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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2.09 09:18

해를 품은 달 "호조판서에게 호통치는 허연우, 조선시대의 무녀가 신분을 잊다!"

여전히 허연우의 비극이 드러나지 않은 채 너무 빠른 설명에 비극에 빠질 여유조차 없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확실히 드라마에 대한 그나마의 몰입마저 깨뜨리는 요소일 것이다. 무녀란 천민이다. 천민이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신분제사회에서 천민이란 사람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신분을 뜻한다. 그런데 하물며 사대부에게, 그것도 육조의 수장에게 눈을 똑바로 뜨고 이래저저래라 하고 있으니.

그 말의 내용이 옳은가 그른가는 전혀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하는 당사자가 천하디 천한 무녀의 신분이라는 것과 그로부터 야단을 듣고 있는 자신이 귀하디 귀한 사대부의 신분이라는 것이다. 천한 신분으로써 길거리에서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 귀한 신분의 자신에게 모욕을 주었다. 당장 죽임을 당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과연 신분에 대한 자각은 있는 것인가?

설사 허연우(한가인 분)에게 사대부가의 규수이던 시절의 기억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녀 자신이 지배층인 사대부가의 일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깊은 학식 만큼이나 사대부가 지배층이어야 하는 논리와 명분에 대해 뼛속깊이 체화하고 있었다. 왕은 왕이고, 사대부는 사대부이고, 천민은 천민이다. 그런데 그런 허연우가 과연 신분질서를 교란시킬 수 있는 그같은 행위를 함부로 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그녀는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 숨어 지내는 처지다. 과거 세자빈을 간택할 당시 그녀를 본 사람이 있을 지 모른다.

허연우에게 과거에 대한 기억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면 그것은 더 말이 되지 않는다. 무녀라고 하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무녀란 얼마나 천한 신분이며 사대부란 그런 천한 무녀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가? 다른 사람들이 머리가 없고 생각이 없어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 또한 당시 엄격한 신분질서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갔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무녀인 허연우는 그리 하는데 다른 백성들은 어찌 그리 하지 못하는가.

비극을 잊게 만든다. 사대부의 딸로써 무녀라고 하는 천한 신분으로 전락했다. 세자빈으로까지 간택되었던 귀한 신분으로 천한 무녀가 되어 왕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다. 신분이란 신분제사회의 근간이다. 굳이 허연욱 세자빈이 되었다가 다시 무녀로 떨어지고 마는 것은 바로 그를 위해서다. 세자빈이라고 하는 고귀한 신분과 무녀라고 하는 비천한 신분을 통해 그녀의 전락과 그녀의 고통과 그녀의 비극을 보다 극대화해 보여준다. 그렇다면 더욱 신분제 사회에서 그녀가 놓인 신분적 한계를 보다 강조해 보여줄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떤가. 하긴 지난주에도 이미 했던 이야기다. 너무 당당하다. 심지어 왕 앞에서까지 무녀인 허연우는 자기 할 말을 다 하고 만다. 조정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권신 윤대형(김응수 분)조차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강채윤이 임금인 세종에게조차 함부로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관대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인 이훤(김수현 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번의 호조판서 윤수찬(김승욱 분)에 대한 그녀의 무모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결국 아무런 대책 없이 나선 결과는 그것을 지켜본 이훤에게 일방적으로 구해지는 그녀의 모습일 것이다.

얼핏 원작에 비해 당당하다. 하고 싶은 말 가리지 않고 다하는 것이 꽤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캐릭터로 보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최소한 원작에서는 드라마에서와 같이 스스로 자초한 위기상황에서 왕이나 양명군(정일우 분)에게 구함을 받는 민폐스러운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선을 지키기 때문이다. 자신의 처지를 알고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말과 행동만을 보이려 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이며 또한 다른 이들에 대한 당당함일 것이다. 그에 반해 허연우의 경우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상황을 곧잘 벌림으로써 다른 이의 도움을 바라는 처지가 되고 만다. 만일 그 장면에서 이훤에 곁에 없었다면 허연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기왕에 시대물로 장르를 정했다면 그에 충실한 것이 옳다. 어차피 조선시대를 시대배경으로 설정했다면 조선시대에 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이 옳다. 굳이 조선시대로 시대배경을 설정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사대부의 딸이었다가 세자빈이 되고 다시 무녀가 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녀가 전혀 조선시대의 무녀같지 않다. 무엇보다 드라마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과연 충실하게 전달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최소한 지금의 허연우는 생각만큼 비극적이지 않은 것 같다.

왕은 스스로 월이라 알고 있던 허연우에게서 허연우의 모습을 찾고, 스스로 월이라 알고 있는 허연우 역시 월이 아닌 허연우만을 찾는 왕을 원망한다. 지금 왕의 앞에 있는 것은 자신인데 왕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쫓고 있다. 차라리 중전 윤보경(김민서 분)보다도 안타까운 상황일 것이다. 최소한 윤보경은 다른 누군가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왕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아도 될 터이니 말이다. 아쉽다면 굳이 그 상황에서 허연우가 그것을 말로써 드러냈어야 했었는가. 조금 더 슬픔이 고조될 수 있도록 잠시의 여백을 둘 수 있지 않았을까.

