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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칼럼
  • 입력 2014.01.01 10:56

인터넷의 '까기'문화와 완장질에 대해

비루한 자아와 비굴한 자존의 인지부조화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루쉰의 소설 '아Q정전'에서 주인공 아Q가 혁명당의 일원이 된 것은 오로지 혁명당의 위세를 빌고자 함이었다. 마음에 안드는 놈들도 마음대로 죽일 수 있고, 재물과 여자도 원하는만큼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것도 달라진다. 정작 혁명당은 취급도 안해주고 있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혁명당스럽게 행동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결국 그로 인해 도둑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인지의 부조화라는 것이 있다. 믿고 싶은 사실과 실재하는 현실 사이에서 모순이 발생했을 때 그 부조화를 해소하고자 하는 심리적 기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기 싫은 자존심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현실 사이에서 차라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따돌리고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투사라는 것도 있다. 다른 대상에 자신을 이입함으로써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한 번 얼굴도 보지 못한 먼 조상의 이름이나, 혹은 성씨에 불과한 집안의 대단함이나, 그도 아니면 국가와 민족 같은 것들도 있다. 위대한 영웅이기도 하고, 모두가 아는 명사이기도 하며, 위세가 당당한 집단이기도 하다. 현실의 보잘 것 없는 자신을 대신해 그것들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준다. 자존감의 대상이 되어준다. 사람들이 완장을 차고 싶어하는 이유일 것이다.

자기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다. 별 볼 일 없고 보잘 것 없다. 한심하고 비루하다. 하지만 다른 대상의 위세를 빈다면 얼마든지 자기보다 잘나고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들마저 발아래로 굽어볼 수 있다. 집단의 힘을 빌어 모욕을 가하고 심지어는 굴복시킬 수도 있다. 얼마나 대단한가. 대단한 것은 자기가 빌게 될 이름일 테지만 어차피 그것이 그것이다.

더 집착하고 추앙하게 된다. 분노마저 느낀다. 어째서 몰라주는가. 어째서 그리 불경한가. 그런 자신에 다시 도취된다. 대상을 추종하는 자신이 그 자체로 훌륭하고 대단해 보인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완장을 만들어차고 반대자들과 불경한 무리들을 제거하고자 발벗고 나서게 된다. 사명감마저 느낀다. 이것이야 말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다. 맞다. 그것이야 말로 자신이 자존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일 것이다. 존엄하기까지 하다.

악의를 가지고 악플을 다는 경우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대부분의 악플들은 어떤 정의감에 의해 쓰여진다. 아주 근거가 없지도 않다. 터무니없는 오해이든, 제멋대로의 억측이든, 아니면 누군가의 조작이든, 최소한의 근거가 주어졌을 때 자신들이 행동에 나서는 당위가 보장된다. 상식과 정의의 이름을 빈다. 대중과 네티즌의 이름을 앞세운다. 그러고서는 말한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처음에는 사소하게 시작한다. 그러다가 경쟁이 붙는다. 서로 자신의 정의를 과시하려 한다. 자신의 옳음을, 현명함을 모두로부터 인정받으려 한다. 아니 뒤처지기 싫다. 다른 사람들에 뒤처져 묻히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한다. 하나라도 새로운 근거를 찾아낸다. 하나라도 새로운 논리를 찾아내려 한다. 과거의 이력을 뒤지고, 이제는 잊혀진 사실들까지 끄집어낸다. 어떻게 하면 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을까, 더 독하고 더 예리한 표현들이 만들어진다. 전장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우는 것은 적장의 머리를 베는 사람이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기를 바란다.

이른바 인터넷에 만연한 '까기'문화의 실체일 것이다. 누구도 스스로를 악플러라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정의를 실천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하는 행동이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믿는다. 더 가혹하고 더 잔인할수록 그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현미경을 들이대고, 관심법을 사용하며, 사회의 악을 찾아내어 척결하는데 비장한 책임감마저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이름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대중의 이름으로. 혹은 네티즌의 이름으로. 그것은 개인의 가치나 판단이 아닌 다수에 의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상식이고 정의일 것이다. 그것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여러해전 있었던 '타진요'사태일 것이다.

모두는 믿었다. 다수가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다수가 그렇게 여기고 있으니까. 다수가 근거를 대고, 다수가 논리를 만들었다. 그래서 거침이 없었다. 어떤 표현도 정당화되었다. 어떤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표현을 쓰더라도 그것은 대중, 혹은 네티즌이라는 이름 아래 당위성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정의였다. 상식이라는 이름의 정의였다. 타진요사태가 일단락되고도 정선희가 그 타겟이 되었고, '나는 가수다'와 관련해서 옥주현과 적우에 대한 집단의 정의가 행해졌다. 고작 예능프로그램에서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보였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러므로 자신은 정의롭고 정의를 실천하고 있다.

대개는 현실이 우울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열등감에 찌들어 살아간다. 더 높은 곳에 오르지 못했다. 모두가 말하는 행복에 이르지 못했다. 그같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인터넷에서 그들은 강자다. 네티즌이라 불릴 때, 혹은 대중이라는 이름이 대신할 때 그들은 승자가 된다. 더 대단한 인기스타나 유명인들도 자신들의 앞에서 난도질당할 뿐이다. 어떤 모욕을 당하고 어떤 지독한 행위들을 당해도 감히 반항조차 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저들은 약자다. 패자다. 아Q 역시 강자에게는 비굴했으며 약자에게는 누구보다 잔인했고 가혹했다.

사회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이룬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었고, 번듯한 직장도 가지고 있었다. 나이도 적지 않았다. 가정도 이루고 있었고 자식마저 있었다. 그런데도 인터넷에서 그들은 가면을 쓴다. 네티즌이라고 쓰여진 완장을 찬다. 대중이라고 쓰여진 완장을 차고 적을 찾아나선다. 오히려 그래서 더 현실이 불만스럽다. 그나마 스타연예인과 유명인들이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들을 끌어내려 발아래 두겠다. 그렇게라도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승자가 되도록 무언가 그들의 등을 떠민다. 패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폭력에 정의란 없다. 누구도 개인에게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를 권리따위 허락하지 않았다. 누구도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자의로 완장을 차고 폭력을 휘두른다. 완장이란 누가 허락해서 차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만들어 차고 단지 이름만 빌린다. 배설이다. 일그러진 자존과 자아를 그렇게 완장의 힘을 빌어 다른 대상에 떠민다. 그런 행위를 정의라 부른다. 비굴한 '대중'일 것이다. 비루한 '네티즌'인 것이다. 한심한 자신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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