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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정수경 칼럼니스트
  • 칼럼
  • 입력 2013.12.09 08:22

[정수경 아트칼럼] 현대 스테인드글라스 이야기(9)

독일 현대 스테인드글라스의 살아있는 전설 요하네스 슈라이터(Johannes Schreiter, 1930~ )

▲ 요하네스 슈라이터, 독일 랑엔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1985년작 Ⓒ 정수경
[스타데일리뉴스=정수경 칼럼니스트]  티에리 부아셀과 마크 앵거스의 뒤를 이어 필자가 독일에서 세 번째로 만난 작가는 유럽 현대 스테인드글라스의 거장인 요하네스 슈라이터이다. 책에서만 접했던 슈라이터와 그의 작품을 직접 만나게 되는 것은 스테인드글라스 연구자로서 무척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그의 작업실을 방문해도 좋다는 편지를 받고 그동안 궁금한 점들을 질문으로 작성하며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드로잉, 콜라쥬, 스테인드글라스 등 방대한 그의 작업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에 표현된 자유분방한 선들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요하네스 슈라이터는 1930년 독일과 체코의 접경 지역인 에르츠비르게(Erzgebirge)의 부흐홀츠(Buchholz)에서 태어나 뮌스터, 마인츠, 베를린에서 수학했다. 그는 1960년 찰츠부르크 국제 비엔날레에서 금메달을 수상했고 1963년부터 1987년까지 프랑크푸르트와 스투트가르트 쿤스트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이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명예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 이후부터는 영국, 미국, 캐나다, 아프리카, 뉴질랜드, 호주, 일본, 브라질, 인도 등 세계 곳곳에 초청돼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현재 그는 독일 랑엔(Langen) 시에 거주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슈라이터를 만나기 위해 랑엔 시를 찾았을 때, 아내와 함께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온 슈라이터를 처음 마주하면서 책에서의 이미지와는 달리 마음 좋은 할아버지와 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긴장했던 마음을 조금은 편안히 할 수 있었다. 슈라이터 부부는 친절하게도 23일 랑엔 시에 머물며 그의 작업실과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 그리고 인근에 설치된 그의 작품들을 찬찬히 볼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그는 또 스테인드글라스를 연구하는 필자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며 그의 작품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을 손수 챙겨주는 자상함을 보이기도 했다.

▲ 작업실에서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을 보고 있는 슈라이터 부부(작가 제공)

유리 작업은 장인에게 모두 맡기고 작품 디자인만

슈라이터의 작업실은 그의 깔끔한 성격을 반영하듯 모든 것이 잘 정리정돈 돼있었다. 그리고 그의 작업실 어디에서도 색유리 조각이나 공구를 발견할 수 없었다. 오직 수없이 반복되는 그의 선 드로잉들과 지금까지 실행됐고, 현재 진행 중인 스테인드글라스 프로젝트의 축소된 디자인과 실물 크기의 디자인들이 그의 작업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에게 실제로 유리에 그림을 그리거나 작업도 하는지 묻자 놀랍게도 그는 디자인만 할 뿐 직접 유리에 작업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보다 유리에 작업이 더욱 능숙한 장인들이 있는데 왜 직접 하느냐며 오히려 내게 반문했다. 대신 그는 마치 설계도면을 방불케 하는 정교한 실물 크기의 밑그림을 직접 제작해 공방으로 넘기고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색 맞춤이나 선 교정 등 작가의 의도대로 작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참관하는 일은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와 같은 그의 작업 방식은 20세기 이후 화가들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이 이전과 어떻게 차별화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슈라이터는 유리를 자르거나 유리에 그림을 그리는 대신 언제 어디서든 연필을 손에 놓지 않고 그의 감정이 실린 선들을 반복해서 그리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요하네스의 모든 바지 주머니에는 몽땅 연필이 들어있다며 얼핏 보면 붓 가는대로 그냥 그린 것 같은 그의 선들이 쉽게 나온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줬다. 그리고 그의 살아있는 선들이 창 위에서 빛과 만나 그 생명력을 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독일 도르트문트 성모마리아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마치 창의 부분 부분에 균열이 잡힌 듯 보이고 일정한 간격으로 그려진 수직선들 위로 종횡무진하며 오가는 자유로운 선들이 눈길을 끄는 독일 도르트문트 성모 마리아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요하네스 슈라이터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1971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전쟁으로 파손된 총 34개의 창을 새롭게 제작 설치하면서 탄생됐다. 슈라이터가 스테인드글라스의 건축적 가능성에 대해 보다 깊은 차원의 해석을 시도하던 시기에 완성된 도르트문트 성모 마리아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따뜻한 갈색, 보라색, 회색의 색유리 면을 부분적으로 배치하면서 밀도 있게 그려진 수직의 납선들과 그 사이를 누비는 자유로운 선들로 화면이 구성되어 있다. 전통적인 스테인드글라스에서는 주로 납선이 서로 다른 색의 유리들을 구획 짓거나 테두리 역할을 한 것과는 달리 슈라이터의 납선은 손으로 직접 그린 것처럼 자유롭게 표현되어 있다. 즉 슈라이터에게 있어 납선은 단지 재단된 색유리들을 연결하고 지탱하는 프레임의 역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드로잉을 유리 위에 재현한 듯 독립된 선으로서 존재한다. 이렇게 유리 위를 떠다니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납선 드로잉은 그 자체로서 생명력을 갖고 작가의 손맛을 살리며 작품의 표현적인 면모를 강조하고 있다.

