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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칼럼
  • 입력 2014.01.01 10:52

불행에 쫓기는 사회, 질시와 증오의 이유

경쟁사회의 우울한 초상을 그리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어려서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너 공부 열심히 안하면 저렇게 된다."

한국인의 영혼에 새겨진 공포일 것이다. 저렇게는 되고 싶지 않다.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공부를 한다. 대학에 가지 않으면 안되니까 대학에 간다. 나머지는 그 다음에 생각한다. 아니 이제는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취업이 걸려 있다. 취업에 실패하면 낙오자다. 스펙에 목숨을 건다.

한국사람이 유독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경향을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보다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 산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무한경쟁의 실체이기도 하다. 승자가 되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한 경쟁이다. 정작 경쟁에서 승리해도 승자에 대한 존경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다.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다. 자신이 그 패자다.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승자도 패자여야 한다.

돈이 있으면 쓰는 것이다. 그만한 돈을 벌었다면 그만큼 쓰는 것이야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시비를 건다. 사치한다고. 호화스럽다고.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부정한 수단으로 돈을 번 것도 아니다. 더구나 자기가 노력해서 번 돈이다. 사회적으로 대단한 명성과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에 어울리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그에 걸맞는 일상의 수준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마저 자기에게 맞추라 말한다. 질투하는 것이다. 자기보다 나은 위치에 있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면서도 정면으로 마주보기를 꺼리는 것은 비루한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것일 터다. 자기가 상대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너무 어렵다.

그렇다면 자신보다 못하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확한 패자들에 대해서는 어떨까? 그들은 실패자다. 낙오자다. 그리고 자신이 패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증거들이기도 하다. 사냥감을 박제하듯 그것을 모두에게 확인시키려 한다. 패자를 짓밟고 모욕한다. 조롱하고 경멸한다. 그런데도 감히 반항조차 하지 못한다. 반항하더라도 그것을 얼마든지 가볍게 무시할 수 있다. 패자는 패자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 낙오자는 낙오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몰골로 있어야만 한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철저히 짓누른다. 한국사회가 패자에 대해 더욱 가혹한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을 달리 주제라 부르고 분수라 부른다. 허용해서는 안되는 선이다.

어째서 귀족노조라 부르는가. 한국사회에서 요구하는 승자의 자격이라는 것이 있다. 일단 명문대 출신이 아니다. 대단한 학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일도 힘들다. 일이 힘들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모두가 바라는 편안한 직장을 가지는 것에 실패했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모두가 동경하는 깔끔하고 세련된 전문직에 종사하는데 실패하여 몸이 고된 일로 떠밀려난 것이다. 일이 힘든 것이 오히려 더 높은 급여와 더 나은 대우를 바라서는 안되는 이유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그런데 고작 철도노동자 따위가 연수입 6,800만원이라니. 근속연수도 19년으로 상당히 긴 편이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낫다. 받아들이기 힘들다. 주제를 넘어섰으니 그들은 귀족이다.

사람에게는 위아래가 있다. 높낮이가 있다. 과거 그것은 혈통에 의해 결정되었다. 누구의 후손인가 하는 것이 그의 사회적 신분을 결정했다. 경쟁사회에서 그것은 다시 승자와 패자라는 이름으로 달리 불리게 된다. 오로지 승자만이 모든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누린다. 모두가 승자가 되려 하고 따라서 패자는 승자가 되지 못한 낙오자일 뿐이다. 오히려 신분보다 더 나쁘다. 낮은 신분으로 태어난 것은 단지 조상을 잘못 만난 탓이지만 패자가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가혹함은 정의가 된다. 승자가 되어야 하는 당위가 된다. 그것이 이 사회를 정의하는 질서다. 차별이라는 말조차 그래서 한국사회에서는 아직 낯설다. 사람이 모두 같지 않다. 모든 인간이 동등해질 수는 없다.

명문대 졸업과 고등학교 졸업이 같아서는 안된다. 육체노동자와 지식노동자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한다. 단순노동과 전문직 종사자 사이에도 확실한 구분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은 급여와 대우로부터 차이가 드러나야 한다. 사회적인 인식과 지위에 있어서도 차이는 더 명확해져야 한다. 대중이 연예인을 좋아하면서도 연예인에 대해 부정적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이 믿고 있는 승리의 공식에서 연예인은 한 발 비껴나 있는 경우가 많다. 자격이 없는 자들이 성공을 거머쥐었다. 질투는 정의라는 말로 정당화된다. 까임이란 그들이 내세우는 정의다. 그나마 연예인은 대중들에 인기라도 높다.

정규직이 파업하면 비정규직을 돌아보라 말한다. 비정규직이 파업하면 이번에는 실직자의 예를 든다. 자기가 정당하게 누려야 할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얼마나 누리고 있는가만을 말하려 할 뿐이다. 그 말은 곧 자기가 누려야 하는 것 이상을 지금 누리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겸허해질 것을 강요한다. 그들은 정당한 승자가 아니다. 내가 패자가 아니듯. 어떤 경우에도 자신은 패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강박이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누구도 정당하게 누려야 할 것이란 없다.

결과적으로 모든 노조가 귀족노조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가 하는 일보다 자신의 가치보다 더 높은 임금과 대우를 받는다. 자기가 불만스럽다. 사회가 불만스럽다. 그래서 더욱 엄격하게 사회의 질서를 지키려 한다. 감시하고 비판하고 견제한다. 부당하게 누리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 자격없는 승자를 철저히 배제하기 위해, 자신이 승자가 되기 위해, 최소한 자신이 패자로 전락하는 것은 막기 위해서.

만족을 모른다. 정확히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는가는 안다. 그러나 어디로 도착해야 하는가는 모른다. 그저 아직 잡히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얻을 뿐이다. 항상 쫓긴다. 항상 불안하다. 성급하고 난폭해진다. 강박적이 된다. 자신은 아직 패자가 아니다. 아직 실패하지도 낙오하지도 않았다. 확인하려 든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은 채. 관성이 되어간다. 무지이고 맹목이다.

지금도 누군가는 말한다.

"저가 노력을 않은 걸 누구에게 말하는데?"

승자가 되지 못했으니 패자가 된다. 자격을 갖추지 못했으니 패자가 되어야 한다. 본분을 지켜야 한다. 분수와 주제를 알아야 한다. 엄격해진다. 자신은 패자가 아니다. 패자가 아니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패자가 되어야 한다. 패자를 만든다. 경쟁의 실체다. 우울한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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