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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6.16 06:55

최고의 사랑 "국민비호감과 대중의 진실!"

제작진과 배우가 드라마를 통해 들려주고자 하는 진실!

 
대중은 진실따위에는 관심 없다. 그것은 하나의 법칙이기도 하다. 사람은 단지 자기가 믿고 싶은 사실만을 받아들이려 한다. 오로지 그것에만 관심이 있다.

예를 들어 농사짓다가 잡혀온 사람이 있다. 그런데 경찰은 그를 간첩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잡혀온 사람이나 주위 사람들이 그가 간첩이 아니라 한다고 들어줄까? 여기에 한 가지 법칙이 더 추가된다. 권력은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생각지 않는다.

송강호가 말했다. 자기가 현정화라 했으면 현정화라고. 임춘애도 그 순간 현정화가 된다. 조고는 사슴을 두고 말이라 했고 사슴이라 말한 사람을 죽였다. 어느 임금은 묵이라는 물고기를 은어라 불렀다가 다시 묵이라 돌려놓아 도루묵이라는 이름의 이유가 되었다.

권력이란 폭력과 정의다. 정의란 무오류에서 나온다. 내가 틀릴 가능성은 없다. 그러므로 네가 틀린 것이다. 간첩이 지나간 반경 100km 안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간첩이 된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공산당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다. 내가 틀릴 수는 절대 없으므로. 그것은 진실이 된다.

작년 이맘때였을 것이다. 그들도 진실을 내세웠다. 상식을 이야기했다. "타블로의 진실을 요구합니다""상식이 진리가 되는 세상" 그들이 만든 카페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진두지휘아래 온 네티즌이 합심했다. 언론까지 나섰다. 졸업장도, 졸업증명서도, 성적증명서도, 심지어 스탠포드출신자들의 증언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진실을 요구했다. 상식을 요구했다. 그들이 요구한 진실과 상식은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그 가운데 다수는 누군가의 진실과 상식을 이야기한다.

너무나 쉽게. 하기는 촌락사회에서 개인이란 원래 존재할 수가 없다. 항상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숨소리를 듣고, 체온을 느끼고, 일상을 공유한다. 남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니다. 내 일이 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쉽게 내 이야기하듯 말한다. 쉽게 남의 이야기하듯 말한다. 자신의 주관적 경험을 객관적 인실처럼. 자신의 개인적 의견을 보편적 상식처럼. 그래도 통했으니까. 더구나 그것이 대중이라는 - 네티즌이라는 권력마저 손에 넣고 나면.

그렇게 군림하듯 내려다 보고,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양 판단하고 단정짓고, 그래서 나오는 말이 네티즌수사대라는 것이다. 결국 그 단어마저 나오고 말았다. 누구도 그들에게 개인의 신상을 캘 권한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그들이 캐낸 신상을 가지고 찢고 짓밟고 부수고 그것을 그들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한다.

누구 하나 죽고 나면. 아니다. 설사 사람이 죽더라도 그들은 절대 반성하는 법이 없다. 왜냐면 네티즌이다. 대중이다. 나는 아니다. 나는 상관없다. 나는 그저 휩쓸렸을 뿐이다. 나도 속아넘어간 것이다. 누군가의 탓이다. 다른 누군가 잘못된 정보를 흘린 탓이다. 언론의 책임이고 특정한 개인의 책임이다. 공격할 때는 다수의 힘을 빌고, 도망칠 때는 혼자가 된다. 아니 그런 때조차 다수의 이름으로 그 안에서 소수를 골라낸다. 마치 구애정의 뒤에 숨으려는 한민아처럼.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당사자가 괜찮다고 한다. 당사자인 윤필주(윤계상 분)가 괜찮다고 인터뷰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론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대중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과연 구애정(공효진 분)과 사귀는 남자연예인이 누구인가? 그리고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쓰이는 게 바로 상식이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사귀는 남자가 있는데 연예프로그램에 나와 프로포즈까지 받았으면 당사자로서 기분이 좋았겠는가. 상식적으로 그런 상황에서 참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윤필주의 감정까지 만들고 보이는 것을 무시한다. 윤필주가 하는 말까지 무시하고 그것을 믿어버린다. 그리고 구애정이 윤필주를 농락했다고. 더구나 구애정이라는 한 인간을 단정짓고 그에 대한 말을 만들어낸다.

