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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2.07 08:59

샐러리맨 초한지 "유방의 통렬한 질타, 그러나 제목이 '초한지'인 이유..."

시대는 21세기이지만 기업문화와 사고는 초한지 시대에 머무른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아니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도 없으셔요? 여기 회장님을 위해서 목숨 바쳐 일할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요? 한 명도 없어요. 왠 줄 알아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다 잘리는데 누가 회장님을 위해 목숨바쳐 일하겠요? 나 같아도 안하겠어요.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도 그러는 게 아니에요. 잘못된 게 잇으면 잘못됐다고 회장님께 말씀드리는 게 도리지 앞에서는 그냥 아부하고 뒤에서는 욕하는 게 비싼 연봉 받고 할 짓에요, 그게?"

최항우(정겨운 분)의 취임식 자리에서 유방(이범수 분)이 진시황(이덕화 분) 회장과 모인 임원들에게 내지른 일갈이다. 얼핏 무언가 있어 보이는 꽤나 그럴듯한 말들로 채워져 있기는 한데, 글쎄... 그 내용을 가만 보고 있으면 어째서 드라마의 제목이 <초한지>인가를 깨닫게 된다.

묻고 싶다. 과연 회사의 임직원이라는 것이 회장 개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인가? 회장 개인을 위해 목숨바쳐 일하는 사람들을 회사의 임직원이라 부르는가? 회장에 대한 충고나 조언 역시 회장 개인을 위한 회장과의 의리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업무상 직분에 따른 것인가?

90년대 말 한창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보그룹 관련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불려나온 당시 한보그룹의 회장 정태수씨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기고 있었다.

"머슴들이 뭐 알겠노?"

과연 당시 기업가들이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는 사원들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엿볼 수 있는 훌륭한 한 예일 것이다. 대등하게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회사의 한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고용되어 임금을 받는 댓가로 시키면 시키는대로 따라야 하는 '머슴'으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기는 그래서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사람들을 두고 '남의 돈 먹는 게 쉽지 않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일한 만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는 만큼을 일하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개념이다.

바로 드라마에서 묘사되고 있는 경영자와 임직원과의 관계일 것이다. 아니 심지어 주주들에 대해서조차 마치 경영자인 진시황 회장과 다른 판단을 내린 것을 두고 무슨 큰 배신이라도 한 양. 주주와 경영자라는 것이 배신하고 말고 할 의리로 엮인 사이이던가? 주주는 이익을 발고 기업에 투자하고, 경영자는 그들로부터 투자를 받아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최대한의 이익을 돌려준다.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주식을 사고, 그러한 기대가 없을 때 주식을 판다. 철저한 비즈니스의 관계인 것이다. 그런데 진시황 회장이 회사에 손해를 끼치려 하고 있는데 손 놓고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임직원 역시 마찬가지다. 결코 거저 남의 돈을 받아먹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 고용해주는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임금을 지급해 주는 것도 아니다. 필요해서 고용하고 따라서 일한 만큼의 댓가를 지불한다. 그 이상 일할 의리도 없고, 그것을 요구할 권리도 없다. 목숨을 바쳐야 할 일도 없고, 더구나 그 대상이 경영자 개인이어야 할 까닭도 없다. 설사 목숨을 바칠 일이 있더라도 그 대상은 내가 생계를 꾸려가는 직장 자체가 되어야 한다. 회사가 나를 먹여살리는 것이지 사주나 경영자가 나를 먹여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댓가로 나는 나 자신의 노동력과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데 그것이 안되니까. 사주는 회사를 세웠고, 경영자는 회사를 경영한다. 그래서 사람을 뽑아 고용해준다. 월급도 준다. 그러니까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 충성을 바쳐야 하고, 헌신을 다해야 하고, 그리고 회사가 요구한다면 기꺼이 자신을 내버려야 한다. 회사를 위해 그만두라 하면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다. 때리면 맞고, 모욕을 주면 기꺼이 당해주고, 성희롱도 참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어떠한 대우를 하더라도 고용해주고 월급을 주는 것이 회사이기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요즘처럼 취직하기 힘든 불경기라면 말할 것도 없다.

