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6.05.02 06:22

[김윤석의 드라마톡] 옥중화 2회 "죄의 한가운데서 자라난 꽃, 죄가 악이 아닌 이유"

거짓말과 살인, 그러나 순수한 해맑음에 대해

▲ 옥중화 ⓒMBC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옥중화. 옛병법에 차라리 바보흉내를 내지 미치지는 말라(假痴不癲)는 말이 있다. 다른 말로는 먹과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近墨者黑)라는 말도 있다. 어차피 모두가 눈이 하나인 세상이라면 굳이 혼자서만 눈이 둘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세상이 썩었는데 혼자서 깨끗한 척 해봐야 미움만 살 뿐이고, 모두가 거짓말을 하는데 혼자서만 참말을 해봐야 믿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흐르는 강물을 거스르지 않고 순리대로 따라 흘러간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이며 살아남기 위한 절박한 본능이기도 하다. 그렇게 사람은 세상과 닮아가고 그리고 물들어간다.

하필 태어난 곳이 죄지은 이들을 가두는 전옥서였다. 철이 들기 전부터 크고 작은 죄를 지은 죄인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들으며 자라왔었다. 확실히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는 것에 대한 거리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굳이 귓속말로 가리고 있기는 하지만 윤태원(고수 분)이 동편 3번 감방에서 양아버지인 지천득(정은표 분)를 괴롭히던 왈패두목 강만보를 살해한 것과도 아주 관계가 없지는 않은 듯하다. 바로 직전에 윤태원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조건을 걸었고, 윤태원이 살해혐의를 받지 않도록 주부 정대식(최민철 분)를 강만보가 있는 옥사로 유인하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이지함(주진모 분)이 어린 옥녀(아역 정다빈 분)에게 말한 '차도살인'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못된 놈은 더 못된 놈으로 혼내는 것이다.

한 편으로 매우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이제 겨우 15살이었다. 아무리 일찍 어른이 되어야 했던 시대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래도 아직은 순수가 더 어울릴 나이인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속이고, 사람이 죽는 것을 지켜본다. 심지어 사람의 죽음까지 뒤에서 사주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옥서 바깥 세상은 15살짜리 소녀의 순수를 감당할 정도로 깨끗하기만 한가. 세도가 윤원형(정준호 분) 앞에서 어린 옥녀를 지켜준 것은 그녀의 천연덕스런 거짓말이었다. 순수하게 윤원형과 그의 애첩 정난정(박주미 분)의 호의를 받아들여봐야 그 집의 노비가 되는 것이 전부였다. 윤원형의 딸로 오해받아 도적들에게 잡혀갔을 때도 전옥서의 가까운 사람들을 제외하고 누구 하나 그녀의 목숨을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서 다시 순진하게 윤원형의 호의에 감사했다면 은혜라는 족쇄가 하나 더 따라붙었을 뿐이다.

도적놈들보다 더 나쁘다. 차라리 화적패들이야 관군이 나서서 토벌도 하고 그 우두머리를 처형도 한다. 그러나 외척이라는 신분을 가진 윤원형은 오히려 그 관군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다. 왕이 머무는 궁궐에서 아무렇지 않게 관리를 폭행하고, 사저에서는 임금을 모시는 상궁을 불러들여 하인들을 가르치게 한다. 드라마에서는 사소하게 지나갔지만 우유를 마음껏 먹었다는 것도 당시에는 중요한 탄핵 사유 가운데 하나였었다. 송아지는 물론 소고기도 원칙상 먹을 수 없었던 조선사회에서 우유를 먹기 위해서는 송아지를 굶기는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이 지나치게 우유를 즐기는 탓에 태어난 송아지가 어미젖을 못먹고 굶어죽은 이야기가 고려사에 실려 있다. 소는 전근대사회에서 농사에 없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노동력이었다. 단 한 사람 지존인 임금만이 소의 고기를 먹고 우유도 먹을 수 있었다.

