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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1.30 08:29

나는 가수다 "적우의 적응과 '나는 가수다'가 있어야 하는 이유..."

가수는 무대를 통해 만들어진다. 가수는 무대 위에서 살아간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최근 <나는 가수다>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흐뭇해진다. 불편하던 경연마저 어느새 보고 있는 것이 즐겁다. 가수 '적우' 때문이다.

그렇게 즐거워한다. 그렇게 고마워한다. 한 눈에 보인다. 얼마나 음악을 즐기고 무대를 고마워하는지. 얼마나 노래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관객들과 마주하는 것을 고마워하는지. 다른 가수의 무대에 대해서도 항상 설레어하며 집중해 듣고 있다. 어쩌면 적우야 말로 <나는 가수다>가 존재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신효범이나 김경호나 박완규, 거미, 빅마마, 이현우 모두 과거 <나는 가수다>보다도 몇 배 더 큰 무대에도 서봤던 이들이다.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들이었다. 몸이 하나라서 스케줄을 다 소화하지 못했었다. 모두가 그들의 노래를 듣고 싶어 했다. 그들의 무대를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들의 무대에는 항상 많은 관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오로지 그들의 노래를 듣고, 그들의 무대를 보고자. 그러나 적우는 아니었다. 적우는 데뷔연차에 비해 그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 드물 정도로 철저히 비주류의 길을 걸어왔었다. <나는 가수다>와 같은 무대는 생소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적우의 가창력논란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나는 가수다>와 같은 큰 무대에 대한 경험이 적다. 수백의 청중이 집중하며 듣고 있는 가운데 노래를 불러본 경험도 그다지 많지 않다. 익숙지 않은 무대이기에 실수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가장 큰 실수는 청중들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그 평가를 들어야 하는데 워낙 대중과 큰 접점 없이 비주류 가수의 삶을 살아 오다 보니 그에 대한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과연 대중은, 눈앞의 청중은 적우라고 하는 가수에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듣고자 하는가. 시행착오가 일어난다.

가수란 원래 무대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수가 되어 무대에 서는 것이 아니다. 무대에 섬으로써 가수가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랬다. 연예기획사에 연습생으로 들어가서 체계적인 매니지먼트 아래 데뷔하는 요즘과는 달리 예전에는 일단 가수가 되고자 하면 직접 무대를 찾아가 몸으로 부딪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최근 MBC의 드라마 <빛과 그림자>가 그런 모습들을 잘 묘사해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지방에서 서울로, 변두리에서 중심부로, 비타임에서 골든타임으로, 술에 취하고 시비거리를 찾는 불량한 관객 앞에서 무대 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몸으로 배운다. 그렇게 긴 무명시절을 무대 위에서 단련되고 나서야 비로소 한 사람의 가수가 데뷔할 수 있었다. 물론 운이 좋아 바로 데뷔하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경우다.

당장 세계의 대중음악을 보더라도 그렇다. 작은 클럽무대가 활성화되어 있다. 가수가 되고자 하는 지망생들은 먼저 그런 작은 무대부터 문을 두드린다. 그러면서 조금씩 인지도를 쌓아가며 더 큰 무대로 옮겨간다. 그러한 많은 무대경험이야 말로 그들의 가장 큰 음악적 자산이 된다. 데뷔부터 하고 무대에 서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 서는 것이 데뷔이고, 무대 위에서 성장하여 마침내 대중 앞에 서게 된다. 자연스럽게 큰무대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대중과 소통하는 방법도 배운다.

하지만 과연 지금 대한민국 대중음악계는 그러한가? 직접 가수들을 찾아가 무대를 즐기는 사람도 적고, 당연히 가수들이 설 수 있는 무대도 턱없이 적다. 제대로 준비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가 너무 적다. 그나마 방송을 통해 이름을 알린 인지도 있는 가수의 경우에는 행사라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비주류 음악인들의 경우는 설 수 있는 무대 자체가 한정되어 있기에 더욱 대중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고리 속에 있는 것이다. 가수가 무대에 서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다.

