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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칼럼
  • 입력 2014.02.12 11:19

故 손형주 이병의 죽음과 군이라는 모순의 그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병영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고대 그리스의 영웅 테세투스가 물리친 악인 가운데 프로크루스테스가 있었다. 지나가는 여행자를 초대해 침대에 뉘여 침대보다 크면 나머지를 자르고, 침대보다 작으면 침대만큼 늘려서 죽였다. 자기만의 기준을 내세워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것을 두고 흔히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 일컫는 유래일 것이다. 하나의 기준을 두고 나머지를 모두 그에 일방적으로 맞추려 한다.

상식이란 자체가 원래 근대의 발명품이었다. 세계가 보편화되고 표준화되는 가운데 일반화할 수 있는 어떠한 기준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세계는 결정되어 있었고 인간 역시 얼마든지 정의할 수 있었다. 특히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끊임없이 경쟁하고 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보다 효율적으로 군대를 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군대가 요구하는 인간이란 독립적인 인격을 가진 개인이 아닌 보다 효과적으로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부속품이었다. 명령은 개인이 아닌 군이라는 집단에 내려지는 것이다.

키가 너무 커서도 안되고 너무 작아서도 안된다. 몸무게가 너무 많이 나가서도 안되고 너무 적게 나가서도 안된다. 지능이 너무 낮아서도 곤란하지만 너무 똑똑해서 말이 많아지는 것도 군대 입장에서는 곤란하다. 겁이 많은 것은 당연히 문제가 된다. 호기심이 많은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잠이 많아서도, 행동이 굼떠서도, 성격이 너무 느긋해서도 문제가 된다. 아예 처음부터 배제하거나 아니면 군대에 맞게 개조해야 한다. 흔히 군대가면 사람이 된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남들 보기에 이상하고 불편한 모든 것이 철저히 배제되고 교정된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으면 너도 할 수 있어야 한다.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열등한 것이다. 바로잡아야 한다.

눈이 안좋아 사격시 표적지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수전증이 있어 총을 쏠 때마다 자꾸 총구가 흔들린다. 사격을 잘할 수 없는 조건이다. 그러나 군대라는 조직은 그럼에도 사격을 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전쟁을 수행하는 도구로써 가장 기본적인 사격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당사자가 어떤 조건을 가지고 어떤 처지에 있는가는 처음부터 고려대상에서 배제된다.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선의이기조차 하다. 인간으로서 열등한 대상을 남들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준다. 안되면 팔다리를 자르고 몸을 잡아늘려서라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해준다.

사실 군대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억이기도 하다. 아니 현실에서도 그것은 고스란히 이어진다. 남들과 다르고, 남들만 못하고, 그래서 선의를 가지고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물리적인 폭력이 법에 의해 제제당한다면 말을 통한 폭력이나 집단을 동원한 폭력으로 그것을 교정하려 한다. 교정이 안된다면 배제한다. 이른바 인터넷에 만연한 '까기'문화 또한 그러한 한 유형일 것이다. 대상이 정상에서 벗어났으니 폭력을 통해서라도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 비판은 행위가 아닌 대상 자신에게 집중적으로 가해진다. 모멸감과 굴욕감, 그리고 소외와 절망. 그것이 결국 그를 바르게 이끌 것이라 믿는다. 인간은 고통을 피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면 오히려 그를 게을러지게 할 뿐이다. 고통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더 힘들어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더 잘 살려는 욕구가 생겨나게 된다. 더 잘살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정상을 찾는 방법이다. 오로지 고통만이 사람을 정상적이게 할 수 있다. 비정상은 악이며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방법은 응징밖에 없다. 모두가 잘살아야 한다는 당위는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경멸과 혐오로 이어진다. 표준과 평균이 만들어난 한국사회의 자화상이다. 이미 19세기 여러 선진국들이 거쳐온 과정이기도 하다.

안타까운 뉴스를 들었다. 신체적으로 다른 사람과 같지 못했던 한 병사가 부대에서 끝내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런 때 군대에서 그 병사에 대해 하는 이야기에 대해 기자 역시 만기전역자이기에 알고 있다. 군대만이 아닌 사회에서도 그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지나치게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무능을 말한다. 의지의 부족을 말한다. 노력하지 않았다. 그것도 견디지 못했다. 남들 다 하는 군생활이다. 자신이 열등한 것이다. 경멸과 비웃음을 던진다. 죽을 만해서 죽었다. 그보다 더 심한 표현은 차마 글로 쓰기 민망하다.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기자가 군생활 할 때도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다른 희생자를 만들고 마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그때마다 당사자의 인성을 문제 삼았었다. 역시 자주 듣는 말일 것이다. '인성'. 개인의 문제였다. 개인의 열등함이었다. 다른 사람은 문제없다. 다른 사람들은 문제없이 군생활을 잘하고 있다. 모병제였다면 그같은 부적격 병사들을 받아들인 모병관의 잘못일 것이다. 불특정다수의 국민 가운데 징집을 한다면 누구의 잘못일까? 대상을 특정할 수 없다면 그에 맞춰 다양성을 인정하던가, 그럴 수 없다면 부적격 대상자를 철저하게 가려냈어야 했다. 그런데도 일단 징집하고 군에 개인을 맞추려 한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인격이 아니다.

어째서 많은 국민들이 법이 정한 의무인 것을 알면서도 병역을 회피하려 수고를 아끼지 않는가. 심지어 생이빨을 뽑고,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기도 한다. 불법적인 수단에 의지하는 경우마저 적지 않다. 나라를 지키고 자신을 지키는 병역이건만 차마 몸의 일부를 훼손해서라도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고 있다. 차라리 공포다. 훈련소에 입소하는 신병과 그 가족의 표정은 차라리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반성은 없다. 개인이 잘하면 된다. 개인이 맞추면 된다.

이미 죽은 다음인데 명예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죽은 이의 명예조차 소중한 것은 그것이 죽은 사람과의 약속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억울한 희생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그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 죽은 사람이 아닌 그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비정상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군대는 답이 없다. 진정으로 군이 지켜야 할 명예가 무엇인가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지금 군이 해야 할 최선이 과연 무엇인가 전혀 모르고 있다.

국가가 정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쉽지 않은 군생활이었지만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죽을만큼 힘들었음에도 그는 단지 자신을 해쳤을 뿐이었다. 군율을 위반한 적도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 적도 없었다. 의무를 다하려 한 국민을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3년이나 지나 손형주 이병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전하는 이유다. 국가의 자격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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