절제된 색채 구사

다채로운 선묘와는 대조적으로 슈라이터의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은 매우 절제되어 있다. 그리고 배경색으로는 주로 흰색 불투명의 오팔센트 유리(opalescent glass)를 사용하고 있다. 독일에서 슈라이터를 직접 만나 그간 궁금했던 질문들을 하며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그의 작품 대부분이 불투명 유리로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슈라이터는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유입되는 컬러 빛을 건축 공간 본래의 구조를 깨트릴 수 있는 요소로 보아 불투명 유리를 사용하고 있다. 그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컬러 빛을 실내로 유입하는 것이 아닌 건축 공간 내의 빛을 가장 적절한 상태로 조절해주는 역할을 보다 강조한다. 슈라이터는 오팔센트 글라스를 통해 유입되는 부드러운 빛이 초월적이고 명상적인 공간을 연출하는데 적합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의 창을 통해 성당을 방문한 이들이 현세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영적인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 요하네스 슈라이터, 독일 도르트문트 성모 마리아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1971년작 (출처: The Stained Glass Art of Johannes Schreiter)

순수성과 초월성을 상징하는 흰색

도르트문트 성모 마리아 교회에는 흰색이 메인컬러로 사용되었다. 슈라이터는 흰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흰색은 신의 순수성과 초월성을 상징하는 매우 기쁜 색이다. 흰색에는 스펙트럼의 모든 색이 담겨있다슈라이터는 중세 시토수도회의 단순하고 절제된 그리자유(grisaille) 창과 마찬가지로 자극적인 색의 사용을 최대한 절제하고 최고의 순수성을 내포한 색인 흰색을 자신의 작품에 적극 도입하고 있다. 신의 빛을 상징하는 부드러운 흰색 배경에 파손된 듯한 이미지는 독일에 의해 발발한 전쟁의 비극과 상처를 잊지 않도록 하고, 도르트문트 성모 마리아 교회 역시 이 전쟁으로 희생되었던 곳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로이테스도르프의 요한형제회 경당, 생명력 넘치는 살아있는 선들

슈라이터의 또 다른 대표작인 독일 라인 지역에 위치한 로이테스도르프(Leutesdorf)의 요한형제회(Johannesbundes) 경당 스테인드글라스는 모노크롬의 색조와 자유로운 선의 흐름에 대한 요하네스 슈라이터의 탐구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당 전면을 에워싼 대규모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인 이 작품 역시 슈라이터의 드로잉과 회화작업에서 비롯되고 있다. 특히 다양한 그의 라인 드로잉들은 작가가 지닌 의식의 흐름과 감정 상태를 담은 살아있는 선으로 제시되고 있다. 슈라이터는 언제 어디서나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당시 그의 감정 상태에 따른 선들을 그려나간다. 그리고 그의 선들에는 각기 즐거운 선”, “화난 선”, “예민한 선”, “겸손한 선등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그리고 그의 자유로운 라인 드로잉 작업이 실제 건축 공간에 확대된 스케일로 잘 표현된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요한형제회 경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다.

여러 층위로 이루어진 창

슈라이터는 유리로 되어 있는 경당의 투명한 세 벽면에 전체적으로 푸른 색조로 배경을 처리하고 그의 라인드로잉을 건축적 공간에 확대하여 옮겨 그렸다. 화면은 크게 세 개의 층위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는 짙은 푸른색의 배경 그리고 그 위에 보다 밝은 톤으로 이루어진 색면,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공간의 층위를 넘나들며 존재하고 있는 굵고 가는 선들이다. 이 작업이 진행된 시기였던 1960년대에 슈라이터는 당시 기존의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에서 보여주었던 정형화된 태도들, 다시 말해서 성경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에 집중하여 미학적인 측면이 상대적으로 축소되는 상황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다른 예술분야와 동등하게 고려될 수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새로운 미학적 원리를 재정립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순수예술로서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한 접근과 이해는 슈라이터를 포함하여 1960~70년대 새로운 현대 스테인드글라스 작가들의 공통된 화두이기도 했다.

 

▲ 요하네스 슈라이터, 독일 로이테스도르프 요한형제회 경당 스테인드글라스. 1965년작 (출처: 작가 제공)

푸른색의 상징

요한형제회 경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한 폭의 추상화와 같은 모습으로 제시되고 있다. 구체적인 사건의 묘사나 그리스도교의 상징이 재현되어 있지 않고 오직 두세 가지 톤의 푸른색 배경과 그 위를 떠다니는 자유로운 선들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 앞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깊은 종교적 명상과 내적 성찰을 이룰 수 있는 요소들을 마주할 수 있다. 푸른색은 하늘이자 물이고 또 성모님의 색이기도 하다. 보다 짙은 푸른 색 위로 떠오르듯 놓인 밝은 톤의 또 다른 푸른색은 태초의 어둠에서 빛이 탄생하는 순간을 형상화 한 것 같기도 하고, 방주로서 존재하는 경당 밖으로 내다보인 홍수의 물살로 뒤덮인 혼란스러운 세상의 모습일 수도 있다. 엉킨 실타래와 같이 무질서해 보이는 선들은 카오스 상태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성모 마리아의 푸른색 망토에 난 생채기들, 즉 성모님의 고통을 표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렇듯 슈라이터의 요한형제회 경당 스테인드글라스는 작가의 종교적 감성과 예술성을 투영한 순수 예술로서의 작품을 제시고 있지만, 우리에게 무엇을 보고 읽어내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다. 즉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서 자유로이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도록 그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이렇게 요하네스 슈라이터의 작품은 건축공간과의 조화를 다각도로 고려하면서도 작가 자신의 작업 색깔을 잃지 않은 순수예술로서 거듭나게 된 현대 스테인드글라스의 새로운 모습과 위상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수경  칼럼리스트

미술사학 박사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초빙교수

저서 : 한국의 STAINED G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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