구형규의 눈물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바로 지금 무심코 내뱉는 그 말이 누군가를 상처입힐 수 있다. 이제 초등학교 다니는 작은 아이에게 평생의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에조차 그 아주머니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왜 우는가? 어째서 우는가? 타블로 사태 때도 어째서 타블로는 정상적으로 냉정한 판단을 못했는가. 심지어 이제 다 끝났으니 음반 내고 활동하라. 여론이라는 것이 갖는 속성이다. 가해자이면서도 자기가 가해자인 것을 모른다.

참으로 노골적이랄까? 연예인을 그만두려 해도 어디 가서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없는 현실. 여전히 감시자가 되고 그들의 일상을 구속하며 그들을 소유하고 지배하려 든다. 하기는 연예인만인가? 치명적인 고통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으면 남의 일 쯤은 모른 척 넘어가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시시콜콜 그것을 캐고 따져묻고 마침내 그들을 사회의 주변으로 밀어낸다. 역시나 향촌사회에서는 이방인에 그렇게 가혹하다. 항상 보아 오던 이웃을 제외하고, 혹은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동류를 제외하고 절대 마을 안으로 들이려 하지 않는다. 여행자에게 관대한 것은 그가 여행자이기 때문이지 그가 머물려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행복하다는 사람의 과거를 파헤치려 들고. 그 행복한 일상을 위협하여 그를 궁지로 내몰고.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족마저 대중에 공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족마저 공개하고 대중이 그들을 물어뜯으라. 그렇게 해서라도 동정심을 살 수 있다면. 친구의 비밀까지도 까발려 그 짐을 덜어야 하고. 그것을 강요하는 문대표나 그것을 거부하는 구애정이나 그것을 추적하려는 기자들과 네티즌들. 연예인은 인간이 아니다. 최소한 한국사회에서는.

아마 그러면서도 드라마를 보면서 구애정을 동정할 것이다. 무책임한 언론을 비난하고, 잔인한 대중을 비판하고. 하지만 언제는 안 그랬는가. 결국은 당사자들이다. 공범이다. 언젠가부터 사람들 사이에 당연하게 쓰이기 시작한 "깐다"는 말.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이고 의무다. 자유다. 오로지 이렇게 드러난 사안에 대해서만 잠시 반성할 뿐이다.

윤필주가 말한 그 이상한 나라. 그런데 정작 그 이상한 나라를 만든 것은 누구인가? 이상한 나라란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나라다. 인간의 욕망과 추구가 이상한 나라를 만들고 대마왕을 만들어낸다. 문득 돌이켰을 때 그것은 어찌 이리 기괴하고 흉측한 모습이 되어 있는가. 버섯돌이 강세리(유인나 분)마저 일상에서는 그저 철없이 솔직하기만 한 아가씨일 뿐이다. 인간이 만든 세상에서 니나를 구해온다고 과연 니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아마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바로 작가가 의도한 바일 것이다. 하필이면 구애정이 국민비호감으로 설정된 이유. 그녀가 겪는 일상이 바로 네티즌, 아니 대중에 의해 가해지는 폭력의 결과다.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나 안다. 이해한다. 꿰뚫는다. 심지어 사과를 해도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네티즌은 안다. 얼굴을 마주하고도 알기 어려운 진실을 네티즌은 단지 텍스트만 보고서도 안다. 구형규도 울고, 구애정도 울고, 주위 사람들도 울고, 하지만 그들의 일상은 수많은 일상 가운데 동떨어져 있을 뿐이다.

