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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4.01 07:37

로열패밀리 - 죄와 분노, 인간의 증명

점입가경, 아직도 남은 것들이 많다.

 
“지훈이라면 날 심판해도 좋아요. 그 애라면 그럴 자격이 있죠.”

한지훈(지성 분)은 김인숙(염정아 분)의 마지막 남은 양심이다. 그녀의 죄이며 또한 속죄이기도 하다. 인간으로서의 그녀를 붙잡아 줄 구원이다.

어떤 사연이 있는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한지훈 앞에서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느샌가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 있는 그녀의 모습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한지훈이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 시절, 그녀의 불행했던 과거와 닿아 있을 것이다.

드디어 하나하나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한다. 두텁게 감싸고 있던 비밀의 껍질이 벗겨지며 발갛게 참혹했던 시간들이 드러나려 한다. 용산미군부대를 중심으로 주한미군을 상대하던 성매매여성들 - 이른바 양공주들.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 JK라고 하는 대한민국의 부와 권력의 정점에서 이 순간 만나려 하고 있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포주 강미자에 의해 길러지고, 아마 필경 그 강미자에 의해 그녀 또한 그런 가운데 속해 있었으리라. 존 헤이워드의 아버지 윌셔 헤이워드와의 관계도 그렇게 추측이 가능하다. 당시 미군부대 근처의 여성들에게 있어 주한미군과의 결혼과 이민은 거의 유일한 절망에서의 탈출구였을 테니까. 그리고 아주 소수의 운이 좋았던 여성들마저도 그다지 미국에서의 삶이 순탄치는 못했었다.

아무튼 곰인형이 마침내 열쇠가 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 고아원에 들어가면서 한지훈이 가지고 있었던 곰인형과 김인숙으로부터 받은 또 하나의 곰인형, 그리고 조니 헤이워드가 가지고 있던 곰인형. 그것이 또 하나로 이어지며 한지훈으로 하여금 직접 사건을 추적하게 만든다. 김인숙에 대한 의심과 불안을 한 구석에 묻어둔 채 한지훈이 찾아 나서게 된 사건의 진실은 또한 그의 과거이기도 하다.

어느 약국에서 문득 떠올리게 된 기억처럼 그렇게 과거는 현재로 이어지기 시작한다. 묻혀 있던 기억들이 깨어나며 과거의 불행한 기억은 다시 한 번 김인숙 앞에 나타나게 된다. 여전히 악의를 숨기지 않은 채 탐욕을 드러내며 그녀에게 다가서는 강미자는 그녀가 묻어두고 싶었던 아픈 기억이며 또한 죄악의 증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지훈은 그 강미자에게 다가가려 한다. 곰인형과 김마리라는 이름을 단서로.

한지훈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일깨우게 되는 죄의식. 그 죄의식은 그녀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인간이라고 하는 마지막 증명이다. 한지훈 앞에서는 한없이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리고 진실을 알아가는 한지훈에게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차라리 한지훈에게라면 - 언제고 한지훈에게 죄에 대한 심판을 받겠지만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알리고 싶지 않다. 바로 그 때를 최대한 늦추고 싶다. 아마도 그것은 한지훈과 함께 있음으로써 느끼게 되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보다 오래 느끼고 싶은 욕심이 아니었을까? 한지훈마저 돌아섰을 때 그녀는 가장 추악한 괴물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역시 만만치 않다. 로열패밀리는 로열패밀리다. 천한 고아출신이 함부로 끼어들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김인숙의 너무 빠른 성장이 도리어 공순호(김영애 분)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로열패밀리로써의 동류의식이 어느새 ‘저것’이 되어 한 쪽으로 밀려나 있던 첫째며느리 임윤서(전미선 분)를 다시 끌어올리도록 만든다.

“너야 뼛속까지 로열패밀리니까 잘 알 것 아니냐? 그애가 올라갈 수 있는 한계를 말이다. 때가 되면 저절로 네 자리를 찾게 돼 있어. 그러니 때를 기다려.”

같은 로열패밀리로써 임윤서가 공순호와 싸우는 방법은 김인숙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당당하면서도 단호하다.

“제가 정가원의 안주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제대로 보여주세요. 아니면 정가원 역사상 처음으로 이혼한 자식을 남기시게 될 거에요.”

친정인 구성을 통한 비자금 세탁과 로열패밀리로써의 명예에 관계된 이혼이라는 카드. 그녀는 같은 로열패밀리로써 공순호의 약점을 안다. 아니 공순호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임윤서가 자신에게 내세울 수 있는 카드들을. 그래서 그녀를 ‘저것’이라 말하고서도 그녀가 언제고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임윤서와의 협상에서 공순호는 전혀 어떤 불쾌감이나 거부감을 내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로열패밀리 사이에서의 유효한 소통방식이다. 그것을 공순호는 인정한다.

차라리 김인숙과 한지훈을 배제하겠다. 아니 조현진(차예련 분)마저도 한지훈과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으면 염두에 두고 있던 후계자 자리에서 배제하겠다.