어째서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운동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가? 드라마에서 보이는 것처럼 공장노동자들과 함께 사용자와 공권력에 맞서 싸운 유방조차 저와 같은 말을 당연하다는 듯 내뱉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앞서도 언급한 '남의 돈 먹는 것'이라고 하는 표현이다. 내가 일한 만큼의 임금을 받는 것인데 그것을 사용자의 주머니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내가 기여한 만큼의 댓가를 누리는 것인데 그것이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 여긴다. 그러니 그에 보답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사용자와 기업에 대항하는 노동운동이란 얼마나 불손한 것인가?

그런 점에서 드라마에서 한 가지 장면이 빠져 있었다. 뉴스에서 그러다 기업이 손해보면 어쩌냐며 국가경제를 걱정하는 시민의 인터뷰가 나왔어야 했다. 오히려 같은 회사내 노동자들이 그런 천하메디 인천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비판하고 적대시하는 장면도 나왔어야 했다. 최항우의 말 그대로다. 어지간히 과격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이 성공적으로 끝나는 경우란 거의 없다. 시민과 공권력마저 사용자의 편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유방은 회장에 대한 충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임직원은 회장에게 충성해야 하고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회장이야 말로 어리석다고. 어째서 임원들이 그 회장에게 충언을 들리지 않는가고. 신하들인가?

그래서 <샐러리맨 초한지>였던 것이었다. 비단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중국의 고대소설 <초한지>에 나오는 항우와 유방, 여치, 우희, 장량, 소하, 범증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인물들의 관계가 소설속의 그것을 떠올리게 만들어서도 아니다. 드라마 전반에 흐르는 사고들이 그 시대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회장 진시황은 말 그대로 천하그룹이라고 하는 기업의 절대군주였다. 그리고 그 아래 장량(김일우 분)과 소하(유형관 분), 범증(이기영 분)은 그의 신하였다. 백여치(정려원 분)은 공주이며 군주의 후계자였다. 그러니까 회사에서 밀려나 자살한 것을 두고 최항우가 진시황을 향해 버림받았느니 복수하겠느니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나라다. 봉건적인 신분질서가 지배하고 있는 전근대의 국가와 같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의 대한민국과 이어진다.

과연 아닐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진시황 회장의 후계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미 죽은 둘째아들 호해와 외손녀 백여치를 떠올렸을 것이다. 유방이 백여치와 가까워질 때 유방의 신분상승을 예감했을 것이다. 최항우가 악역인 이유도 공권력까지 동원해 무력으로 공장노동자들을 진압한 진시황 회장이 유방의 진가를 알아주는 큰 인물로 그려지는 이유다. 천하그룹은 어디까지나 진시황 회장 개인의 것으로써 그것을 부당하게 노리는 최항우는 악역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그래서 비서실장 모가비(김서형 분) 역시 악역으로 묘사된다. 여전히 진시황 회장에게 복종하고 있는 장량과 최항우의 편에 선 범증의 대비처럼.

그같은 부분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번의 진시황 회장의 병일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경영자로서 치명적인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아 결제서류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는데 과연 신제품이 나오고 현장을 둘러볼 때 제대로 판단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했을 것이다. 점자라든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다양한 조치들이 있을 수 있다. 눈에 이상이 있어도 그 능력이 탁월하다면 그에 맞추던가, 아니면 보다 더 잘 회사를 경영할 수 있는 사람에게 경영자로서의 책임을 넘기던가. 그런데도 그 와중에 하지 못한 일이 있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회사일이라고는 이제 겨우 막 시작한 외손녀 백여치에게 경영권을 넘기려 후계자수업을 시키고 있다. 정상인가?