굳이 구체적으로 무엇이 더 나쁜가 보여주지 않아도 충분했다. 공과 사를 구분할 줄 모른다. 자신의 권력을 주체할 줄 모른다. 뇌물을 바치려 집앞에 줄을 선 사람들은 뇌물을 처벌받거나 최소한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보여준다. 윤원형 자신의 말처럼 어차피 뻔한 녹봉에서 뇌물을 만들려면 무엇을 어찌해야 하겠는가. 전옥서에서도 주부 정대식은 높은 사람들에게 바칠 재물을 만들기 위해 죄수들이 먹는 것을 줄이려 하고 있었다. 나라에서 죄수들 먹이라고 내린 예산을 단지 자신의 보신과 출세를 위해 빼돌려 사용한다. 하기는 옥녀의 양아버지 지천득 역시 그런 식으로 전옥서의 예산을 무려 3백냥이나 빼돌려 사용하고 있었다. 정직한 사람이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람들에 잘 보인 사람들이 출세한다. 그리고 그 높은 사람이란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탐욕스럽고 부도덕한 부패한 무리들이다. 차라리 전옥서의 죄수들이 옥녀를 살리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그런 현실에서 살기 위해서라도 교활해져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지독해져야 한다. 양심을 돌아볼 여유도, 인정에 이끌릴 겨를도 없다. 그만큼 산다는 것은 절박하고 때로 가혹한 일이다. 무엇보다 옥녀 자신의 어미가 윤원형이 보낸 칼잡이들에게 쫓기다 감옥에서 옥녀를 낳고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었다. 누군가 옥녀의 어머니를 죽이려 했고, 어머니는 필사적인 도주 끝에 옥녀를 살리고 목숨을 잃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의 목숨을 대가로 또다른 누군가는 살아간다. 사는 것이 지옥이다. 사는 것이 바로 고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명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세상의 밖에서 낙원을 찾으려 했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런 한가운데서 옥녀는 태어나고 자랐다. 살아왔고 살아간다. 그 의미다.

그야말로 헬조선이다. 죄인들로 가득한 전옥서의 감옥안이 지옥인가. 아니면 윤원형과 같은 세도가가 마음대로 전횡을 일삼는 전옥서 바깥의 세상이 지옥인가. 전옥서 바깥의 세상에서 옥녀의 어머니는 목숨을 잃었다. 전옥서 안에서 옥녀는 태어나 삶을 얻었다. 전옥서 밖의 세상에서 옥녀는 하마트면 목숨을 잃을 뻔했었다. 전옥서 안에서 사람들은 그녀를 걱정해주고 지켜준다. 바로 15살 옥녀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오히려 천진할 정도로 투명한 눈망울이 그 역설을 완성해준다. 아직 어린 정다빈의 연기가 옥녀의 선택을 납득시켜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했었다. 아직 어린 옥녀의 웃음이 해맑다.

그래서 오히려 아쉽다면 연기한다는 사실을 일부러 각인시키는 듯한 정준호와 박주미의 연기였을 것이다. 카메라가 그들을 비출 때 이것은 또다른 사실이거나 현실이 아닌 단지 드라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억지로 일깨우고 만다. 악역으로서의 존재감 역시 드라마의 균형을 잡아주지 못한다. 이들이 더 악해지고 독해져야 옥녀 역시 정당화될 수 있다. 아직은 거의 전옥서 안의 풍경이 거의 대부분이다. 옥녀가 보고 들으며 배운 것들이다. 세상과 만난다. 세상 밖과 만나야 한다. 아직까지는 그저 잠시 스쳐지나는 정도다. 이제 곧 옥녀는 자궁과도 같던 전옥서를 나서야만 한다.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그 세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절묘파게 판타지와 사실의 경계를 오가는 방식은 여전하다. 대부분의 허구를 현실의 상식 위에 어색하지 않게 접붙인다. 사극이라는 느낌조차 없이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성장을 따라간다. 벌써 20년 가까이 올곧게 주장해 올 수 있었던 이유다. 어차피 보편적 다수의 시청자가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재미와 감동의 폭은 매우 좁다. 그러면서도 전혀 새롭게 매번 다른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는 영리함도 있다. 결국 대부분의 시청자가 바라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성공이다. 그 점이 역설적으로 대단하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