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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2.16 09:08

난폭한 로맨스 "오수영의 좌절, 내가 하고 싶은 거?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누군가에게는 관계가 자유의 이유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구속의 이유가 된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필자가 가장 두려워하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뛰어난 재능이나 혜택받은 환경이라는 것도 부럽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부러운 것이 사랑받고 자란 사람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최악의 상황에조차 최선만을 생각하는 사람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백척간두에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사람과 결국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마는 사람, 앞으로 나가는 건 결국 그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선택과 결단의 순간에 앞으로 내 딛는 그 한 걸음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용기란 믿음에서 나온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그런 자신을 붙잡아 줄 다른 누군가에 대한 믿음.

사랑받는다는 것은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존경의 또다른 형태다. 나는 가치있다. 나는 필경 가치있는 존재다. 어떤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나를 지지해줄 것이다. 나를 지탱하고 나를 끌어올려줄 것이다. 실패가 두렵지 않다. 좌절이 두렵지 않다. 두려운 건 바로 앞에 보이는 꿈을, 호기심을 잡지 못하고 놓치는 것이다. 아이들이 그렇다. 아이들은 한 번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더 이상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다. 정확히는 못한다.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불안과 두려움이다. 좌절과 체념이다. 아이들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간다.

오수영(황선희 분)과 강종희(제시카 분)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물론 유은재(이시영 분)와 강종희가 다른 부분이기도 하다. 타고난 재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재능을 인정받으며 주위의 관심 속에 살아온 지난 날들에 대한 경험 때문이 아닐까? 사랑받고 싶고 관심을 받고 싶은 것은 오수영이나 강종희나 같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강종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자유롭고 오수영은 구속된다. 믿음이 부족해서다.

사랑받는다는 믿음이 있다. 사랑받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다. 당연히 자신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그래서 강종희는 심지어 박무열(이동욱 분)로부터 거절당하고 난 뒤에조차 유은재에게 스스럼없을 수 있다. 유은재가 박무열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박무열 역시 유은재를 좋아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유은재로 인해 자신은 박무열에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박무열이 아니더라도 그녀를 좋아해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바로 앞에 아마도 박무열의 조언에 따라 아이스크림을 사와서는 자신을 위로하려 하는 그녀가.

반면 오수영은 일방적으로 부탁하고 들어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나가는 강종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전혀 내키지 않는 어머니의 화랑까지 찾아간다.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어머니가 싫다. 밉다. 그보다는 두렵다. 이번에는 어떤 말로 상처를 입히려 할까? 이번에는 과연 어떤 말로 또다시 상처를 입게 될까? 그럼에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강종희의 변했다는 말이 듣기 싫어서. 미움받기 싫다. 거절당하기 싫다. 거절당하기 싫어서 거절하지 못한다.

남편 진동수(오만석 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결정적인 순간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만다. 들어주었으면 싶다. 알아주었으면 싶다. 그러나 정작 그를 위한 노력이 필요한 순간에 그녀는 쉽게 체념하고 만다. 차라리 내가 듣는다. 내가 알아준다. 내가 그에 맞춰준다. 인내란 그녀에게 있어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절박한 투쟁인 것이다. 자신과 싸운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 미움받지 않기 위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유은재라고 다를까? 그녀가 박무열에게 자기의 감정을 고백하고서도 이내 바로 뒤로 물리고 만 것은 박무열과의 관계를 의식해서다. 비참해지고 싶지 않다. 우스워지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박무열 앞에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 차라리 멋지게 쿨하게 박무열에게서 물러나자. 박무열과 헤어지고 영국으로 떠나고 나서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당당하게 박무열에게 돌아올 수 있는 강종희와 다른 부분이다. 이제는 아예 포기하고 있다. 강종희와의 지지부진한 관계가 오히려 답답하다. 이제는 강종희와의 관계마저 신경이 쓰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어쩌면 천재란 괴팍하다는 편견이 생겨나게 된 이유일 것이다. 천재란 에고이스트다. 자기만을 사랑한다. 그런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사실은 안다. 믿고 싶어한다. 그래서 더 자유롭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부모의 눈치가 보이고, 형제의 눈치가 보이고, 친구의 눈치가 보이고, 다른 동료들의 눈치가 보인다. 헤어진 아내와 다시 결합하기를 바라면서도 유은재의 눈치를 보며 주눅들어하는 아버지 유영길(이원종 분)처럼. 아니면 아예 김동아(임주은 분)나 서윤이(홍종현 분)처럼 자신을 유리시킨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사람이란 결국 무리를 이루어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리에 적응하지 못하면 무리로부터 쫓겨나야 한다. 문명화된 지금에도 무리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도태를 의미한다. 때로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마저 속여가며 주위에 동화되려 한다. 자신의 감정마저 속여가며 주위에 맞춰가려 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을 잃어간다. 진동수가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말했을 때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말하는 오수영의 넋두리는 그래서 얼마나 애잔한가? 과연 지금 당장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했을 때 무엇을 하고 싶은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한국사회는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위의 눈치를 보며 자신을 억누르는 오수영을 착하다 하고 항상 제멋대로인 강종희를 못됐다 말한다. 오수영이 될 수밖에 없다.

