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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서문원 기자
  • 영화
  • 입력 2020.06.03 18:35

[S인터뷰②] '안녕, 미누' 변화를 꿈꾸던 미누 형은 한결 같은 사람

단속 알면서도 계속 공연활동을 했던 미누, 앞으로 그런 사람 없다

▲ 스탑크랙다운 정규2집 freedom 앨범재킷(왼쪽부터 소모뚜, 미누, 소띠하, 송명훈, 해리)

[스타데일리뉴스=서문원 기자] 미누와 다국적 인디밴드 '스탑 크랙다운'이 개척한 노동운동은 세계 어디에도 유례를 찾기 힘든 독보적인 활동이었다. 

큰 맥락은 기존 시위 문화와 달리, 음악과 소통을 주무기로 기성세대의 해묵은 편견과 인식을 변화시켰다는 것. 물론 이 지향점은 현재진행형이다.

27일 개봉한 다큐영화 '안녕, 미누'는 소모뚜, 소띠하, 송명훈, 그리고 미누로 이어지는 하나의 실타래다. 노동 권익을 폭력이 아닌 문화로 풀어보려고 했던 다국적 인디 밴드. 그 중심에 서있던 네팔사람 미누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영화는 한 사람의 드라마틱한 삶과 고통, 그런 가운데 다시 일어서야만 하는 미누의 우여곡절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면서 미누는 지난 18년간 인디밴드로 문화활동을 전개하며 서로 소통하고 다수의 편견과 인식을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것이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사는 한국에 보탬이 된다고 믿었다. 이것은 미누 뿐만 아니라 스탑 크랙다운 밴드 멤버 모두의 소신이기도 하다.

지금부터는 지난주 1회에 이어 미누와 스탑 크랙다운 멤버였던 소모뚜 씨와의 인터뷰를 전한다.

미누 형은 한결같았죠

Q. 과거에 만났던 미누 씨는 첫 인상이란 얌전하고, 수줍은 성격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반대로 공연 무대는 활기차고 밝은 모습이었어요. 가까이서 지켜본 소모뚜 대표는 미누 씨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나요?

미누 형은 수줍다기 보다 모든 만남을 신중하게 대했을 겁니다. 아시겠지만 이주자노동자 문제만큼은 자기 의사를 분명히 하는 편입니다. 미누 형은 잘 웃고, 잘 챙겨주는 분위기 메이커였어요. 

열악한 노동 환경을 받아들이고, 퇴근후 차분하게 한국 사회에 이주민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사람은 아마. 로또 복권 당첨자 보다 적을 겁니다.(웃음)

미누 형처럼 착취, 차별과 분노가 만연된 이주민 노동자 사회에서 자기 일을 묵묵히 하며, 한국 분들께 이주민의 입장을 설명하고, 다시 이주민을 만나 그들의 입장을 들어주는 그런 사람은 쉽게 나타나지 않아요. 그것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말입니다. 

Q. 스탑 크랙다운은 어떻게 연습을 했나요? 멤버들 각자 직장에서 일도 하고 그랬을텐데요. 그리고 박노해 헌정앨범에 참여했을 때, 신해철 님이 프로듀싱을 했더군요. 칭찬도 하셨던걸로 예전 자료에 소개됐던데 당시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우선 스탑 크랙다운 멤버들은 각자 일터가 있었어요. 일과를 마치는 시간대가 각자 다 달랐기 때문에, 한데 모여 연습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박노해 시인의 20주년 헌정 앨범(노동의 새벽)에 참여는 이미 알려진 유명 가수들이 참여한 앨범입니다. 저희도 기회가 좋아 참여한거구요. 그때 해철이 형(신해철)이 많이 도와줬어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정말 잘하고 있다고 칭찬도 아끼지 않으셨구요. 

저희가 다른 가수들에 비하면 미약한 것도 있었지만, 해철이 형은 기꺼이 녹음에 참여해주시고 제안도 해주시고, 스탑 크랙다운의 '속 맛을 그대로 살리자'면서 가능한한 터치를 많이 하지 않으셨어요. 원곡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주셨어요. 

그때 저희는 혹시 모를 편견에 주눅들지 않으려면 연습도 공연도 열심히 하고, 매사 적극적으로 주어진 기회를 살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매일을 보냈어요.

밴드 내에서 미누 형은 큰 형답게 주로 멤버들의 입장을 들어주며 다독여주는 역할을 했었고, 저는 실무적인 일을 맡아 밴드를 이끌었어요. 당시 미누 형이 이주노동자 방송도 하고 있어 일이 많았었죠.

Q 2009년 10월 미누 씨가 국외 추방됐을때 스탑 크랙다운 활동은 어떻게 유지됐었나요.

당시 미누 형이 출입국관리직원들에게 붙잡혀 보호소에 있었을때 저와 통화를 했었어요. 그때 제가 "미누 형의 입장을 담아 이주노동자 문제를 사회 이슈로 만들자"라고 제안했었고, "이것 때문에 형이 한국에 영원히 못들어 올 수도 있다"고 얘기했었어요.  

그때 형은 단호했어요. "나를 통해서 이주민의 권리가 개선된다면, 그래도 좋아. 해"라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미누 형의 동의하에 'Free 미누'운동을 진행했었죠. 그리고 10년이 지나간 겁니다. 10년 동안 미누형은 한국에 입국이 금지됐었어요. 그 얼마나 잔인한 세월이었는지 저희는 똑똑히 봤어요. 

