된 이들을 풀어주기 위해 애썼다. 그녀의 노력에 힘입어 이들은 3주 만에 무사히 석방될 수 있었다.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그녀를 ‘독립군의 어머니’이자 ‘큰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남자현은 그렇게 조선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존경받는 ‘리더’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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