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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2.20 08:38

무신 "거란의 침략과 성대하고 살벌한 격구경기, 미쳐 있던 최씨정권의 실체를 보다!"

격구의 멋과 재미를 잔인한 폭력이 대신하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성급한 판단이었는지 모르겠다. 홈페이지와 그동안의 모습만을 보고 어쩌면 최충헌과 최씨정권을 미화하는 내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철원까지 거란군이 밀고 내려와 있는데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살벌한 격구에 열광하는 고려인들을 보고 있으니. 말기적 모습이었다.

어느 사회든 마찬가지다. 활력을 잃고 침체에 빠져들게 될 때 항상 도덕적 타락을 동반하게 된다. 도덕적 타락이란 도덕적 가치를 쾌락과 바꾸려는 경향을 말한다. 가치란 보편적인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것이다. 쾌락이란 개인적인 것이고 또한 순간적인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 기대도 희망도 없으니 순간에 충실하려 한다. 내일에 대한 아무런 희망이 없으니 순간의 쾌락에만 집착하게 된다.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이미 최우(정보석 분)가 도방에서 각지에서 올라온 장계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거란군이 철원까지 밀고내려온 사실이 전해지고 있었다. 서경에서는 오랜 전란으로 말미암아 민심이 이반하여 고구려부흥운동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는데 집권자라는 이가 하는 일이 거창하게 격구대회를 여는 것이다. 더구나 그 이유라는 것이 최씨정권의 사병을 모으기 위한 목적이었다. 외적이 개경까지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 전선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병력을 뽑아 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최씨정권의 사적인 무력을 확보하기 위해 예산과 인력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말을 타고 싸울 수 있는 기병이란 어느 시대에든 매우 요긴한 전력이었다. 거란은 기병을 주력으로 한다. 기병에 가장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같은 기병 뿐이다. 최씨정권의 사병으로 적합한 이를 뽑기 위해, 더불어 최씨정권과 개경 시민들의 쾌락을 위해 죽어나가는 저들이야 말로 거란과의 싸움에서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전력인 것이다. 하기는 그래서 최충헌은 자발적으로 거란과 싸우고자 나섰던 자신의 문인들을 처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라의 명운보다 개인의 이익과 쾌락이 더 중요하다. 그는 참 무욕하다.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욕심조차 없다.

더구나 그같은 최씨정권의 의도에 호응하고 있는 개경의 백성들은 무엇인가 말이다. 왕이야 어차피 허수아비다. 관리들도 거의가 최씨정권에 의해 임명된 이들이었다. 하지만 심지어 승려들조차 사람을 죽이는 격구시합을 보지 못해서 안달이다. 자비를 말하고 살생을 금기시해야 할 승려들이 오히려 격구시합을 보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역시나 당시 불교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개경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최양백(박상민 분)이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오르게 된 결정적 계기였던 3년 전 격구대회에서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최항백 한 사람 뿐이었다고 했다. 얼마나 시합이 참혹했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일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기대하고 흥분해서는 환호한다. 사람이 말에서 떨어져 밟히고 심지어 죽어나가는데도 오히려 환호성은 더 커진다. 고려 무인의 기상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래봐야 아무렇게나 죽어도 상관없는 이들이다. 안타까워하기보다는 환호하고 열광한다. 웃음소리만 커질 뿐이다. 노비까지 포함되어 있다. 과연 그 가운데 어디에 고려의 무인이 있고 무인의 기상이 있었을까.

최씨정권이 그렇게 길들였거나, 아니면 오랜 무신정권의 폐해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이 피폐해진 결과일 것이다. 3S라고 한다. 자극적인 오락거리야 말로 권력이 민중을 통제하는 매우 훌륭한 수단 가운데 하나다. 현실의 모순에 대한 분노와 불만을 잊게 만든다. 비판을 못하게 만든다. 최씨정권이 제공하는 오락에 길들여진다. 그리고 그동안 무신들에 의한 정변이 반복되는 동안 현실에 불안을 느낀 사람들이 탈출구로서 쾌락을 찾으려는 것일 수도 있다. 한 마디로 당시 최씨정권의 현실이었던 셈이다. 양심을 속이고 당장의 쾌락만을 쫓으려 한다. 비관과 부정의 시대였다.

"제국의 태양이자 위대한 영도자이신 상국 합하께옵서..."

그래서 한참을 웃을 수 있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태양을 말하고 영도자를 말한다. 원래 무도한 권력일수록 그를 치장하는 수사들은 아름답다. 굳이 태양이라 말하지 않아도 태양인 것을 알고, 영도자라고 밝히지 않아도 영도자임을 인정한다. 더구나 그 말이 아들 최우의 입에서 나와서는. 절묘한 풍자였을 것이다. 당시의 무신정권과 최충헌의 최씨정권에 대한 - 오히려 사직과 백성과 나라, 그리고 개혁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역설이 되는 통렬한 비웃음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입으로 떠드는 가치의 실체라는 것이 이렇다. 오해였던 셈이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다.

