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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사회
  • 입력 2011.05.23 19:20

송지선 아나운서의 죽음에 붙여!

또 하나의 정의가 또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또 한 사람이 죽었다. 사실 개인적인 문제다. 진위도 사실 모른다. 그래서 그다지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프라이버시는 어디까지나 프라이버시라는 주의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아니 항상 많다. 정의로운 사람들. 도덕적인 사람들. 그래서 작은 흠결도 참아내지 못하는 사람들. 

언제부터인가 네티즌이 경찰이 되고 검사가 되고 판사가 되었다. 교도관이 되고 집행관이 되었다. 수사에서부터 처벌까지. 형량은 무제한. 

작은 꼬투리라도 잡으면 그 대상은 그야말로 너덜너덜 누더기가 되어 버린다. 존엄이고 자존이고 없이 철저히 난도질당하여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가 버린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새삼 타블로가 정말 강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여자의 남편이며 한 아이의 아버지이며 가장이라는 것이 이렇게 강하구나. 

소의 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결국 죽이고 만다고 하던가? 과연 죽을 잘못이었을까? 심지어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까지 너무 쉽게 나온다. 

더 역겨운 것은 결국 사람이 죽고 그래서 책임이 돌아올 것 같으니 슬금슬금 새어나오는 일부론. 그녀를 공격한 것은 단지 일부일 뿐이다. 공격은 네티즌의 이름으로 한다. 

물론 나 역시 죄인임을 안다.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말했듯 프라이버시는 프라이버시로써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논쟁이 이는 것을 알면서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를 위한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모르는 일은 모르는 일이다. 

가장 후회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까? 그렇지만 또 저런 일들에 대해서는 인터넷에서 생활하는 이상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형량법정주의라는 것도 있다. 정히 네티즌이 경찰에 검찰에 판사에 교도관까지 겸하려면 최소한 어디까지 하려는지 자체적으로 정해놓기라도 하기를 바란다. 끝도 모르고 폭주할 것이 아니라. 죽을 지도 모른다는 글에 대해서까지 쏟아지던 조롱들. 때로는 절망에 빠진 이들에 대해 너무 쉽게 말하는 죽음. 

정의보다 더 큰 문제가 바로 그 정의일 것이다. 옳다고 믿는 맹목. 그 옳음을 실현하고자 하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저돌. 항상 크게 사고를 치는 것은 정의로운 사람들이었다. 

또 한 사람의 희생을 앞에 두고 답답해져 오는 것이 이것이 처음이 아니기에. 그리고 또 언제고 반복될 것임을 알기에. 그리 구원의 손을 내밀었다는데 잔인하게 내치고 말았다. 

때로는 말이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아무것도 아닌 말에 불과한 것 같지만 그 말로써 응징하려는 그 자체가 죽음에 이르는 흉기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죽고 나서는 부디 이런 아픈 일이 없기를. 사생활은 사생활이라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라고.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음에. 안타까울 뿐이다. 평안하시라. 

차마 죽은 이의 이름조차 말하기가 꺼려진다. 그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너무 정의롭고 당당하다. 나는 못하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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