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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6.19 14:35

내사랑 내곁에 "평범함이 주는 미덕"

놀랍지도 대단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평범하다.

 

"저기... 미솔씨 혹시... 남자친구... 있어요?"

정말 신선했다. 오랜만이었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사귀는 남자가 있는가부터 묻기. 예전에는 바로 이런 것이 연애의 정석이었는데.

지나치게 소심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과감하거나. 아니면 상황이 그렇게 과장되어 있거나. 굳이 상대에 대해 묻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설사 사귀는 사람이 있어도 운명은 그리로 두 사람을 이끈다. 이미 서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진 상태다.

그런데 겨우 도미솔(이소연 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깨닫자 이렇게 순진할 정도로 정직한 반응이라니. 당사자인 도미솔은 알지도 못하는데 연애의 정석 그대로 먼저 사귀는 사람이 있는가를 물어 가능성의 여부를 타진한다. 그러고도 고백을 못하고 돌아와 고민 삼배경.

가만히 생각했다. 시청율도 낮다. 화제성이 특별히 높은 것도 아니다. 아마 이런 드라마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매번 이 드라마를 빼놓지 않고 보고 심지어 리뷰까지 쓰고 있는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일 것이다. 직구다. 그런데 한가운데 꽂아넣는 직구가 아니다. 멀리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힘으로 윽박지르는 것도 아니고, 절묘한 변화구인 것도 아니다. 소심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딱 던질 수 있는 만큼만 존을 벗어나지 않게 던진다. 그리고 상대방도 그런 것을 어느 정도는 눈치챈다. 딱 그 만큼만.

평범하다. 말한대로 스탠다드하다. 어디서 본 듯한. 어디서 많이 겪은 듯한. 일상의 캐릭터와 일상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너무 지저분하지도, 너무 깔끔하지도, 너무 멋스럽지도, 너무 구차하지도 않다. 동생 봉우동(문천식 분)을 그렇게 걱정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하자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표정을 짓는 누나 봉선아(김미숙 분)처럼. 그래. 어디선가 본 것 같다. 봉우동은 그녀에게 보살펴야 하는 동생이며 또한 너무나 버거운 짐이다.

아들 고석빈(온주완 분)을 위해 그토록 지우라 다그치고, 마침내는 봉선아와 도미솔 모녀마저 동네에서 내몰았다. 하지만 정작 핏줄인 봉영웅을 보게 되자 그녀는 어느새 핏줄에 이끌리고 만다. 끝까지 독하지도, 그렇다고 마냥 선하지만도 않다. 딸을 위해 딸 모르게 결혼도 않고 낳은 손주를 내다버리고서도, 정작 딸이 죽고 나자 그 손주를 찾기 위해 여직 최선을 다하고 있는 강정애(정혜선 분)여사와 다르지 않다. 핏줄을 위해 핏줄을 버리고 그러면서도 핏줄에 이끌린다. 아마 너무나 와닿는 그런 정서가 아닐까?

서로 사랑했다. 서로 사랑해서 어린 나이에 그런 관계를 맺었고, 그 결과 임신을 하고 아이도 태어났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감정을 마치 칼로 도려내듯 쉽사리 잘라내고 정리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도미솔은 봉영웅에게 엄마가 되어 주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도 없이, 자신도 엄마가 아니다. 고석빈에게는 그런 도미솔을 두고 도망쳤다는 원죄가 있다. 정확히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라기보다는 서로를 부여잡을 수 없는 상처와 짐이었을 것이다. 서로를 보는 순간 애써 묻어두었던 상처가 깨어나고 고통은 지난 시절의 감정마저 일깨운다. 그럼에도 역시 무모하게 내달릴 수 있는 고석빈의 원죄가 도미솔의 미련보다는 더 강했으리라.

답답하다. 어째서 저럴까? 그렇게 헤어졌으면서도 아직 서로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을까? 그것이 사랑이든 아니든. 어떠한 감정의 편린이든. 그러나 현실에서도 그렇게 서로에 대한 감정이 쉽게 정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울고, 그래서 상처입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매달리며 다시 상처받는다. 나쁜 남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쁜 여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인연이란 그렇게 거미줄보다도 질기고 독하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일상의 이야기처럼. 그리고 그것은 과장되고 과잉된 최근의 드라마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미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내가 보고 자라온 드라마들이었다. 그 뻔하다고 하는 가운데 보통의 일상이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하늘 아래 어디에선가는 도미솔이 있고 고석빈이 있고 이소룡(이재윤 분)이 있고, 봉선아와 배정자가 있다. 정리해고당하고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는 이소룡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기를 살려주려는 어머니. 꿈에 쫓겨 결혼도 못하고 가족들에게 시달리는 이소룡의 고모 이소리(이의정 분)와 여전히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할머니 정말자(사미자 분). 그러고 보면 이소룡이 입양되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드라마치고는 너무 평온한 가정이다.

