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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1.27 08:36

해를 품은 달 "액받이 무녀가 되어 이훤을 다시 만나는 연우, 너무 넘쳤다!"

마음을 담을 여지조차 없이 제작진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원래 제수를 장만할 대도 우수리를 얹거나 깎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을 제물로 바칠 때도 제물로 바쳐지는 순간까지 온갖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다. 정성이란 곧 정갈함인 때문이다.

인간의 탐욕이란 가장 불순하고 부정한 것이다. 한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치열하고 가장 처절한 탐욕일 것이다. 안타깝고 억울한 마음이 끝내 그늘을 만들고 부정한 것들을 끌어들인다. 그래서 제물을 죽여 제사를 지낼 때에도 최소한 죽는 그 순간까지 여한이 없도록 한다.

존귀한 지존의 몸이다. 그 지존의 액을 대신해 쓰는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억울한 마음에 한이라도 품게 되면 어찌하려는가? 혹시라도 원망하는 마음에 불순한 마음이라도 먹게 된다면 그것이 곧 부정이 되는 것이다. 죽은 이의 남은 한이 귀신이 되고 살아 있는 이조차 그 한이 넘치면 귀신을 불러온다. 인과율에 의해 베푼 만큼 반드시 돌아오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과연 존귀한 지존의 몸을 대신해 액을 쓰게 될 무녀에게 그같은 억울한 한을 남기려 할까?

액받이무녀를 고르는 것도 그렇다. 인간의 명운은 사주에 따른다. 생년과 생월과 생일과 생시. 그래서 사주팔자다. 관상은 바뀐다. 따라서 왕에게 돌아갈 액을 무녀가 대신하고자 한다면 그 사주가 왕의 액을 대신할 수 있는 사주여야 한다. 원작에서는 바로 그런 부분이 아주 잘 묘사되어 있었다. 장차 왕위에 오를 세자와 평생을 해로해야 할 빈의 사주와 왕을 대신해 액을 써야 하는 액받이무녀의 사주가 일치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일 것이다. 그 만큼 두 사람의 만남이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결정된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단지 드라마는 관상만을 보고 그녀를 액받이 무녀로 고르고 있다.

사주도 보지 않고,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아 한마저 남기려 한다. 액받이 무녀가 연우(한가인 분)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찌할 뻔했는가? 왕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기보다 부당한 처사와 억울한 처지에 한을 품고 원망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때는 어찌하려 했을까? 관상으로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이 사주에 나타났다면 그때는 또 어쩌려던 것이었을까? 너무 허술하고 무책임하다.

하지만 그래서 좋은 점도 있었다. 바로 당시의 시대를 제대로 묘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칫 액받이무녀의 겉모습만 보기 쉬웠다. 정중하게 바른 절차를 밟아 선택되고 결정된 액받이무녀였다면 자칫 그 본질을 놓치기 쉬웠을 것이다. 인간부적이다.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형상을 한 부적이다. 수단이며 도구이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던 시대였다.

왕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중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왕은 왕실의 안정을 위해 마음에 없어도 합방하여 왕실을 이어갈 아이를 낳아야 했다. 정비인 중전에게서 후사를 보지 못하면 그때는 후궁이라도 들여야 했다. 군왕은 부끄러움이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군왕에게 방탕하다는 것은 흠이 되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많은 자손을 보아 장차 왕위를 이을 후사를 얻고, 다른 유력한 세력과 연계하기 위한 정치적 거래의 수단을 확보하게 된다. 어느새 왕인 이훤(김수현 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의 합궁일까지 결정되어지는 이유가 바로 그래서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사람을 납치해 액받이무녀로 만들고, 정당하게 동의를 구하기보다 권력을 앞세워 그를 협박하고 억압한다. 정작 당사자의 입장이나 사정 따위 전혀 아랑곳없다. 개인은 없다. 수단만이 존재할 뿐. 왕을 위한 수단이고, 왕실을 위한 수단이고, 나아가 나라를 위한 수단이다. 중전 윤씨 윤보경(김민서 분) 또한 윤대형(김응수 분) 개인의 야망을 위한 수단이며 도구다. 중전으로서 왕자를 낳는 것은 나라와 왕실을 위한 것이지만, 윤대형의 딸로써 왕자를 낳는 것은 일신과 가문의 영달을 위한 것이다.

항상 누군가를 위해, 혹은 무언가를 위해, 오로지 그로서만 의미를 갖고 가치를 부여받는다. 왕이어야 하고, 중전이어야 하고, 윤씨여야 하고, 무녀여야 한다. 그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질서를 강요당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 하면 가혹한 제제를 받게 된다. 권력이란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 시대에 연애라니, 그래서 드라마는 판타지인 것이다.

오롯한 개인으로서만 사랑이란 가능하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이기적일 수 있을 때 서로 사랑하여 사귀는 것도 가능하다. 결혼도 할 수 있다. 자신의 처지도 주위의 입장도 아랑곳않고 제멋대로 할 수 있을 때 로맨스라는 것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왕세자가 사랑을 하여 세자빈의 간택에 관여하려 하고, 왕이 사랑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중전의 자리에 앉히고, 그런 건 역시 동화속 이야기에서나 허락되는 것이다. 역설이다. 가장 첨예한 현실의 모순 속에 가장 현실과 동떨어진 로맨스의 판타지가 펼쳐진다. 바로 드라마의 매력일 것이다. 비극적 현실과 아름다운 판타지가 교차하여 대비된다. 온탕과 열탕을 오간다. 짜릿하다.

