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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6.03.01 08:50

[김윤석의 드라마톡] 육룡이 나르샤 43회 "오로지 순수한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위해서"

가장 욕망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자신이 가지고자 한다

▲ 육룡이 나르샤 ⓒS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육룡이 나르샤. 사실 실제 역사에서 이방원(유아인 분)이 감히 당시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도전(김명민 분)을 제거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지금 나오고 있는 '사병혁파' 때문이었다. 사병이란 권력자에게 자신을 위해 직접적으로 투사할 수 있는 유력하고 유혀한 무력수단이었었다. 얼마나 많은 양질의 사병을 보유하고 있는가는 곧 자신이 가진 신분과 권력과 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조선건국에 참여하여 공신으로써 많은 것들을 누리게 되었는데 갑작스럽게 사병을 혁파한다며 그 권리를 빼앗아가려 했었다. 왕자와 종친, 훈신, 무신들이 이방원을 중심으로 뭉쳐 난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였다.

만일 정도전이 사병혁파를 시도하며 집권층의 반발을 사지 않았더라면, 더구나 정도전 개인에게 지나치게 집중된 권력에 대한 견제와 명황실의 소환요구로 인한 사대부의 이반이 아니었더라면, 그랬다면 어쩌면 이방원은 아무일없이 막내인 이방석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며 평범한 종친의 한 사람으로 늙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아버지 이성계(천호진 분) 개인의 실력과 인망에 기대어 세워진 나라였고, 조정의 대신이며 공신들 역시 이성계에게 한결같은 지지와 충성을 보내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이성계 자신의 세자책봉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었다. 전혀 여지가 없었다. 이미 세자로 책봉된 이방석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 한다면 먼저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아버지와 맞서지 않으면 안된다. 이성계가 결코 그것을 용납할 리 없다.

드라마에서도 그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었다. 명나라에서 스스로 세자를 참칭한 사실이 알려지며 역모로 몰리자 꼼짝없이 스스로 죄인이 되어 동생인 세자의 처소 앞에 머리를 풀고 엎드릴 뿐이었다. 감히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아버지 이성계의 부정과 동생 이방석의 우애에 기대어 인정에 호소할 뿐이었다. 그것이 이방원이 할 수 있는 전부였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방원을 벌주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에 이성계가 결심을 굳힌다면 이방원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대로 순순히 오욕속에 모든 것을 잃거나, 아니면 진짜 역적이 되거나. 그런데 아직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이방원이 공공연히 왕위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며 행동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가. 설사 그럴 마음이 있더라도 기회가 오기까지는 철저히 묻고 감추어야만 한다. 오히려 실제 역사에서 이방원이 더 영리하고 능란했다. 정도전이 이름을 부르며 유인한다고 바로 넘어가 눈물을 흘리는 드라마의 이방원과 달랐다.

나여야만 한다. 바로 나여야만 한다. 오로지 나여야만 한다. 그래서 권력의지다. 다른 누구도 아니다. 아무리 그것이 옳아도, 아니 옳은 일이기에 더욱 그것을 자신이 해야만 한다. 그릇된 것이 아니다. 순수한 것이다. 솔직한 것이다. 좋기에 좋은 것을 안다. 바르기에 바른 것을 안다. 그래서 그것을 탐한다. 그것을 욕망한다. 자신의 것이기를. 자신의 소유이기를. 정도전이 구상한 새나라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자신이 만들고 싶다. 자신이 이어받고 싶다. 오히려 그늘이 없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오롯이 한 점 그늘도 때도 없는 순수한 확신이 모든 의심과 고민과 갈등을 지워 버린다. 아이들의 순수함은 때로 어른들이 만든 도덕과 윤리를, 정의와 가치를 아무렇지 않게 부수고 짓밟는다. 야단을 맞아도 왜 맞아야 하는지 모른다. 차라리 스승을 죽여서라도, 아버지를 거역해서라도 자신은 그것을 가져야만 한다.

분이(신세경 분)의 자신에 대한 신뢰마저 이용한다. 분이를 염려한다. 그래서 충고도 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철저히 숨긴다. 이미 분이는 자신과 다른 길을 간다. 다른 길 위에 있다. 바로 권력의 길이다. 분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은 별개, 그리고 그런 분이를 이용하려는 자신의 목적 역시 별개.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된다. 가장 순수한 자신이지만 또한 자신이 아니다. 그래서 괴물이라 부른다. 괴물에 잡아먹힌다. 분이를 위해 마련한 반촌에 어쩌면 분이를 위험하게 만들 무기들을 감춘다. 이방원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굳이 개의치 않는다. 분이를 향한 마음이 여전히 변함없다는 것이 그래서 더 아련하다. 분이에게 했던 말 그대로 자신 역시 조영규(민성욱 분)의 말 그대로 자칫 일이 잘못되면 주위의 모두와 함께 죽고 말 것이다. 그 고독을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함께 따라주는 주위의 신뢰를 통해 채우려 한다. 권력이 남은 빈 자리를 채울 것이다.

그런 가진 자들의 사정에 의해 철저히 휘둘리고 이용당한다. 모든 위험하고 번거로운 일들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것 뿐이었다. 안전한 곳에서 그저 평온한 일상을 누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또다른 누군가에게 빌미가 된다. 관군조차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가진 자들은 여전히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입장만을 챙긴다. 그 와중에 분주해지고 또 위험해지는 것은 가지지 못한 반촌의 사람들 뿐이다. 그곳에 이방원의 아내 민다경(공승연 분)은 조영규를 시켜 만일을 위한 무기까지 감추어 두었다. 알려지면 분이와 반촌사람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더 가치있는 일을 위해서다. 더 의미있는 목숨을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판단도 결정도 선택도 오로지 자신들이 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위험과 이웃한 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결심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은 이방지(변요한 분)와 싸워야 한다. 이방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 어떻든 싸우게 된다면 반드시 그를 꺾고 죽여야 한다. 아니면 자신이 죽어야 한다. 비정하지만 받아들인다. 어느새 훌쩍 자라 자신과 견줄 수 있게 된 무휼(윤균상 분)을 이방지는 대견하게 바라본다. 그것이 칼잡이의 길이다. 누군가의 칼이 되어 버린 이들의 삶이다.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다. 자신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누군가이고 자신들의 손에 들린 칼이다. 또 하나의 운명이 그렇게 여상한 달빛 아래 흘러간다. 척사광(한예리 분)을 만난다. 척사광이 이방원이 감춰둔 무기고를 눈치챈다. 파국은 다가온다. 명의 소환요구는 정도전을 결정적인 위기로 내몬다. 이방원에게 결정적인 기회다. 하지만 피를 통해서만 기회는 현실이 된다. 아직은 정도전이 절대우위에 있다.

다시 전작 '뿌리깊은 나무'로 돌아간다. 당시 강채윤은 그렇게 외쳐 묻고 있었다. 욕망하는 것이 죄인가. 백성은 욕망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정기준은 세종에게 그리 대답하고 있었다. 욕망이 세상을 혼란케 한다. 이방원이 정도전에게 묻는다. 자신은 욕망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정도전이 대답한다. 그 욕망은 그릇된 것이다. 그 한 가지만을 위해 지나온 모든 시간들이, 수고와 노력들이 한순간에 부정당하고 만다. 살고자 하는 욕망이 분이에게도 만일을 대비하도록 만든다. 정쟁으로 허비해야 하는 시간들을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그마저 사실은 욕망을 위한 과정들이다. 욕망하는 동안에는 지칠 겨를조차 없다. 욕망이 인간을 살게 한다.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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