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칼럼
  • 입력 2013.11.26 16:37

무협의 반문화성 "한국사회를 읽다"

한국드라마에서 반복해 쓰이는 무협의 코드에 대해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원래 천자의 다스림이 미치는 세상을 천하라 불렀다. 하늘의 아들이기에 천자이고, 그 천자의 다스림 아래 있기에 천하다. 그리고 천자란 곧 하늘이기에 하늘 아래 모든 것은 천자의 소유였다. 영국의 국왕도 천자를 배알하기 위해서는 신하를 자처해야 했다.

그에 비해 강과 호수란 사람이 깃드는 곳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강물이 모여 호수가 되고 호수가 다시 강물이 되어 흐른다. 사람이 모이고 다시 흩어지는 것을 비유하고 있기도 할 것이다. 강에 의지해 농사도 짓고, 고기도 잡고, 배를 띄워 사람과 물자를 실어나른다. 그런 곳이면 어김없이 사람이 모이고 마을이 생기고 도시가 성장해간다. 먼 타지의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서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가족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천자의 다스림과는 상관없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강호의 유래는 매우 오래다.

泉학 漁相與處於陸 相구以濕 相濡以沫 不如相忘於江湖 與其譽堯而非桀也 不如兩忘而和其道
샘이 말라 물고기가 서로 뭍으로 나와 서로 물기를 끼얹고 서로 물거품을 적셔줌은 드넓은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사는 것만 못하다. 요를 칭찬하고 걸을 욕하기보다는 둘 다 잊고 하나가 되느니만 못하다.

'장자' 대종사편의 한 구절이다. 샘이란 물고기가 의지할 물이 솟는 곳이다. 샘이 마름은 근원을 잊는 것이고, 본성에서 벗어난 곳에서 그저 물이나 끼얹어주는 것은 차라리 너른 강과 호수에서 아예 모른 척 지내는 것만 못하다. 요는 성군이고 걸은 폭군이니 여기에서 뭍이란 강과 호수에 대비되는 천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뭍이야 성군이든 폭군이든 왕의 다스림을 받겠지만 물고기인 백성은 차라리 너른 강과 호수에서 물에 의지해 살아간다. 딱 여기서 말하는 강호의 뜻일 것이다.

그로부터 수백년 뒤 쓰여진 반고의 '한서' 범려편에서도 비슷한 용례가 나온다.

乃乘扁舟, 浮江湖
(범려는) 마침내 한 척 배를 타고 강호로 나갔다

원래 범려는 월나라의 재상이었다. 회계산의 패전 이후 궁지에 몰린 월나라를 안정시키고 월왕 구천을 도와 마침내 오왕 부차를 도모하여 오나라를 멸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오나라가 망하고 구천이 패자의 자리에 오르자 환난은 함께 할 수 있지만 영화는 함께 누릴 수 없을 것이라며 관직을 내놓고 모든 가산을 정리하여 월나라를 떠나고 있었다. 중국의 전설적인 상인 도주공이 바로 이 범려의 화신이었다 하니 관직을 내놓고 세상으로 나가 상인으로써 다시 일가를 이룬 셈이다. 여기에서 쓰인 강호도 바로 그 강호였다.

강호의 성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무협소설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중국 4대기서의 하나 '수호전'이었을 것이다. 조정은 부패하고 관리들은 탐욕스러웠다. 법도 제도도 제대로 지켜지는 것이 없었고, 인정도 도의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런 때 백성들이 믿고 의지한 것은 일개 도적무리에 불과한 양산박의 호걸들이었다. 관직에 있는 이들조차 백성들을 도울 때는 개인의 명성과 실력에 의지한다. 재산을 풀어 백성들을 돕고, 간혹 곤란한 처지에 놓인 이가 있으면 발벗고 해결에 나서기도 한다. 개인의 분쟁 역시 관이 아닌 이들 유력한 명사들이 중간에서 중개하여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도록 해준다. 송간이나 옥기린 노준의가 명성을 얻은 것은 그래서다.

그야말로 흉악한 도적의 무리들이다. 나그네에게 약을 먹여 잠들게 한 후 그를 죽여 고기로 만두를 빚는다. 원수랍시고 찾아가 죽여서는 간과 살을 내어 태연히 구워먹는다. 주동을 양산박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참혹하게 살해하는 장면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범죄자들이 영웅이 되고 호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조정이 정한 법과 제도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공적인 규범이 제대로 사회의 규준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니 개인의 사적 규범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사람 사귀는 것을 즐기며, 불의를 원수처럼 미워하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면 발벗고 나선다. 아니 그런 것들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것이면 그런 행동을 하는 이를 공경하고 예우함으로써 대신하게 된다. 사실 앞서 말한 흑선풍 이규만 하더라도 그 행동이 포악하고 흉악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러나 급시우 송강을 비롯 대인이라 할 수 있는 영웅들에게 깍듯이 함으로써 호걸에 들 수 있었다.