만일 이것이 시놉시스에서 밝힌대로 최씨정권의 위세와 영화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면 크게 실수한 것이라 말해주고 싶다. 미쳐 있는 것이다. 필자가 만일 당시 몽골의 대칸이었다면 이 미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침략하고 싶어졌을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시합을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사회는 결코 정상이 아니다. 원형경기장에서 노예들로 하여금 살육의 경기를 벌이게 하고 그것을 즐기던 당시의 로마 역시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문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구가 재미가 없다. 몇 번 격구를 재현해 시연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드라마에서도 몇 차례 격구하는 장면이 방영된 적이 있었다. 폴로경기도 우연찮게 볼 기회가 있었다. 하나같이 재미있었다. <무신>에서의 격구만 재미없었다.

말이란 달리는 것이다. 말을 타고서 멈춰 있을 것이라면 굳이 말을 타는 이유가 없다. 보병으로 하여금 기병을 상대하게 할 때 병사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한 가지다. 말을 멈추게 하라. 전면에 포진한 병사들이 말을 멈추게 하면 기병은 그대로 무력화된다. 반대로 말을 멈추게 하지 못하면 보병이 완전히 와해된다. 달리지 않는 기병은 전혀 무섭지 않다. 그리고 멋도 없다.

원래의 격구 역시 그래서 항상 달리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공이 없을 때는 멈추기도 하고 걷기도 한다. 그러나 공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노리고 있을 때는 항상 달린다. 달리는 가운데 공이 오가고 그 공을 차지하기 위해 묘기들이 펼쳐진다. 드라마에서 서로 싸우기 위해 살기를 머금고 달려드는 모습보다 더 긴장감 있다. 서로를 쓰러뜨리려 말을 멈추고 채를 휘두르는 그 순간 실제의 격구에서는, 그리고 폴로에서 역시 먼저 말을 달리고 있다. 빠르게 달리는 말과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기기묘묘한 동작들에 사람들은 환호한다. 그것이 실력이다. 말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

말을 타고서 정작 멈춰서 서로 드잡이질하는데 그것이 무에 재미가 있을까? 럭비나 미식축구에서도 정작 선수들이 서로 부딪혀 몸싸움을 할 때는 그다지 재미가 없다. 그보다 공을 잡은 선수가 전력으로 적진을 향해 달려갈 때, 그래서 그 선수를 중심으로 빼앗고 지키기 위한 싸움이 벌어질 때 그것이 재미있는 것이다. 축구에서도 선수들은 항상 그라운드 위를 달린다. 공이 움직일 때 선수들도 함께 공과 함께 그라운드를 쉬지 않고 누빈다. 공과 상관없이 그저 상대편 선수와 드잡이질하는 것을 무슨 재미로 볼까? 사람 죽이는 재미? 최충헌(주현 분)과 최우의 웃음소리는 그래서 통쾌하다.

"공은 아무것도 아냐! 상대를 쳐야 공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당시 고려는 고작 몽골에 쫓겨 압록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던 거란의 잔당에조차 쩔쩔매며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는가? 공을 잡아 상대편 진영의 문에 집어넣어야 승리를 한다. 경기장에서의 몸싸움은 그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전략과 전술이다. 공을 상대편 문에 집어넣는 것은 궁극적인 전략적 승리일 것이고, 상대를 쓰러뜨려 수를 줄이는 것은 단순한 그 과정에서의 전술적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전략을 포기하고 전술에 집중하라 한다. 적을 쓰러뜨리다보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병법에도 말하기를 장수를 잡으려면 말을 쏘고, 적을 잡으려면 대장을 먼저 잡으라 말하고 있다. 나머지는 그냥 따라오는 것이다.

모두가 쓰러진 가운데 한 사람만 겨우 살아남았다. 반면 상대팀은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고 모두 살아남아 있다. 그러나 정작 공은 겨우 남은 한사람의 손에 있고 그는 그 공을 상대편 문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러면 누가 승리한 것일까? 더 많은 사람이 살아남은 팀이 승리한 것이라면 규칙을 바꿀 필요가 있다. 공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로지 적을 쓰러뜨려야만 한다. 전술과 전략에 대한 개념조차 없다. 정작 적의 대장이 저 앞에 있는데 눈앞의 적을 쫓느라 신경도 쓰지 않을 타입이다. 그런 무사들을 정예라고 받아들이는 최씨정권의 수준도 알 만하다.

적을 얼마나 잘 죽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명령에 따라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내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것을 정예라 부른다. 사람을 얼마나 잘 죽이는 병사보다 오히려 살기를 죽이고 오로지 명령에만 충실할 수 있는 병사가 더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최씨정권이 보유한 사병이야 말로 당시 고려에서도 최정예로 이루어져 있으니 고려의 군사적 수준 또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작 그런 수준이었다.