어쨌거나 그렇기 때문에 결국 대마왕이 출동하려는 모양이다. 니나를 구하기 위해서. 어쩌면 이상한 나라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니나를 보호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대마왕일 것이기 때문에. 죽음을 앞두고 있기에 더욱 절실하고 간절하다. 살아난 뒤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만일 살아나더라도 구애정과 함께 진흙탕을 구르고 싶다. 하지만 과연 구애정은 독고진(차승원 분)의 그런 마음을 받아들여줄 것인가. 구애정은 현실의 니나가 아니라 이상한 나라의 주민 구애정이다.

누구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진실에 대해 관심이 없으면서도 진실만을 쫓는 이상한 나라. 그 나라가 이상한 것인지 그 나라를 지켜보는 현실이 이상한 것인지. 이 또한 독고진과 구애정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설정일 테지만 너무 리얼한 탓에. 아마 연기자들도 상황에 몰입하며 연기하게 되지 않았을까. 공효진이며 윤계상이며 많은 루머에 시달렸었다. 이희진 역시 베이비복스 시절 그들을 괴롭히던 루머에 대해 안다.

떠나고 싶다고 떠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설사 떠나더라도 대중과 언론은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마치 낙인처럼. 그것은 어쩌면 저주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화려한 꿈을 꾸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리로 몰려들고, 그 꿈은 어느새 변질되어 다시 저주의 낙인을 찍는다.

드라마를 보고 정작 드라마의 내용을 생각하기보다 다른 것을 먼저 떠올려 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심각한 탓이다. 드라마에서도 결국 구애정과 구애정의 주위를 파괴하려 드는 바로 그러한 모습들이. 미디어와 그 미디어를 사주하는 대중과 오히려 미디어보다 더 설치려는 네티즌. 그리고 구애정과 구형규의 눈물. 어쩌면 그것은 제작진과 배우가 들려주고자 했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내가 뭘 잘못했는데 자숙을 해야 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전국민이 날 미워해? 내가 그렇게 꼴도 보기 싫은 짓을 했어? 나는 그냥 내 일 열심히 하고, 속상해도 웃고, 우스우면 더 웃고 그런 것 뿐이 없는데. 그런 주제에 사랑하면 죄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가 뭘..."

그러고 보면 그 자숙이라는 것도 그렇다. 딱히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논란이 되었으니. 혹은 대중이 보기에 밉보였으니. 어떤 정해진 규정도 원칙도 없이 자숙이라는 반성을 강요한다. 마치 그 자체로 잘못이라는 듯. 단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는 이유만으로. 어이없게도.

하여튼 강세리는 역시 항상 일을 저지르고 나서 후회를 한다. 후회하면서도 또 언젠가는 그렇게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앞세울 것이다. 어린아이다. 그렇게 구애정에 미안해 하면서도 시샘하고 질투하고. 다시 구애정의 뒤에 숨으려는 한민아에 대해서도 이미 그녀에게는 자신만의 소중한 일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를 보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눈빛이 무언가를 예감케 한다. 아마 한민아의 남편이 하필 국제변호사라는 것이나 미국에서 살다 왔다는 것이 한 몫 하지 않을까. 한국인 남편이 아니다.

과연 독고진은? 과연 구애정은? 그리고 윤필주는? 폭풍이 거세지며 폭풍과 맞서싸우려는 비장한 모습들에서 서로의 진심이 드러난다. 인간의 본성이란 위기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독고진은 진실되고 구애정은 성실하며 윤필주는 진지하다. 강세리는 너무 솔직하다. 기대하는 까닭이다. 하루가 길다.

골이 깊으면 산도 높다. 날이 더우면 소나기는 더욱 시원하다. 긴장이 고조되면 그에 따른 희열도 크다. 과연... 해피엔드를 믿으며. 좋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음을 믿는다. 기다린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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