그런 점에서 적우의 <나는 가수다>에서의 적응은 눈여겨 볼 만하다. <나는 가수다>가 유일한 스케줄이라 할 정도로 철저한 비주류 음악인이었다. 설 수 있는 무대 자체가 적었다. 그런 적우에게 <나는 가수다>라고 하는 큰 무대가 주어졌다. 그녀의 노래를 집중해 듣는 수많은 청중과 그리고 기라성같은 선후배 동료가수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좌절하기에는 음악을 너무 좋아한다. 비판과 비난들에 마냥 위축되기에는 음악을 너무 사랑한다. 바로 그 결과가 지금 보이는 그대로 어느새 몰라보게 달라진 '대중가수' 적우인 것이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대중과 거리도 있고 어색한 것도 있었지만 이제는 제법 대중이 자신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 자기의 어떤 점이 대중들에 어필할 수 있는가도 안다. 항상 즐거워하는 그녀의 표정은 그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다. 더 이상 대중이 무섭지 않다. 무대가 두렵지 않다. 대중은 적이 아니다. 그녀의 노래를 들어주는 잠재적 팬들이다. 그녀의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들이다.  이번 13라운드 1차경연은 그러한 결과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 적우가 굳이 김현식의 '어둠 그 별빛'을 그와 같이 전반부와 후반부를 다르게 편곡한 이유는 그녀의 인터뷰 내용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서럽도록 외로울 때 밤하늘의 별빛은 위로였다. 사무치도록 슬픈 외로운 노래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밤의 어둠과 별빛에서 그대의 손길과 숨결을, 희망과 위로를 찾는다. 슬픈 가운데서도 희망을 찾아 노래하려 하고 있다. 적우의 목소리에서는 그러한 본능적인 환희가 느껴진다. 아니었을까?

필자는 그렇게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적우 자신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적우가 아니다. 그동안 그토록 숱한 비난과 질책 속에 좌절하고 괴로워하면서도 끝내 음악에 대한 사랑과 무대에 대한 열정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그녀 자신의 이야기였다. 대중의 잔인하도록 냉혹하고 적의어린 반응조차도 이제껏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한참 비껴나 있던 그녀로서는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아프지만 고마운 것이었다. 그것을 노래한 것이다. 그조차 기쁨임을. 행복임을. 그렇게 믿는다. 나이를 잊게 만드는 순수한 웃음처럼 그것이 그녀의 진심이었을 것이라고.

박완규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그렇게 술생각이 간절했다. 김목경의 원곡은 이제 막 세상을 떠난 아내를 보내는 마지막 인사와도 같았다. 김광석의 리메이크는 시간이 흘러 어느새 아내의 무덤을 찾은 노신사의 넋두리였을 것이다. 그에 비해 박완규의 노래는 어느날 술이 불콰해져서는 목놓아 우는 어느 늙은 사내의 하소연이었다. 그렇게 보채며 울다가 지쳐 쓰러져 잠이 들면 뒹구는 술병 사이로 남자의 눈물이 바닥을 적신다. 깨어나면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가슴에 묻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것이다.

소주보다는 막걸리일까? 안주도 없이 마시는 탁배기였을 것이다. 취하는 줄도 모르고 취하고, 그리워하는 줄도 모르고 그리워하고, 우는 줄도 모르고 울다가, 자는 줄도 모르고 자고, 다시 깨어나서는 아무일 없는 것처럼 그렇게 견디며 살아간다. 세월을 견딘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다. 그리움을 견디며 쌓아가는 것이다. 외롭고 고단하기에 그리워하는 마음도 깊다. 한 잔 술에 시름을 잊으려 하지만 시름만 더해질 뿐이다. 다르지만 그러나 그 의미는 갖다. 역시나 김목경도 김광석도 아닌 박완규이기에 가능한 무대였으리라. 개인적으로 1위를 주고 싶었다. 그렇게 울컥하여 한 잔 하고 싶게 만드는 노래였다.

이영현의 '슬프도록 아름다운'은 이영현 또한 솔로로서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 무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잘 불렀다. 이영현다웠다. 힘이 있으면서도 음색이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힘이 있으면서도 윽박지르기보다는 조곤조곤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무척 듣기 좋았다. 하지만 그 뿐. 빅마마라고 하는 팀 안에서 자기의 파트만을 소화하던 것과 하나의 노래를 완곡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잘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영현만의 매력이 과연 노래에 담겨 있는가. 의외로 이영현은 매우 매력적인 귀여운 여성이었다. 아쉬웠다.