차라리 팀을 나눴으면 어땠을까? 말을 빠르게 잘 달리니 공을 가지고 적진으로 달린다. 대신 느리지만 몸싸움에 능한 이들은 그 주위에서 적이 공격해 오는 것을 막는다. 일부는 적이 공을 가졌을 때 그것을 빼앗는 역할을 한다. 그런 과정에서 서로 다치고 죽는다. 납득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경기가 과열되어 죽는 사람이 나온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말을 달리며, 그조차도 말을 멈춘 채 오로지 적을 쓰러뜨리는데만 골몰하고 있다. 군인이 아니다. 병사도 아니다. 그냥 짐승들이다. 목적도 목표도 전술도 역할도 없이 살기에 미쳐 날뛰는 짐승들. 고려만의 멋도 낭만도 그 무엇도 그 자리에는 없다. 그것은 격구가 아니었다. 그저 잔인하기만 할 뿐 그 어떤 멋도 재미도 느낄 수 없었다.

그야말로 경기도 뭣도 아니었다. 단지 격구의 형식을 빈 살육게임을 뿐이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상대를 공격해 다치게 하고 심지어 죽게 만드는가. 경기장에서 직접 싸우고 있는 당사자들도,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들도 오로지 그 한 가지에만 관심이 있다. 오로지 그것만을 목적으로 개최되고 치러지고 모두가 구경하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문제라면 필자의 경우 그런 것들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격구가 격구가 아니게 되니 남는 것은 잔인한 폭력 뿐, 재미가 없는 이유다. 지루하고 지겹다.

물론 그럼에도 워낙 격구에 대해 아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 폴로경기 역시 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아무런 사전지식없이 보았을 때 그림이 꽤 그럴싸하다. 말 위에서 채를 휘두르며 싸우는 모습이 꽤나 박진감넘친다. 그런 식으로 싸우면 보병의 눈먼창에도 그만 목숨을 잃기 쉽다. 말은 달려야 하고 달리는 말 위에서 보여지는 기술들이 진짜인 것이다. 하루만에 훈련을 마치고 격구에 참가하는 이마저 있고 보면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모르고 보면 재미있다. 알고 보면 어처구니 없다. 쓸데없이 돈만 많이 들여 만들었다. 단지 그저 마냥 보기에는 재미있기도 하겠다.

역시나 거슬린다. 막부라는 말. 막부가 보통명사가 된 것은 오히려 에도막부의 말기였다. 그 전까지는 가마쿠라 막부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가마쿠라 막부는 미노모토노 요리토모의 선조인 미나모토노 요리요시가 무츠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동국의 무사들에게 추대를 받은 것을 강조하고자 굳이 정이대장군과 막부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하고 있었다. 최씨정권은 막부였는가? 무사들의 연합정권이라는 점에서는 맞다. 그러나 일반명사로서 막부라는 이름을 쓸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다. 막부란 일본에서만 나타난 고유한 지배체제인 때문이다. 의상도 일본풍이고 거슬린다.

벌써 2회째다. 더구나 이번 4회차는 거의 격구를 중심으로 줄거리가 짜여져 있다. 그런데 정작 격구에서 건질 것이 없다. 어설픈 마상격투만이 있을 뿐 격구가 갖는 호쾌함이나 화려함, 우아함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일차원적인 폭력과 자극적인 영상만이 가득할 뿐이다. 최충헌의 말처럼 고려 무사의 기상이 서린 고려의 멋을 그저 피와 죽음만이 존재하는 스너프로 만들어 버렸다. 고려인들을 살육이나 즐기는 미치광이로 만들었다. 최충헌을 비난하고자 한 것인가? 아니면 고려가 몽골에 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보여주고자 한 것인가?

하여튼 문제일 것이다. 거란이 이미 한창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영토를 유린하고 있을 것이다. 많은 백성들이 거란군의 침략 앞에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충헌과 그의 일족은 후방에서 격구나 열며 즐기고 있다. 정작 전장에서는 수많은 병사들과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있는데 후방에서 화려하게 차려입고 사람이 죽고 다치는 모습을 보며 즐기고 있다. 미친 것인가? 다만 의혹은 풀렸다. 당시를 미화하려는 의도는 없다. 제대로 미쳐 있던 시대였다. 미쳐 있던 정권이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격구였다는 것. 격구에 대해 이미 아는 상태에서 전혀 격구와는 거리가 먼 장면들을 격구라는 이름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거에서 어긋나고 말았다. 드라마를 전혀 즐길 수 없었다. 태반이 격구와 관련된 내용인데 정작 격구가 격구가 아니었다. 무어라 말하기조차 민망하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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