“정가원이 아니었으면 능력껏 성공하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예쁘게 살았을 아이입니다. JK사람인 것이 독이 되는 아이죠.”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JK. 그리고 정가원. 자식에 대한 사랑마저 그것을 전제할 때 의미가 있다. 가족간의 관계란 오로지 그것을 전제하여 존재한다. 그래서 그토록 김인숙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 테지만. 사적으로는 시어머니와 둘째며느리이겠지만 JK를 이끄는 총수로써, 그리고 정가원의 주인으로써 김인숙을 결코 받아들일 수 있는 출신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혈연보다 우선한다.

김인숙이 JK와 정가원에 갖는 증오심도 그에 기인한다. 그녀는 철저히 소외되었다. 배제되었다. 인간이 아니었다. 한지훈에 대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언제고 심판을 받으리라 무한한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도리어 JK에 대해 거리낌없이 악의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래서다.

어쩌면 한지훈과 JK란 김인숙이라는 한 개인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인지도 모르겠다. 한지훈은 그녀의 죄이며 속죄다. 그런 한 편으로 JK는 분노이며 증오이고 JK를 향한 악의야 말로 그녀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한지훈에 대한 애정과 속죄가 그녀의 양심이라면 JK에 대한 증오는 그녀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이다. 죄의식과 그리고 분노.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일 것이다. 고아로써 살인자의 누명까지 쓰고 가장 비참한 지경에 내몰려야 했던 한지훈과 대한민국의 부와 권력의 정점에 있는 JK. 죄와 탐욕. 속죄와 증오. 원죄와 구원. 마치. 마치.

아무튼 흥미롭다면 어느새 드러나는 공순호의 약점일 것이다. 변호사 김태혁(독고영재 분)과의 대화에서 공순호는 그녀의 죽은 남편이자 JK의 창업주인 조경탁과 김인숙과의 관계에 대한 의혹과 증오를 내비친다. 공순호의 김인숙에 대한 감정이 단순히 JK와 정가원에 대한 애착 때문만은 아님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김인숙을 떨어뜨리기 위해 지주회사를 바꾸는 과정에서도 그 결정을 점장이인 청운거사에게 묻고 있었다. 청운거사는 이미 김인숙에게 포섭된 바 있다. 철저히 비밀을 지키고자 했던 그녀의 의도는 여기에서부터 파탄이 난다. 의외의 인간적인 부분이었달까? 그동안도 줄곧 내비쳐 온 부분이었기에 거부감 없이 이야기의 전개를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어느새 강충기(기태영 분)를 대신해서 조니 헤이워드의 죽음을 둘러싸고 곰인형의 존재를 추적하는 한지훈, 그리고 마침내 이태원의 하우스에서 집사장 엄기도(전노민 분)를 마주치게 된다. 점차 드러나는 김인숙과 한지훈 사이의 비밀들. 김인숙과 조니 헤이워드와의 관계와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점차 첨예화되어가는 김인숙과 공순호와의 싸움. 아마 그 사이 사람도 몇 죽어나갈 것 같다는 예감도 드는데. 최소한 한 사람은 죽을 것 같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겠느냐는 강미자의 말은 예언이었을 것이다.

항상 김인숙이 속죄를 말하는 자리가 종교와 관련된 장소라는 것은 의미가 깊다. 성당이거나. 혹은 그녀가 숨고는 하는 십자가가 있는 좁은 방안이거나. 속죄란 그런 점에서 상당히 종교적인 코드이기도 하다.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인간의 증명이라는 원작의 제목에 대해서. 그러나 드라마는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그것을 풀어가고 있지 않은가. 죄의식과 그리고 분노. 속죄와 증오. 그리고 그 가운데 존재하는 존엄에 대해서. 그리고 존엄에 의한 또다른 상실에 대해서도. 김인숙은 참으로 근래 보기 드문 복합적이면서도 매우 매력적인 캐릭터라고나 할까? 인간 그 자체다.

사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다. 어느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스토리이고 전개다. 범인을 알고 범죄수법도 안다. 그러나 그것을 추적해가는 과정이 재미있다. 몰라서 알아가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알고 있기에 그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진진하다. 얼마나 잘 쓰느냐에 달려 있지만. 알고 있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써내기란 쉽지 않다.

아직 한참 남은 것 같은데. 그런데 벌써 여기까지 와 버렸다. 한참을 온 것 같은데 또 한참이 남았다. 전에도 말한 바 있다. 마치 대하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대하드라마를 누르고 눌러 압축한 농축액을 들이키는 것 같다. 독하고 아리다. 그리고 취한다. 드라마에 취해 버렸다.

다시 일주일이 남았다. 항상 목요일이 지나고 나면 남는 아쉬움이고 가지는 기대다. 다음주는. 다음 회는. 벌써 10회를 넘어갔는데도 여전히 모르겠고 알고 싶다. 흥미롭고 기대가 된다. 고문이다. 기다린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린 기다림이다. 기대어린 두근거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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