김경호의 '못 다 핀 꽃 한 송이'는 내내 김수철을 생각나게 만드는 무대였다. 김경호가 부르는 노래는 어떻게 해도 김경호의 노래로만 들린다. 원곡이 갖고 있는 감정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김경호의 감정만이 노래를 통해 들리게 된다. 장점이면서 단점이다. 특히 '못 다 핀 꽃 한 송이'와 같이 섬세한 감정을 요구하는 노래에 있어서는 결국 김경호의 감정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데, 그렇다고 김경호가 들려주는 감정이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 못하면 단지 김경호의 노래실력만이 남고 마는 것이다. 김경호의 노래실력을 감상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김경호가 부른 '노래'를 듣고 싶은 것이다. 신효범의 '떠나야 할 그 사람'과 더불어 가장 이해가 힘들었던 무대였다.

신효범이 부른 '떠나야 할 그 사람'의 원곡을 안다. 무척 좋아하기도 한다. 그래서 상당히 난감했었다. 신효범의 고음은 물론 훌륭하지만 그를 위해 살짝 뒤를 끄는 버릇이 있다. 여기에 지나친 고음의 남발로 정작 노래가 들려주고 한 섬세하면서도 애절한 감정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과거 같은 펄시스터즈의 '님아'를 리메이크했을 때도 그 점이 불만이었었는데, 마치 신효범의 가창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처럼 노래가 쓰이고 있었다. 자문위원 안혜란 PD의 말처럼 무언가 쉴 틈 없이 분주하게 보여주고 있기는 한데 무엇을 들었는가 기억에 남는 것은 없었다. 아쉬웠다.

이현우의 '이 밤을 다시 한 번'은 7위라는 순위가 무색할 정도로 훌륭한 무대였다. 이현우만의 독특한 매력이 살아 있었다. 원곡에 충실하면서도 이현우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TV로 보는 것과 현장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차이가 있었던 듯 싶다. 자문위원 장기호 교수의 말에 따르면 연주의 하드함에 이현우의 목소리가 묻혔다는데 TV를 통해서는 그것을 잘 느낄 수 없었다. 아마 그런 부분이 순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는가. 과연 이현우 스타일의 보컬이 <나는 가수다>에서 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우려와는 달리 상당히 설득력 있는 무대였었다.

거미의 '영원한 친구'는 R&B특유의 뒤를 끄는 창법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버라이어티'한 매력이 그대로 살아있는 무대라 할 수 있었다. 음악은 단지 귀로 듣는 것만이 아닌 오감으로 즐기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낀다. 그래서 노래가 아닌 무대다. 대중음악이란 바로 그러한 쇼의 일환으로 무대에서 공연되어진 것이었다. 그 본류를 느끼게 만든다. 가수가 즐기고 관객이 함께 즐긴다. 사소한 문제따위 그러한 원초적 즐거움 앞에 아무런 관심거리도 되지 못한다. 말 그대로 최고의 무대였다.

아무튼 무대가 필요하다, 이제껏 <나는 가수다>에 출연했던 거의 모든 가수들이 하나같이 하던 말이었다. 이런 제대로 된 무대가 있다면. 일요일 황금시간대에 수많은 관객 앞에 제대로 된 연주와 함께 제대로 된 무대를 선보일 수 있다면. 그것을 이제 와서 적우를 통해 깨닫는다. 가수는 무대를 원한다. 그들이 설 수 있는 무대를 원하고 무대를 통해 성장하기를 바란다. 음악은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다. 송창식은 아직까지도 연습을 쉬지 않는다. 완성된 가수란 존재할 수 있을까?

가수로서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중저음의 묵직한 목소리이지만 어둡다기보다는 여명의 희망이 느껴진다. 그녀의 표정 만큼이나 밝은 활력이 느껴진다. 폭이 넓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는 자기만의 영역이 확고하다. 과연 앞으로 어떤 무대를 다시 선보일까? 적우를 좋아한다. <나는 가수다>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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