너무 빨랐다는 느낌이 있다. 왕이 월이라 이름한 허연우에게서 허연우를 찾고, 스스로 월이라 여기는 허연우가 그에 좌절하고 원망하고, 그리고 도무녀 장씨(전미선 분)을 찾아가 액받이 무녀를 그만둘 수 있도록 요청하기까지. 사이를 두고 보다 허연우의 비극에 빠져들도록 여백을 두었으면 어땠을까? 허연우가 상처입고 절망하는 모습을 묵묵히 시청자 스스로 이입하여 느끼며 본다. 하기는 양명군의 고닲은 처지 역시 너무나 상세한 설명이 비극에 빠져들 여지조차 없게 한다. 역시 한 말이다. 너무 상세하다. 너무 친절해서 드라마를 느낄 틈을 주지 않는다.

과연 양명군의 어머니 희빈 박씨(김예령 분)은 양명군을 아끼지 않아 왕의 강녕을 빌고 있었던 것일까? 양명군이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가지고 자기가 갖지 못한 것들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그것은 바로 양명군 자신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아니 아무런 욕심을 내지 않더라도 단지 그러한 신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언제 어떤 일을 당할 지 알 수 없는 것이 왕이 되지 못한 왕자의 처지인 것이다. 물론 그것을 양명군도 안다. 거기에서 양명군의 비극이 비롯된다. 원작과 다른 점이라면 그같은 비극을 십분 이해하고 동정하는 무녀 잔실(배누리 분)의 존재일 것이다.

사실 이야말로 작가의 농간일 것이다. 차라리 허연우가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면 양명군은 그저 그리워하고만 말았을 것이다.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면 홀로 외로워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잔실이 그런 양명에게 헛된 기대를 갖게 만들고 있었다. 결코 그의 사람이 될 수 없는 허연우이지만 잔실로 인해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마침내 마주한 현실은 양명군에게 더 큰 좌절과 절망을 가져다 준다. 원작보다 어쩌면 더 가엾은 처지에 놓이는 것이 다름아닌 양명군인 것이다. 그럼에도 역시 그 비극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드라마가 갖는 한계다. 그나마 잔실은 마지막에 양명군의 비극에 진심으로 울어줄 수 있을까? 그녀만이 양명군을 이해해준다.

아무튼 코미디일 것이다. 신을 모시는 이가 신을 가지고 거짓말을 한다. 신을 모시는 무녀가 신을 모시는 일로 짐짓 다른 사람에게 거짓을 꾸며 말한다. 만일 불교의 승려가 불교의 교리에 대해 그리 말하고 있다면 어찌 하겠는가? 기독교의 목사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임의로 필요에 따라 멋대로 꾸며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기망이다. 신을 섬기는 무녀로써 신에 대한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 말한다는 것은 신에 대한 기망이다. 웃기지 않은가?

원작에서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멋대로 꾸며 이야기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드라마를 지나치게 복잡하게 꼬아 버리는 탓에 도무녀 장씨만 바빠졌다. 그때그때 왕대비(김영애 분)를 속이기 위해 아무렇게든 말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신을 모시는 이가 신에 대해 허황되이 거짓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무속은 종교가 되지 못하고 미신으로 머물고 마는가? 이런 것을 사기라 말한다. 뻔한 거짓말에 속아넘어가는 왕대비가 안쓰러울 정도다. 역시나 너무나도 작위적인 상황들이 말을 필요로 하는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문득 눈에 뜨이는 인형극 관람료 5냥. 냥이란 원래 은을 헤아리는 단위다. 은 한 냥이 동전으로 100문이다. 동전 한 문이 흔히 말하는 한 푼이다. 5냥이면 동전 500푼이 되는데, 시대에 따라서는 그것이 수천푼을 호가할 수 있다. 너무 비싸다. 너무 생각없이 냥이라는 단위를 쓴다.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는 고증에 신경써 주는 것이 판타지인 드라마의 설득력을 높인다. 드라마 자체가 판타지인데 시대의 묘사마저 완전 허구라면 너무 허무해지지 않을까.

한가인의 연기가 많이 안정을 찾아간다. 발성이 제법 사극의 여주인공스럽게 무게를 갖는다. 표정이 아직 많이 아쉽기는 하지만 중심이 확실해지니 드라마도 재미있어진다. 불만을 말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드라마다. 원작도 탄탄하고 영상화도 훌륭하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도 더 강해지는 것이다. 조금만 더 나아진다면. 조금만 더 나아질 수 있다면.

가슴 아픈 비극이다. 왕궁이라고 하는 화려함 속에 일어나는 비극이기에 비극은 더욱 처절하고 비장하다. 그러나 영상의 아름다움이나 캐릭터가 갖는 매력에 비해 그같은 점들이 잘 드러나고 있지 않다. 어쩌면 드라마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음울한 비극보다는 온전히 모두가 즐기며 볼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그것이 무척 아쉽다.

왕 이훤과 양명군의 애증으로 얽히는 관계와 그들 사이에 낀 허연우의 비극, 그리고 점차 허연우가 기억을 찾아가는 가운데 실체를 드러내는 음모와 비밀들. 윤대형의 악의는 더욱 대단해지고 중전 윤씨의 악의는 차라리 애처롭기까지 하다. 잔실의 간절함이 더해진다. 흥미롭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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