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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2.09 09:19

난폭한 로맨스 "마침내 드러나는 범인의 정체, 김동아와 강종희의 사정..."

로맨틱코미디답지 않은 음울한 긴장감이 역설적인 재미를 느끼게 한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문득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마 작가의 재치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배우 하라고 안 그랬어?"

다른 사람도 아닌 80년대 스크린을 주름잡았던 당대의 대스타를 앞에 두고. 바로 앞에 서 있는 여전히 나이가 들어서도 고운 그 이가 다름아닌 당대의 흥행보증수표로 불리우던 배우 이보희였다.

아직 젊었을 적 전성기의 사진과 배우 운운은 그런 점에서 얼마나 절묘한 아이러니를 이루는가. 정작 앞에 서 있는 이는 배우 이보희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배우 이보희일 터다.

시청자와의 약속이다. 그녀는 지금 배우 이보희로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극중 박무열(이동욱 분)의 집안일을 보살피는 이모로서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뒤튼다. 그럼으로써 드라마와 드라마 외적 요소를 모순으로서 이어버린다. 역설이다. 이미 그녀가 이보희임을 아는 시청자로서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재미있다.

김동아(임주은 분)은 상당히 흥미로운 캐릭터다. 마치 자기 일을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흥미로워한다. 하마트면 위험한 일을 겪을 뻔한 상홍에서조차 그것을 남의 일처럼 재미있어한다. 오히려 듣고 있는 김태한(강동호 분) 쪽이 더 긴장하고 더 불안해하고 더 분노한다. 하기는 처음 서윤이(홍종현 분)를 감시하는 역할을 자청해서 맡을 때에도 그녀는 걱정하는 김태한에게 그리 대답하고 있었다.

"내 일이 아니니까 재미있는 거에요."

무언가 큰 상처가 있다. 그 상처가 그녀를 세상과 유리시키고 있다. 어쩌면 서윤이와도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보다 행복한 이를 보게 되면 그것을 부러워하지 서윤이와 같이 맹목적인 증오를 보이지 않는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코 내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좌절이고 체념이다.

부럽다고 하는 것은 대상에 자신을 투사하는 것이다. 동일시하는 것이다. 나였으면 좋겠다.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대리만족하게 된다. 타인의 만족을 통해 나 자신도 만족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그 고리가 끊어진다면? 결코 내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면? 절대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게 된다면? 남는 것은 철저히 타자에 대한 질시와 증오 뿐인 것이다. 차라리 내가 갖지 못할 것이면 부숴버리겠다. 그렇게 원망이 깊다.

따라서 서윤이의 일그러진 자아 역시 현실에 있지 않다. 철저히 현실로부터 유리된 채 방관자로서 심판자로서만 존재하고 있다. 내 것이 아니다. 내 일이 아니다. 내가 아니다. 그런데 저들은 어째서 저리 행복한가? 무엇이 서윤이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마찬가지로 김동아의 의식 또한 현실에서 벗어난 어딘가를 표류하고 있다. 아마 한꺼번에 부모님을 잃은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모를 잃은 댓가로 받은 풍요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고 있는 자신에 대한 혐오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거나 너무나 큰 상처가 그녀로 하여금 현실로부터 도망치게 만든다. 현실로부터 도망쳐 전혀 다른 곳에서 현실을 엿보게 만든다. 자기 자신조차 꿈속에서 마주한 것처럼 현실감이 없다. 내 일이 아닌 것 같다.

김동아의 무위한 삶은 바로 그로부터 비롯된 것일 터다. 무엇을 해도 실감이 없다. 어떤 절실함이나 절박함도 없다. 이대로 어떻게 되어도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다. 꿈인 것을 아는데 꿈속에서 죽음의 위기에 놓였다고 전혀 두려워하거나 긴장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김태한에 대한 감정 또한 어쩌면 반쯤은 장난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고 싶다. 사랑에 빠져보고 싶다.

그런데 김태한이 분노하고 있었다. 김태한의 분노에서 그가 느꼈을 아픔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김동아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김동아 자신의 아픔은 여전히 꿈속에 있을 뿐이지만 김태한을 통해 전해지는 그 생생한 감정들이 그녀로 하여금 꿈에서 깨어나도록 만든다. 누군가 뺨을 아프게 꼬집으며 그 아픔에 잠에서 깨어나듯 김태한의 아픔을 통해 그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김태한이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여전히 꿈에 취한 듯 침대에 눕고 있던 김동아의 모습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 아직 깨어날 때가 안 되었다. 그러나 곧 깨어날 것이다.

김동아와 김태한의 관계가 그래서 흥미롭다. 김동아는 현실 밖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김태한은 현실에 굳게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두 사람이 만난다. 그러나 결국 사람은 꿈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다. 김동아가 김태한에게 이끌린 이유일 것이다. 마치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도 같다. 마침내 현실의 김태한으로 인해 긴 잠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다. 공주는 행복하게 산다.

강종희(제시카 분)는 역시나 아티스트일 것이다. 원래 아티스트 가운데는 에고이스트가 많다. 자기연민에 빠져든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자신을 안타까이 여기고, 그것을 사람들에 알리고 싶어한다. 이모도 말한다. 시란 외로울 때 쓰여지는 것이라고. 강종희 역시 가장 극단적인 감정상태에서 좋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얼마나 가엾은가? 저리 충격받고 상처입고 있는데.