당연히 고석빈의 마음이 그리로 가 있는 이상 현실의 아내인 조윤정(전혜빈 분)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녀가 나빠서가 아니다. 그녀가 못되게 굴어서가 아니다. 단지 고석빈에게 그녀를 돌아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진심이 아니었고 따라서 지금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무엇이 오해이고 무엇이 사실인지. 뜻하지 않는 불륜은 그녀를 괴롭게 한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이 드라마에서는 이렇다 할 악역이라 할만한 역할이 없다. 단지 조금 더 독하고, 조금 더 약하고, 조금 더 여유가 없이 급할 뿐이다. 아예 생각이 없거나, 아니면 생각이 너무 많거나. 그런데도 서로 엇갈리며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면서도 곧잘 그 상처를 보듬고 넘어간다.

쉬운 게 아니다. 사실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써가는 게 가장 쉽다. 놀랍고 대단한 이야기를 놀랍고 대단하게 써가는 것이 가장 쉽다. 이런 스탠다드한 이야기는 그러나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노출되어서. 또한 사람들이 어디선가는 일상에서 부딪히게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래서 조금만 허술하면 버로 드러난다. 필자가 동생 봉우동을 다시 만나는 자리에서 봉선아가 지은 표정을 보며 어렴풋 가슴을 저미는 듯한 공감을 느꼈던 것처럼. 짐짓 독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이내 얼굴이 풀리며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고 마는 배정자의 감정선에 어느새 이입하고 마는 것처럼.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자신의 감정에 쫓기며 끝내 눈물을 보이며 무너지는 도미솔과 고석빈처럼.

그만큼 사람을 알아야 한다. 세심하게 사람을 살피고 그것을 써내려갈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묘사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연기할 수 있어야 한다. 새삼 드라마의 연기자들에 감탄하는 이유다. 튀는 사람 없이 자기 역할에서 최선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얼핏 그다지 눈에 뜨이는 연기는 아니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연기는 세심하고 정교하다. 다정하다. 드라마란 원래 다른 사람의 일상을 엿보는 것이었다. 그것이 드라마였다.

전에도 말한 무색무미무취. 너무 독한 드라마에 길들여진 모양이다. 그래서 재미없다 생각했는데, 그러나 그것이 재미있는 것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람의 감정과 이야기라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당연하게 행동한다. 어느새 도미솔을 좋아하게 된 이소룡의 모습이란 그야말로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습이 아니던가. 박지성이 공을 잡지 않았을 때의 움직임이 좋다더니 서로를 마주하지 않을 때조차 고석빈과 도미솔의 감정도 드러나 보인다. 오랜만이다. 아니 그보다는 그만큼 그동안 드라마를 잘 보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처음에는 미성년자의 임신이라는 충격적인 소재에서. 그러나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함정을 무릎쓰고 미성년자의 임신에 대해 정면으로 디테일하게 다루고 있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동정하지도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았다. 임신이라는 충격적인 소재로부터 벗어났을 때는 조금 심심해지겠거니. 그러나 그 연장이다. 일상에서의 영웅이가 받는 상처와 봉선아와 도미솔 모녀가 받는 상처, 하지만 그 여상함이. 어느새 숨소리와 체온마저 느껴지는 것 같다.

부디 시청율에 쫓겨 이상하게만 변하지 말기를. 설사 고석빈과 도미솔의 관계가 불륜으로 발전해도 이 드라마라면 어쩐지 괜찮을 것 같다. 막장과 막장이 아닌 드라마의 차이. 진심이 담겼는가. 진실이 담겼는가. 그런 믿음이 생겼다. 이 드라마라면 괜찮다. 지금의 교감이 헛되지 않음을.

근래 가장 괜찮게 보는 드라마다.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도 결국 지나고 나면 가장 물처럼 담담한 이 드라마를 떠올리고 만다. 이야기는 세심하고, 연출은 담담하며 연기는 정교하다. 사람냄새가 나는 드라마다. 마치 내가 저 가운데 있는 듯. 즐겁게 보고 있다. 모든 제작진과 출연진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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