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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권상집 칼럼니스트
  • 칼럼
  • 입력 2017.07.29 16:39

[권상집 칼럼] '알쓸신잡'이 대중에게 준 교육, 비판적 사고의 함양

<알쓸신잡>은 왜 시청자와 교육 현장에 큰 울림을 주었는가

▲ 알쓸신잡 ⓒtvN

[스타데일리뉴스=권상집 칼럼니스트] 나영석PD의 연출로 6월 초부터 방송된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하, 알쓸신잡)’이 7월 28일 9회 방송을 끝으로 모두 종영되었다.

방송 첫 회부터 5.4%의 시청률을 올린 <알쓸신잡>은 최고 7.19%의 시청률까지 기록하며 수많은 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혹자는 <알쓸신잡>의 성공 비결을 인문학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유시민 작가를 포함한 일부 출연진에게 돌리기도 했고 또 다른 전문가는 나영석PD의 과감한 기획력에 성공 요인을 돌리기도 한다. 다만, 필자는 PD의 기획력 이전에 비판적 사고가 왜 중요한지 출연진들이 다시 한번 모든 대중에게 일깨워 주었다는 점에서 이 프로그램의 존재 가치에 의의를 두고 싶다.

해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교육 제도를 손질하고 대학 입시 기조를 바꾸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교육 현장인 공교육을 개혁한다는 미명 아래 많은 손질이 그 동안 가해져 왔지만 단 한번도 성공을 거둔 적은 없다. 제도는 요란하게 변경을 거듭했지만 여전히 교육 현장에서는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 암기식 시험 문제 등을 통해 정형화된 인재만 길러내기 때문이다. 주입식, 정형화된 수업으로 공교육이 붕괴된 지는 이미 오래다. 일반 고교 수학 수업에 80% 이상의 학생이 대놓고 잠을 잘 정도로 공교육 현장은 초토화되었다. 일부 수도권 대학을 제외하고 대다수 대학교에서 진행하는 교육 현장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모든 책임을 열의 없는 학생들에게 돌려야 할까? 아니다. <알쓸신잡>의 주된 시청 계층은 놀랍게도 20대 대학생~30대 직장인이다. 학교에서 기계적인 학습과 주입식 교육만 받아온 대중은 다양한 출연진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저마다의 견해와 사고로 이야기를 논하며 서로의 생각을 확대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열광했다. 교과서 내용에 관심 없던 이들이 유시민, 김영하, 황교익, 정재승 <알쓸신잡> 출연진들의 이야기를 어록 삼아 자신의 SNS에 올려 놓는 이유도 바로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지혜의 향연을 방송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알쓸신잡>은 기계적인 학습만 강조한 교육 현장에 중요한 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반면, 모 주간지 기자는 자신의 SNS를 통해 “<알쓸신잡>은 인문학의 위대한 패배를 알린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은 항상 기승전-과학으로 끝나는 편이었고, 해당 이야기의 마지막에 시선이 향하는 사람이 절대자인데 그 절대자는 언제나 정재승 KAIST 교수였다”라며 인문학적 이야기의 끝을 항상 과학으로 결론 내린 <알쓸신잡>은 역설적으로 인문학의 패배를 알린 것과 같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알쓸신잡>을 보고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린 기자의 견해에 안타까움을 느낀 건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누가 이야기의 승자이고 누가 결론을 내리냐는 건 이미 시청자들의 주된 관심과 흥미 유발 요소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알쓸신잡>의 출연진들은 통영, 순천, 강릉, 경주, 공주 등을 포함 총 10여군데를 다니며 282 가지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의 시작이나 화두를 나머지 출연진들이 던지고 해당 주제를 정재승 교수가 결론 내렸다고 해서 인문학의 패배를 언급한 기자의 단선적 사고는 과거 주입식 교육에서 인재로 인정 받았던 이들의 고착화된 사고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 프로그램이 많은 학생들과 직장인, 더 나아가 대중에게 열광을 받았던 이유는 누가 결론이나 정답을 내렸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각기 다른 분야의 출연진들이 해당 주제에 대해 어떤 관점을 유지하고 어떤 생각을 갖고 이야기를 논했느냐가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재승 교수는 방송 중간 중간 학계의 연구 결과 또는 견해와 다른 이야기를 해 종종 반론을 듣기도 했다. 가령, 인공지능이 사람을 이길 수 없는 요인을 ‘인공지능에 욕망을 넣어줄 수 없다’고 발언한 부분이나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 여부와 관련된 발언은 논란의 소지가 있고 기존 학계 연구와 다른 부분이 있어 오해의 소지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최근 들어, 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 영역조차도 계속 발전하고 있기에 현 상황에서 확답을 내리거나 섣불리 단정하기 어려운 영역은 이전보다 확대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라는 이유로 모든 주제에 관해 성급히 결론을 내리는 건 비판적 사고를 함양해야 할 학자로서는 다소 위험하게 보였다.

김영하 소설가는 해당 프로그램이 사랑을 받았던 이유로 “어떤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생각해보고 자문해보며 해당 지식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며 새로운 각도에서 해당 지식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김영하 소설가는 프로그램 말미에 강조했다. 무비판적으로 사고하고 기계적인 학습만 해서는 이미 우리가 수없이 들어온 인공지능, 기계에 밀려 도태될 수밖에 없다. <알쓸신잡>이 우리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는 어쩌면 ‘비판적 사고’ 이 딱 한 마디로 귀결될지 모른다.

과거에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또는 척척박사’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인재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손 안의 컴퓨터라고 불리는 스마트폰을 우리가 쥐게 되면서 단편적인 지식은 이제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미국 및 유럽의 명문 대학들은 ‘독립적인 사고력을 함양할 수 있는 인재 또는 비판적인 사고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 육성’을 모토로 내걸고 전 세계 우수 인재를 빨아들이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국내 교육 환경은 알파고에 밀릴 수밖에 없는 무비판적인 사고의 주입식 인재만 양산해내고 있다. 기계적인 교육은 지식이 충만한 사람을 길러내지만 비판적 사고는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길러낸다. <알쓸신잡>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교훈이다.

- 권상집 동국대 상경대학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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