그것이 전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보여지고 있다는 것이 더 문제인 것이다. 전혀 이상하다거나 거슬리는 것 없이 진시황 회장은 회장이다. 비록 일방적이고 협박까지 동원되어지기는 했지만 어찌되었거나 대화로써 풀어가려는 최항우를 젖혀두고 공권력까지 동원해 무력으로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한 진시황 회장의 모습과 어느새 자신에게 직언을 한 유방을 눈여겨보고 장량에게 지켜보라 지시하는 진시황 회장의 모습 사이의 위화감을 채워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회장은 왕이다. 군주다. 사원은 신하다. 반란군은 잔인하게 진압한다. 대신 인재는 우대한다. 그리고 외손녀에게 후계자를 물려주려는 진시황 회장의 의지와 노력은 마치 어린 단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노심초사하는 문종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인간적으로 장점이 많은 진시황 회장이다.

의도한 것일까? 아니면 작가 역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여기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하기는 그러니까 백여치는 회장의 외손녀인 것이다. 유방은 그 외손녀인 백여치와 가깝다. 그리고 그 유방을 뒤에서 도와주는 것이 진시황이다. 반역이라도 일으키면. 반역이 일어나며 백여치는 최대주주로써 뒤로 물러나고 전문경영인이 책임을 지고 회사의 경영을 맡는다. 실력있는 인재들이 주주들에 의해 자기 자리를 찾아 회사를 책임지고 이끌어나간다. 백여치와 결혼한 유방이 천하그룹의 회장이 된다면 얼마나 실망스러울까? 그러나 그 또한 어쩌면 샐러리맨의 판타지일 것이다.

차마 민망해서 계속 보고 있기가 불편했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저런 것들이 아직까지도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정서겠구나. 그동안에도 기업을 소재로 한 많은 드라마에서 결국 후계구도 싸움이란 왕자와 공주들 사이의 싸움이었다. 혈연이 계승의 전통성을 담보한다. 그래서 기업경영자란 현대사회의 군주이며 왕족이고 귀족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 드라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나저나 과연 원래 신제품을 개발하고 있던 것은 천하메디 인천공장의 오광(이희도 분) 공장장이었을 텐데, 더구나 회사에서 회사내 비품이나 예산을 사용해 제품을 개발했다면 그 권리 역시 회사에 귀속된다. 그런데 그것을 유방이 임의로 가지고 돌아다니며 투자를 받고 제품화를 시도한다? 역시 이 또한 진시황 회장의 배려로밖에는 볼 수 없다. 어찌 되려는지. 허점이 많다.

유방과 최항우의 역할 또한 제목 그대로 주인공과 그와 대결하는 악역으로 굳혀지고 있다. 오히려 백여치라는 줄을 잡은 기득권에 가깝던 유방이 공장노동자들과의 파업을 통해 약자의 이미지를 굳히더니, 최항우는 그것을 진압함은 물론 그 과정에서 동원되었던 팽월과 한신마저 배신함으로써 악인의 모습을 완성해가고 있다. 사실 그래서 더 문제기는 하다. 오히려 최항우와 더 가까운 유형의 인물인 진시황이 유방의 뒤에 있으니. 드라마의 모순이고 현실의 모순일 터다. 흥미롭다.

차우희(홍수현 분)와 유방과 최항우와의 삼각관계도 역시 흥미롭다. 차우희의 유방에 대한 감정은 고마움과 우정, 그리고 아마 약간의 호감? 그에 비해 최항우에 대해서는 이성으로써 좋아하는 것 같다. 최항우 역시 그런 우희를 좋아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두 사람 사이는 틀어질 것인가? 그리고 백여치와 유방의 관계 역시 진시황 회장의 병으로 인해 더욱 중요해진다. 사극으로 말하자면 부마이며 공주의 남편으로 왕위계승권을 갖는다. 그러면 또 우희의 선택이란 무엇이겠는가?

진지한 가운데 웃음을 놓치지 않는다. 드라마의 미덕이다. 살벌하기까지 한 기업내 권력투쟁과 코믹한 인물들간의 로맨스, 그런 가운데 잔잔히 흐르는 묵직한 주제의식, 다만 이번의 실수아닌 실수가 진짜 실수가 아니라면 기대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과연. <초한지>임을 느끼게 한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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