박무열이 8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강종희에 대한 기억을 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부모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던 그에게 찾아온 첫사랑이 바로 야구였다. 그런 그에게 강종희와의 관계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사랑하고 또한 사랑받았던 첫경험이었을 것이다. 진동수에 대한 믿음으로 그에게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사랑했고 사랑받았다는 기억은 그로 하여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담보해준다. 자신의 가치에 대해 그는 자유로울 수 있다. 이제는 유은재가 바로 그런 본모습을 정면으로 마주보아 준다.

어쨌거나 가장 결정적인 차이일 것이다. 사랑받기에 사람과의 관계가 구속이 되고 마는 사람과 사랑받을 수 있기에 사람과의 관계가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가 되는 사람들. 그다지 크게 차이가 나는 것 같지 않음에도 살다 보면 어느새 그들은 저만치 앞서 달려가고 있다. 주위를 살피며 머뭇거리는 자신과는 달리 전혀 두려움없이 앞만 보며 달려가고 있다. 그래서 정말 부럽다. 강종희와 같은 캐릭터가. 그래서 또 무섭다. 지금의 차이가 과연 어디까지 벌어질지.

물론 그렇다고 마냥 오냐오냐 들어주는 것이 사랑일 것인가? 자기가 어떤 잘못을 해도 어떤 실패를 겪어도 항상 지지해주고 사랑해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무엇이 잘못인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싸우기도 해야 한다. 싸우고 화해하는 사이 신뢰는 더욱 깊어진다.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는 것은 단 한 번도 상대에게 진심인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무튼 심각하다면 바로 그런 오수영의 억눌린 부분을 범인인 가정부(이보희 분)가 찌르고 들어갔다는 것. 키워드일 것이다. 나쁜 것은 누구인가? 나?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가엾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연민이라는 것이 있다. 현실의 비극을 견뎌내기 위한 방어기제다. 아이까지 유산한 그녀에게는 그같은 불행의 책임을 돌릴 누군가가 필요하다. 너무나 가엾은 자신을 대신할. 강종희의 훼손된 그림들이 혹시 그로 인한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한 대로 오수영의 억눌린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한 바탕 크게 소란이 일 필요가 있다. 말했듯 싸우면서 사람은 서로 신뢰를 키워간다.

사람이란 이미지로서 상대를 기억한다. 사람만이 아니다. 모든 것이 그렇다. 사람의 뇌는 사실 성능만 놓고 본다면 그다지 대단하다고 할 수 없다. 대신 사람에게는 컴퓨터와는 달리 자아가 있다. 자아란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그리고 수많은 경험을 통해 형성된 자아는 마치 함수처럼 각각의 정보에 코드를 부여한다. 그것을 곧 경험이라 부르고 상식이라 부른다. 기억을 저장하고 다시 끄집어내는 키워드다. 이해의 근원이며 오해의 시작이다.

같은 맥락이다. 오수영이 생각하는 어머니와 어머니가 생각하는 오수영, 아니 오수영 자신이 생각하는 오수영조차 실제의 오수영과 같은가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하다. 그래서 기댈 수 있는 답을 찾으려 한다. 그에 집착하게 된다. 강종희가 자유로운 이유다. 그녀는 굳이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오로지 그런 자신만을 믿는다. 그러나 아내인 오수영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던 진동수조차 정작 오수영에 대해 아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항상 답을 구하고 그 답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한다. 강종희에게는 설사 자기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 뿐이다. 전혀 다르다.

어째서 가정부는 그렇게까지 박무열에 집착하는가? 그녀가 생각하는 이미지가 있다. 그녀의 이미지 속의 박무열이 현실의 박무열과 별개로 존재한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그녀의 이미지 속의 박무열이다. 그러고 보면 그녀 역시 시를 쓴다. 강종희는 그림을 그린다. 오수영은 그림을 포기했다. 관계를 자신에 끌어맞추는가? 아니면 상대에 맞춰가는가? 차이라면 강종희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그녀에게는 없다. 강종희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가정부는 이제 시를 쓰지 않는다. 시를 쓰지 않는 이유야 말로 그녀가 박무열을 자신의 이미지 속에 가두려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엇갈림을 터다. 로맨스의 핵심이다. 감정의 엇갈림. 관계의 엇갈림. 그러면서도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오리라는 믿음이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너무 엇갈려 버렸다. 어쩌면 우리나라보다는 일본에서 더 잘 통할 수 있는 스타일의 드라마가 아니었을까. 한국의 드라마 환경에서는 보다 명확하고 명쾌한 것을 선호한다. 지나치게 질척이며 걸리는 것이 많다.

여전히 재미있다. 특히 박무열이 유은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깨닫고 이상형을 묻는 장면에서. 이미 박무열에 대한 감정을 그런 식으로 정리해 버린 뒤인 것이다. 박무열을 부정하는 유은재의 이상형에 박무열은 답답함을 느끼고 만다. 어쩌겠는가? 자업자득인데. 로맨스도 본격화된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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