공적 규범이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개인의 관계가 그것을 대신하게 된다. 악인이 있는데 관이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땅히 그만한 실력을 가진 개인이 나서서 그것을 대신 해결해준다. 간장과 막야와 얽힌 전설에서 처음만난 젊은이의 원수를 갚아주고자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던진 협객이 그 한 예일 것이다. 삼국지의 서서 역시 젊은 날 다른 사람의 원수를 대신 갚아주고 천하를 떠돌다 양양에서 사마휘를 만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을 유협이라 불렀다. 일정한 거처 없이 천하를 제집처럼 떠돌며 협을 행하는 이들이다. 다른 말로 무례라고도 불렀는데 기존의 기득권이 주도하는 법과 질서를 공공연히 어기고 무시하는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가운데 마적이나 화적 같은 녹림에 몸담는 이들고 있었고, 흑사회와 같은 범죄조직에 속하는 이들도 있었다. 딱 '수호전'이다. 차라리 관보다는 도적놈이 더 의지가 된다.

그런 경향이 심화된 것은 왕조가 멸망하고 그로 인한 혼란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몇 번이나 경험하면서였다. 200년을 이어가는 왕조가 드물었다. 전한과 후한이 400년을 이어갔지만 전한이 망하고 왕망의 신이 들어서면서 광무제 유수가 후한을 세우기까지 역시나 작지 않은 혼란을 겪어야 했었다. 왕조가 망하면 권력에 공백이 생기고, 권력의 공백은 지금껏 권력에 눌려왔던 실력자들에게 기회가 되어 주었다. 세상이 뒤집히고 어제의 가치와 질서가 오늘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왕조는 허망하고, 왕조가 강조하는 법과 질서는 허무하며, 기존의 권력 역시 언젠가 사라질 헛된 것에 불과하다. 믿고 의지할 것이 필요하다. 지옥같은 난세에서도 자신들을 지켜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중국에서 유독 비밀결사가 발달한 이유일 것이다. 차라리 언제 망해서 사라질지 모르는 황제보다 항상 가까이에 존재하는 비밀결사의 형제들을 믿겠다. 중국 정부가 파룬궁이라는 비밀결사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튼 바로 이것이 무협에서 나타나는 '의협'의 실체일 것이다. 정의와는 다르다. 정의는 보편의 가치다. 양심과 이성이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의협은 다분히 감정적이다. 나쁜 놈이 있다. 죽인다. 저기 내 가족을 해친 원수가 있다. 죽여서 복수한다. 혹은 자신이 직접 복수하지 못할 것이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린다. 죽어 마땅한 악인이라면 기꺼이 손을 빌려주어 상대를 죽인다. 관은 무시한다. 그것은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별세계의 존재다. 해를 끼쳤으면 끼쳤지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다. 때로는 그같은 비밀결사가 뭉쳐서 난을 일으키기도 한다. 아예 세상을 뒤집어 버리겠다. 백련교와 태평천국, 그리고 중국공산당이 여기에 속한다. 중국공산당도 처음에는 비밀결사로 시작했다. 중국공산당의 결속력은 그래서 지금도 매우 견고하다.

중국의 무협이 나타내는 반사회성, 반문화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드라마에서 무협적 요소가 등장할 때 그것은 필경 역사나 법과 같은 규범적 가치와는 상관없는 개인의 인정이고 개인의 정의감일 터였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 역시 개인의 인정에 이끌린 관계가 거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의 가난을 해결해주는 것도 개인의 노력이나 혹은 주위의 도움 정도다. 개인의 어려움을 돕는 것도 자신의 노력이나 혹은 주위의 인정과 배려일 것이다. 그러면서 사회전체의 규범적 가치나 제도적 장치에 대한 관심은 희석된다. 그렇다고 중국의 비밀결사처럼 기존의 권력이나 질서에 도전하려는 의지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황제의 신하가 되어 황제의 적과 싸우던 양산박의 호걸들은 기존의 유교적 가치에 충실하고 있었다. 송강은 위험스런 이규와 함께 죽고 있었다. 모든 것은 개인에 수렴한다.

어쩌면 현재 한국사회를 읽을 수 있는 코드이기도 할 것이다. 모든 것은 개인에 수렴한다. 개인이 결정하고 개인이 책임진다. 격양가를 부르듯 정치따위 내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정치에 관심이 많지만 그것이 어떤 법이나 제도, 공공의 규범이나 질서에 대한 관심은 아니다. 개인에 대한 것이고 개인의 역량이나 인정에 대한 것이다. 묘하게 집단주의가 강한데 개인주의는 그보다 더 강하다. 집단이 개인을 강요하고 개인이 집단을 강요한다. 중국의 무협이 한국의 드라마에서 이렇게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한국인과 닮아가고 있다.

어느 시대나 정치는 중요하다. 법은 그 규준이 된다. 제도는 그 구조를 이룬다. 하지만 그것을 신뢰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것에 마냥 의지할 수만은 없을 때가 있다. 개인의 인정과 역량, 관계는 그 대안이 되어 준다. 다만 그것이 모든 것을 우선해 버린다. 천하에 사는가? 강호에 사는가? 물론 지금의 천하는 천자가 다스리던 그 천하가 아닐 테지만 말이다. 흥미로울 것이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