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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사회
  • 입력 2012.02.03 20:37

'나꼼수'와 비키니 논란 "여성의 몸이란 성적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성적 대상으로서만 여성을 대하려는 무지와 야만에 대해!

▲ 사진출처 - 나와라 정봉주 국민운동본부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어째서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벗지도 못하는가? 내가 타고난 나의 몸인데 어째서 그것을 가리지 않고 감추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행위가 되는가? 내게 벗을 자유를 허락하라.

사실 알몸시위는 역사가 상당이 오래다.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한 가지는 옷을 벗음으로써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더불어 옷이라고 하는 허위를 벗어던짐으로써 자신의 순수하고 솔직한 진심을 보다 강조해 전할 수 있다. 특히 결백을 주장할 때 그래서 옷을 벗고 나서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현대의 알몸시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옷이란 관습이다. 그리고 권위다. 질서다. 어떤 옷을 입는가에 따라 그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된다. 성별과 계급, 직업, 신분등이 옷을 통해 드러난다. 옷을 벗는다고 하는 행위는 그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원초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와 같은 허위와 가식을 강요하는 사회의 질서에 대한 통렬한 저항인 동시에 가장 강력한 자신의 순수한 의지에 대한 표현이다. 무엇으로부터도 구속되지 않고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자신에 대한 표현이며 주장이다. 그만큼 자신의 의지는 강하고 순수하다. 옷을 벗고 알몸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강력한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옷을 벗는다고 해서 반드시 그 행동에 대해 성적인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인간의 몸이란 단순히 성적인 대상이기만 한가? 성욕을 느끼고 성욕을 투사하는 대상이기만 한가? 오히려 그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 성적인 대상이 아닌 오롯한 자기 자신, 자신이 타고난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자유롭고 가장 당당한 자기 자신이고자 한다. 그것은 해방이다. 그러한 관념과 구속으로부터도 자유롭고자 하는 진정한 해방인 것이다.

여성과 알몸시위가 결부되어야 할 이유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알몸이 되는 순간 여성이라는 성별조차 사라진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단지 개인이 있고 그 개인의 가장 순수한 원초상태의 몸과 그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거기에 성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수치심을 말하는 자체가 그에 대한 큰 모독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여성을 성적으로밖에는 보지 못하는가?

이번 '나는 꼼수다'와 관련한 '비키니' 논란의 핵심이다. 과연 여성의 '비키니'라는 것이 비단 성적인 대상이기만 한가? 과연 비키니를 입고 사진을 찍어 인증하는 개인들이란 성적인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그와 같은 사진을 찍고 사람들에 보이는 것인가?

물론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알몸을 드러내는 본질과 더욱 가까이 닿아 있다. 발칙한 것이다. 김어준의 말마따나 발랄한 것이다. 엄숙함을 벗어던지려 한다. 진지함을 조롱하려 한다. 그러한 자유로움이야 말로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되지 않는 솔직한 자신을 의미한다. 그 의지를 드러낸다. 이보다 더 강력한 개인의 의지란 어디 있을까? 그를 위한 수단이 된다. 자신의 몸이란 자신을 위한 수단이며 목적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성적 수치심을 강조한다. 오히려 그것이야 말로 희롱이며 모욕이다. 모피를 반대하기 위해 알몸이 되어 모였는데 성적인 의미만을 강조하고 그들에게 성적 수치심을 말하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깡그리 무시한 채 오로지 성적인 대상으로서만 그들의 몸을 보고 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그 순간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성희롱이다. 알몸인 것이 성희롱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몰아가는 그 자체가 성희롱인 것이다.

비키니가 문제가 아니다. 비키니에서 성적인 의미를 찾는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비키니를 오로지 성적인 의미로서만 이해하고 접근하려 하는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사실 그것이야 말로 '나는 꼼수다'가 비판받아야 할 이유일 것이다. '정력감퇴제'와 '코피 팍!' 과연 그러한 말들이 성적인 의미를 배제한 오롯한 순수한 개인의 의지라 말할 수 있을까?

여성이어서는 안된다. 성적인 대상이어서는 안된다. 그러고자 옷을 벗는 것이 아니다. 옷을 벗는다고 하는 것은 가장 순수하며 가장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이다. 그 순간 여성이라는 성별조차 잊는다. 단지 여성의 신체를 지닌 한 개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이용하려 한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 성적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강조한다. 듣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성적인 의미를 두고 그로 인해 수치심마저 느낄 수 있는 행위다. '비키니' 자체는 문제가 아닌데 그것을 굳이 성적인 의미로 희화하려 한 '나는 꼼수다'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비키니'야 어떤가? 수영장이며 해수욕장 가면 질리도록 보는 것이 바로 비키니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신기할지 몰라도 나중 가면 별 의미가 없다. 아마 누드촌이 있어 거기에서 일상을 보내야 한다면 처음에는 어떨지 몰라도 나중에는 그조차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고 하와가 자신의 치부를 가렸듯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순간 성적 의미가 부여된다. 수치스러운 것이 되고 추악한 것이 된다. 결국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굳이 그것을 여성주의와 결부짓고. 오히려 여성주의자라면 신체의 해방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어째서 여성은 자신의 몸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을 가리기 위해 억압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러나 분명 그것을 성적으로 소비하려 한 의도는 여성주의 입장에서도 비판할 여지가 있다. '비키니'가 잘못이 아니다. 그것을 표현한 '나는 꼼수다'의 수단이 문제인 것이다.

이번 만큼은 '나는 꼼수다'가 잘못했다. 오히려 개인의 순수한 의도를 그럴 뜻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충분히 모욕하고 있었다. 성적인 대상이 되어 회화된 여성의 입장에서 충분히 불쾌감과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표현들이었다.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아니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잘못했다.

하여튼 아직까지도 한국사회에서는 알몸시위와 같은 적극적인 표현방법은 무리라는 이유일 것이다. 여성의 신체란 아직까지도 한국사회에서는 성적 의미로밖에는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꼼수다'를 비판하는 입장도, 그들을 옹호하는 입장도 전보 그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다. '나는 꼼수다'야 말로 그러한 현실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달까? '나는 꼼수다'의 자유란 성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성적인 욕망을 표현하는 자유에 불과했다. 흥미롭지만 적절치는 못했다.

섹스를 위해서만 인간의 몸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만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은 결코 아니다. 안타까운 논쟁일 것이다. 고작 '비키니'가 논란의 중심에 선다는 것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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