아무튼 그래서 더 아쉬움이 남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왕이란 단지 한 개인이 아니다. 왕의 일신상의 문제는 전제왕조에서 곧 나라의 안위와도 직결될 수 있다. 왕에게 자칫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그로 인해 내정이 혼란스러워지고 내외적인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왕에게 약차를 먹여 억지로 재우려 하는 것인데 그 이유에 대해 심지어 왕의 건강을 책임지는 어의에게조차 알리지 않는다. 왕이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다 만일 그러는 과정에서 불순한 의도라도 개입되게 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려는 것일까?

물론 드라마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기는 했다. 원작에서도 역시 왕인 이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 이훤과 연우가 한 공간에서 만나야 했었기에 납득하고 넘어갔었다. 액받이무녀를 고르는 과정에서의 허술함 역시 그렇게 이해한다. 드라마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충실히 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그같은 허술한 부분들도 필요하다. 역사드라마가 아니다. 판타지 드라마다. 그런 점에서 차라리 액받이무녀가 된 연우가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이훤과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 보다 극적으로 세련되게 묘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에도 말했지만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은 너무 친절하다. 너무 친절해서 시청자를 한 순간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알아서 혼자서 궁리도 해보고 상상도 해보고 그래서 안달도 나보고 해야 하는데 그 전에 미리 다 이야기해 버린다. 과연 액받이무녀가 된 연우가 자고 있는 이훤을 만나는 장면에서 연우의 독백이 필요했겠는가? 단지 연우는 자고 있는 이훤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을 것이다. 아무말 없이 가만히 그리운 눈으로 지켜보면서 그 얼굴을 만지고 쓰다듬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밤에는 그런 위력이 있다. 어둠에는 그런 힘이 있다. 아무것도 않고 있어도 텅 빈 어둠이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김다. 사람들의 상상과 바람이 그 빈 자리에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 안에는 시청자 자신의 감정이 담긴다. 그런데 너무 상세한 설명이 그럴만한 여지조차 지워버린다. 그저 일방적으로 제작진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만을 보게 된다. 여운이란 필요하다. 감정이 머무는 자리다. 한순간 몰입이 깨지고 만 이유였다. 그 순간 한가인의 목소리가 너무 거슬렸다.

연우와 양명군(정일우 분)이 만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기서 굳이 노랗고 빨간 색색의 천이 길 한가운데 널려 있어야 했던 필연적 이유가 있었는가? 아무리 사람 다니는 길에 천을 널어놓고 할 만한 일이 뭐가 그리 있었을까? 아마도 시각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었을 게다. 양명군이 연우를 다시 만나 함께 도망치는 장면에서 색색의 천들이 마치 환상과도 같이 그 배경을 이룬다. 꿈결처럼 입조차 벌리지 않고 나누는 대화 속에 색색의 천들이 배경이 그 분위기를 극대화시킨다. 다만 그럼에도 그 장면만 동떨어진 듯 느껴진 것은 너무 지나쳤기 때문이었다. 의도가 너무 작위적으로 드러나 있던 탓이었다. 의식이 그리로 분리되고 있었다.

조금은 생각을 거두고 시청자에게 맡기는 배려도 필요할 듯싶다. 여백을 두어 시청자 스스로 드라마에 몰입하여 궁리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한다. 추리하고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 자신의 이야기로 만든다. 너무 제작진의 이야기로 가두려 한다. 시청자를 설득하기라도 하려는 듯 제작진이 하는 이야기로 너무 정신이 분주하다. 철저히 시청자는 지켜보는 관객의 입장이 된다. 더구나 그 방식이 세련되지 못해 관객의 입장에서도 그다지 몰입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문제다.

어쨌거나 옥의 티였을 것이다. 설마 왕이 쓰는 주전자가 법랑재질이라니. 아니 법랑이 아니더라도 그런 식으로 안료를 사용해 채색된 도자기는 조선시대에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도자기가 구워지는 고온에서 견딜 수 있는 안료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청화백자니 철화백자니 하는 조선후기의 도자기들이 유명한 것이 최초로 도자기가 구워지는 온도에서 견뎌낼 수 있는 안료를 사용해 채색하여 만들어진 도자기들이기 때문이었다. 아니기를 바라지만.

여전히 허염(송재희 분)과 허연우 남매의 연기가 거슬린다. 그나마 남보라는 워낙 캐릭터 자체가 그래놔서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연착륙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러나 비련의 주인공이라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들떠있는 허연우의 경우 몰입을 깨뜨리는 주범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보다 더 문제가 지나치게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제작진일 것이다. 시나리오는 탄탄하고 좋은데 그것을 연출하는데 너무 나머지가 많다. 거추장스러운 부분이다. 전개는 빠르지만 깔끔하지 못하다. 김수현과 김민서, 그밖에 중견연기자들의 연기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판타지가 현실이 된다.

말하지만 사람이나 드라마나 어느 정도는 여지를 두어야 마음이 머물 자리가 생긴다. 틈이 보여야 그곳에 감정이 머물고 감동이 찾아온다. 그리고 너무 밝다. 어둠 속에 있을 때 사람은 상상력을 자극받는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게 된다. 너무 말이 많으면 정도 없다.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재미있다. 소재도 참시하고 이야기도 탄탄하다. 영상도 훌륭하다. 다만 아주 약간 미치지 못한다. 무시할 수 있을 정도지만 그러나 거슬린다. 불만을 갖게 되는 이유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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