예술이란 그러한 아티스트들의 세상에 대한 투정이다. 응석이다. 알아달라는. 제발 알아봐달라는. 서툴기에 그림을 통해 표현한다. 말로는 부족하기에 음악으로 대신한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대본을 쓰고, 연기를 하고. 제발 자신을 알아달라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한다. 아티스트란 괴팍하다는 편견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만큼 섬세하고 예민하다. 올곧게 순수하게 아이처럼 반응한다. 그런 자신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유은재(이시영 분)에 대한 강종희의 반발처럼.

유은재야 말로 강종희에게 천적이었을 터였다. 6년 넘게 길러온 자신의 고양이가 죽었다. 마치 가족과도 같이 애정을 가지고 대해온 고양이가 범인에 의해 끔찍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충격을 받았다. 공포를 느끼고 공황에 빠졌다. 그런 자신이 불쌍하다. 죽은 고양이도 불쌍하지만 고양이의 죽음으로 인해 상처입고 슬퍼하는 자신도 불쌍하다. 알아주기를 바란다.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람들은 그녀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하고 동정해주고 있다. 그렇게 자기에게 닥친 비극을 즐기고 있으려는데 유은재가 나타나 그것을 조롱하려 든다.

"고양이가 죽어서 슬퍼? 그렇게 슬프면 따라죽던가!"

물론 그럼에도 그러한 자기연민이야 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슬픔과 상처를 딛고 이겨내도록 해주는 일종의 탈출구일 것이다. 슬퍼하기보다는 슬퍼하는 자신을 연민한다. 아파하기보다는 아파하는 자신을 불쌍히여긴다. 자기애를 통해 슬픔과 상처를 잠시 잊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슬퍼하고 아파한다. 그래서 사람은 그렇게 서럽게 목놓아 울고 오래도록 앓게 된다. 아무리 그래도 고양이를 따라 죽으라는 말은 너무 심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또한 그 역시 유은재의 자기연민이었으니. 강종희가 슬퍼하듯 그녀도 슬퍼하고 있다. 강종희가 아파하듯 그녀 역시 아파하고 있다. 강종희로 인해 그녀 역시 슬퍼하고 아파하고 있다. 그래서 알아달라 말하고 싶어 한다. 그 원인을 제공한 강종희에게 당신보다 내가 더 슬프고 아프다. 강종희를 상처입히며 자신도 상처입힌다. 강종희를 원망하며 자신을 원망한다. 아마 그런 것을 느꼈기에 강종희 역시 유은재에게 적대적인, 어떤 경쟁심을 느꼈을 것이다. 지고 싶지 않다.

의외로 닮아 있다. 자기에게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자 스스로 물러나며 그런 자신을 동정하고 마는 유은재나, 역시나 박무열을 위해 스스로 포기하겠다며 자신을 연민하고 있던 강종희나. 강종희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자신을 알아봐주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을까. 더 이상 누구도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자 어느새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었다. 스스로 연민할 수 있을 때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박무열에게 알아봐달라고 보채지 않는 점이 강종희와 유은재의 차이일 것이다. 강종희는 그림을 그리고 유은재는 현실을 견뎌낸다.

어쨌거나 이것으로 강종희 역시 박무열의 감정을 눈치채게 된 것 같다. 박무열이 굳이 유은재에게 강종희의 경호를 맡긴 것이나, 유은재에게 경호를 맡기고 이전과는 달리 마음을 놓고 있는 것이나, 무엇보다 제시카가 입은 상처에 마음놓고 그녀를 타박하는 것 등. 응석을 부리고 있다. 어떻게 해도 유은재가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자신의 곁에 있어주리라는 막연한 믿음에 항상 그랬던 것처럼 제멋대로 떼를 쓰고 있다. 다만 이것이 매우 미묘하게 우회적으로 표현되는 바람에 두 사람의 사이는 전혀 진전이 없는 것 같다. 유은재만이 불쌍하다. 로랜틱 코미디답지 않은 그같은 유은재의 우울함이 드라마의 낮은 시청률의 이유가 아니겠는가.

이미 지난주에 결론은 났다. 박무열은 유은재를 좋아한다. 강종희는 단지 사랑했던 기억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다. 미련이다. 미망이다. 하지만 꿈에서 깨기 위해서는 꿈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꿈을 직접 마주하고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강종희는 꿈이다. 마치 허깨비와도 같다. 마침내 범인으로 밝혀진 이모의 맹목적인 감정처럼.

너무 뻔했다. 반전이랄 것도 없었다. 차라리 진동수의 아내인 오수영(황선희 분)이 범인이기를 바랬던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너무 일찍 노출되었다. 일찌감치 아예 노골적으로 이모가 범인임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그나마 중간에 오수영에게로 혐의를 돌리려는 듯한 연출이 마지막 순간 설마 하며 약간의 놀라움을 갖게 했다. 하지만 그쪽이 훨씬 타당하니까. 반전의 놀라움은 없지만 이제까지의 드라마의 내용에 대한 납득할 수 있는 논리적 개연성은 확보했다. 재미있다.

아무튼 드라마의 가장 큰 단점일 것이다. 로맨스코미디라기에는 너무 우울하다. 스릴러 부분이 너무 섬뜩하게 음울하게 그려지고 있다. 유은재의 사랑 역시 답답할 정도로 우울하다. 해피엔드가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있지만, 일주일 단위라는 시간의 간격은 그것을 견디기 버거워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필자로서는 무척 재미있는 이유겠지만 말이다.

전통적인 로맨스의 문법을 밟고 있다. 그러면서도 스릴러의 기본에도 충실하다. 캐릭터의 입체적인 완성도 역시 탁월하다. 그러나 대중적인 관심과 흥미를 끌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런 이유들이 드라마를 재미있게 한다. 역설일 것이다. 재미없지만 재미있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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