스탑 크랙다운은 계속해서 활동했었어요. 미누 형이 추방된 뒤에도 공연을 계속 했었어요. 한국인권재단에서 추진하는 콘서트, 암환자를 위한 기부 공연도 참가했었구요.

물론 그 뒤로 저는 사업을 시작하게 됐고, 명훈이는 교수가 됐고, 그러다 보니 활동이 뜸해지긴 했습니다. 작년에는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온뒤 기념 공연을 네팔에서 했었습니다. 아무래도 공연을 하려면 연습도 하고, 준비도 해야하니까. 녹녹한건 아닙니다만, 각자 여건이 허락한다면 계속해서 공연을 하려고 합니다.

▲ '안녕, 미누' 스틸컷(영화사 풀 제공)

Q. 소모뚜 대표님 처음 봤을때가 기억나네요. 날까롭고 강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하하 그랬었죠. 제가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라, 주변이 그렇게 만들어버렸죠. 미얀마도 한국처럼 전통적인 서열 사회인데다, 예의도 아는 문화입니다. 미얀마에서는 저도 수줍음도 많고, 큰소리도 못치는 성격이었어요. 아무래도 미얀마에서는 대학생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뭘 몰랐던거죠.

1995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공장 사장님이 이런 일, 저런 일 시키셨을 때 당연히 그래야 되는줄 알고 묵묵히 일을 도왔어요. 수당을 바라고 근무를 한게 아니라, 윗분이, 아버지 같은 분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남들 보다 더 많은 일을 했던거죠.

좋아하는 음악을 할수 있다는 것이 밴드결성의 원동력이었죠

문제는 다음이었어요. 끝도 없이 일을 시키고 그걸 받아들이다 보니 다들 당연한줄 알고 힘에 부칠 정도로 일을 시키는거에요. 그래서 사람이 변하더라구요. 주말도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성격도 변하더라구요.

기숙사에 있지도 못하고 결국 밖으로 돌고, 그 좋던 성격도 변하더라구요. 하하. 그 뒤에 1998년 부천에서 이란주 선생님이 이주노동자를 위한 크리스마스 공연을 준비하셨어요. 그때 선생님 제안으로 유레카 밴드를 결성하고, 2000년까지 활동하다, 2003년 '스탑 크랙다운'을 만든거죠. 

학창시절엔 아마추어 밴드 활동도 했었지만, 먹고 살려고 한국으로 왔을땐 그런 것들은 고향에 두고왔다고 다짐하고, 오로지 주어진 일에만 몰두했었어요.

그런 저에게 밴드를 결성하고 음악을 할수 없냐고 물어보던 선생님의 제안이 너무 즐거웠어요. 뭘 잘 모를 때였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저를 사로잡았죠.

▲ '안녕, 미누' 네팔 공연장면 컷(영화사 풀 제공)

현재 보다 먼 미래를 바라보며 달려가는 소모뚜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소모뚜 씨의 최근 근황을 물었다. 그는 부천에서 사업하면서 작년 주한 미얀마 노동자 복지센터를 설립하고,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 센터를 통해 한국에서 근무하는 이주민노동자 임금체불 문제를 중재하고, 권익보호, 상담 그리고 관련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한국에 거주하는 미얀마 출신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했고, 미얀마에 홍수와 같은 재해가 발생했을때 모금운동을 펼치며 다양한 지원 활동도 병행했다.

한편 소모뚜 씨는 아웅산 수지 여사와 민주정당 NLD가 2015년 총선에서 승리한뒤 고국 정치 활동을 권유 받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판단을 하고 있다.

그는 인터뷰 마지막에 아웅산 수지와 고국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미얀마 헌법을 보면 75%의 권력이 군부에 있어요. 가령 정부 부처 임명권이 군부에게 있어요. 반면 아웅산 수지여사는 25%의 권한밖에 없습니다"라고 전했다.

덧붙여 현지 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로힝야 참사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폭력사태가 발생해도 미얀마 민주정당이 사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부연했다.

"미얀마는 이제 민주주의를 하려고 하는 나라입니다. 한국처럼 되려면 정말 많은 고초와 시간이 지나가야 해요. 그때까지 저는 지금 있는 이 곳에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요"라며 소신을 말했다.

아울러 소모뚜 씨는 현재 미얀마 청년들의 의식 결여를 안타깝게 생각한다. 민주주의 국가도 아닌데 벌써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청년들이 늘어났다며 한국을 찾는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 민주주의를 알리고 싶다고 전했다.  

이주노동자에서 사업가가 된 소모뚜

이제 소모뚜 씨는 이주노동자에서 사업체 대표가 됐다. 사장님이다. 그는 후덕한 중년의 아저씨가 됐다.

인터뷰 중 소모뚜 씨는 형 미누를 떠올릴 때마다 올라오는 슬픔을 겨우 참으며 자신처럼 억울한 상황에 처한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살고 싶다고 앞으로의 꿈을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스스로에게 당당하기 위해 지금도 되돌아보고 매사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미누 형은 제 가슴 속에 넣어두고 스탑 크랙다운 밴드부터 시작해 다양한 활동을 했었고, 앞으로도 제 소신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것이 미누 형이 우리한테 바랬던 것이니까요"

▲ '안녕, 미누' 상영관 리스트(영화사 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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