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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공소리 칼럼니스트
  • 칼럼
  • 입력 2017.02.12 06:43

[공소리 칼럼] 페미니즘에 대한 질문은 두렵다

▲ 픽사베이 제공

[스타데일리뉴스=공소리 칼럼니스트] 페미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은 받았을 때 답변하기 몹시 곤란했다. 사전적 정의를 쓸데없이 질문한 것은 아닐 터,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을 묻는 건 ‘한국사회에 사는 여성으로서 어떻게 느끼느냐’고 질문을 받는 것 같았다.

한 문장의 질문을 풀어보면 많은 것들이 담겨있었다. 워마드나 메갈리아(여성우월주의, 남성혐오 등으로 유명한 커뮤니티 사이트)가 주장하는 페미니즘에 대해, 양성평등에서 남성만 군대 징병제이니 여성도 마찬가지로 징병돼야 하는가, 서양의 페미니즘 캠페인과 한국사회에서 말하는 페미니즘이 차이점 등 복잡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한국만의 페미니즘이 있다?

과거 성리학, 가부장적 문화 등 양성평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뿌리 깊은 이유를 우리는 알고 있다. 조선 후기 너도나도 신분을 사고파는(공명첩) 탓에 가문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 촌락을 형성해 살며 대를 잇는 장남(=가주)의 영향력이 커졌다. 한 가문의 존속은 장남과 연결되므로 아들은 귀하고 꼭 필요한 존재였다.

오히려 근대사회에 접어든 조선 후기에 신분질서의 문란으로 가부장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후 신분해방과 조선이 일제에 잠식되고 일제강점기 속에서도 고등교육과 신문물을 접한 ‘신여성’이 등장하지만, 여성신장을 부정하는 입장이 압도했다. 가부장제의 잔재는 쉽게 없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제강점기나 독재정권에서 여성을 필요에 따라 관념화 및 상품화를 거치며 현대까지도 여성평등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성을 헌신적인 존재, 훌륭한 양육의 어머니 등으로 후진적인 이미지만을 덮어씌우며 정책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여성을 관념화시킨 어두운 과거가 청산되지 않은 채 잔재로 남아있는 것이다.

서구권의 페미니즘과 한국에서의 페미니즘 움직임은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유럽은 인권과 양성평등의 문제 제기에 앞섰으며, 한국보다 사회구조와 인식부터 페미니즘에 진취적이다. 여성 공직자나 조직의 임원 수 등 제도권 안에서 불평등이 해소, 여러 각도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을 인정하고 양성평등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한국과 비교했을 때 양성평등의 속력 차이는 비약적이고, 어쩌면 속도조차 다르다.

대개 온라인, 매체 등에서 양성평등을 두고 하는 싸움의 수준은 형편없다. 평등을 외치기 위해 유럽과 비교하며 발 빠르게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만을 꼬집어 양성마다 차별의 근거로 내세우기 바쁘다. 비교하기에 앞서 각 시대와 국가의 역사와 흐름을 무시한다면 비교 자체가 차별적이다.

여성차별 해결=양성평등

우리는 두 가지를 인정해야 한다.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남아선호사상, 시대에서 자행된 여성 관념화, 여성 상품화 등을 양성 모두 보고 겪고 자랐다. 그것이 시대의 암흑에서 비롯된 차별적 잔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또 여성평등을 말하는 것은 양성평등이다. 여성 대학진학률이 남성을 웃돌고 전문직 등 여성의 사회 상위진출이 증가하는 여성신장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것이 모든 여성이 모든 부분에서 평등하게 살고 있다고 연결할 수는 없다. 불평등을 느끼는 여성차별을 개선하고자 하는 것은 양성의 평등을 위해서다. 다르게 말하면 여성은 여전히 차별받는다. 여성차별 현실을 그대로 알고 인정해야 한다.

필자는 페미니즘에 대한 견해에 이어 마지막으로 ‘필자가 느낀 여성차별은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한 가지만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일하는 조직 속에서, 대중교통 등을 이용할 때, 학창시절 학교에서, 그냥 길을 걸을 때조차 사는 순간순간 폭력적인 차별, 그 이상을 느꼈다. 여성인 필자에게 가해진 폭력적 차별 앞에서 ‘내가 남자였다면 이런 수치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셀 수 없이 많이 들기도 했다.

여성이 물리적으로 약할 것 같아서, 상대적으로 남성이 우위에 있다는 느낌으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은 흔하다. 차별하고 폭력적인 언행을 해도 상대 여성은 약하니까 맞서지 못한다는 생각과 남성우월주의 속에서 성장하면서 남성우월이 내재해 있으니까 말이다.

마치 한국만의 페미니즘이 있는 양 우스운 발상을 한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상위권에 도달해서 평등을 넘어 남성이 역차별을 당하는 세상이라는 발상을 한다. 지난 세월 동안 사회 상위권은 남성의 자리였는데 이제는 뺏겼다는 시선, 그런 삐뚤어진 시각부터 차별이다. 경쟁사회에서 도태되는 남성만을 애먼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것, 이는 여성이 평등하지 않은 존재이며 분리된 객체로 보는 것이다.

우리 모두 여성=어머니, 어머니=헌신적이라는 이미지에 갇혀 성장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속에 대부분은 성적으로 폭력적인 전제가 내재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명백한 여성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은 계속 양성평등을 외치고 물리적인 운동이 가해져야 바뀔 수 있다. 차별이 정당화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면 여성차별을 인지하고 양성평등을 인정하면서 성숙할 차례다.

페미니즘에 대한 유치한 싸움과 당연하게 폭력적 차별이 내재한 안타까운 한국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기는 참 어렵다. 평등과 차별에 대해 말할 때 본질 흐리는 근거를 가져와 차별을 차별로 대항하는 공격을 받을까 봐 두렵기도 하다.

어쩌면 불공평하다 못해 경쟁의 끝도 없는 지옥 같은 이 사회에서 누구나 피해의식, 공격적 방어기제는 더욱 단단해질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러나 불공평한 구조와 어딘가에서 차별받았다는 이유로 또 다른 대상을 객체화시키고 폭력적인 차별을 반복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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