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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3.31 07:08

무릎팍도사 - 사람은 의도하지 않아도 잔인해진다

무심코 지나친 일에 누군가는 상처를 입는다.

 
사람이란 얼마나 잔인한가? 잔인한 것을 모르기에 더 잔인하다. 3월 30일 MBC의 예능프로그램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김태원을 보고 느낀 것이었다. 사람이란 때로 전혀 악의없이도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고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따귀를 수도 없이 때렸습니다, 저를. 선생님이. 초등학교 1학년을.”

“칠판에서 교실 뒤 벽까지 몰리는 상황에서 계속 때리는 거야, 애들이 보는 앞에서.”

“정신이 다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망가지는 거죠.”

“중학교 고등학교까지도 학교에 대한 향 자체를 싫어하는, 병적으로... 이런 병에 걸리는 거죠.”

“단 한 순간도 적응했다 생각했던 적이 없었어요. 죽기보다 싫었어요. 학교가는 게.”

문득 공감하게 되는 것은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으니까. 한 번은 지각을 하게 된 김에 아예 학교를 빠져 버린 적마저 있었을 정도였다. 지각하게 되었을 때 매맞는 것이 그렇게 싫었으니까.

그저 지각으로 끝날 일이었다. 앞으로는 지각하지 마라. 그런데 선생님이 너무 엄했다. 그래서 지각을 하면 그 혼나는게 무서워 차라리 결석을 했다. 이유야 아무렇게든 대면 되었으니까. 그다지 학생들에게 관심도 없었다.

학교라는 게 그렇게 싫었었다. 맞는 게 싫었으니까. 그렇다고 맞기 싫어서 억지로 하는 것은 더 싫었다. 맞을 때마다 나의 어느 한 부분이 부서져나가는 것 같았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이 산산이 부서져나가는 것 같았다.

과연 아이들에게 단 한 번이라도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면. 혼내야 할 때 한 번만 인내하여 보듬어 줄 수 있다면. 진정으로 학교가 즐거울 수 있게.

김태원의 말마따나 아이들이란 놀다 보면 공부도 못할 수 있는 것이고, 숙제도 안 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지각도 할 수 있다. 집안이 가난한 것은 더욱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리 못 참아 했었다. 어쩌면 한국 인터넷에서 나타나는 과도한 증오현상은 그런 교육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소한 잘못 하나로도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만든다.

김태원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교를 100일도 안 갔다 했을 때는 단지 특이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공부하기 싫어했구나. 놀기를 좋아했구나. 자유로운 사람이었구나. 그것이 아니라 학교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니. 그것도 선생에 의해서. 그나마 음악으로 잘 풀렸으니 망정이지 기타를 잡지 않았다면 김태원이라는 개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김태원의 부인 이현주씨가 현재 필리핀에서 아이들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머물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남편인 김태원이 암에도 걸리고 했는데, 방송을 통해 보여지는 김태원의 생활이라는 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안타까울 정도인데 어째서 아내 이현주씨는 김태원의 곁에 있어주지 않는가.

그런 비판이 실제 있었다. 기러기아빠로써 한국에서 홀로 생활하는 김태원의 모습이 방송에서 보여질 때마다 아내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가장 가까이에서 김태원의 생활을 보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더불어 조기유학이라는 안 좋은 선입견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결국 그런 어쩌면 너무 당연해 보이는 오해들조차도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상처가 되는 것이다. 아마 김태원이 굳이 <무릎팍도사>에 나와 그동안 하지 않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태원이라고 모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더구나 필리핀에 가게 된 이유도 아들의 병 때문에 주위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병이 있는데 그로 인해 주위로부터 너무 많은 상처를 받은 탓에 지금은 필리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아내로써 남편에 대한 의무를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비싼 딸의 조기유학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엄마로써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제 아내의 소원이 뭔지 아십니까? 제 아들보다 하루를 더 사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들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는가. 비수가 될 이야기를 말이라고 너무 쉽게 내뱉는다. 그러고도 참지 못하면 왜 참지 못하느냐? 그러고도 견디지 못하면 어째서 견디지 못하느냐? 스스로 강해지거나, 아니면 영영 피해가거나.

남들은 눈물나는 이야기를 그렇게들 쉽게 말한다. 남들 피눈물나는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이기에 그렇게 쉽게들 한다. 쉽게 상처입히고 그러고서도 그것을 모른다. 오히려 상처입은 것으로 비웃고 조롱한다. 비난한다. 누군가 피투성이가 되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그 순간에 오히려 그것을 소재로 삼아 웃고 떠든다. 즐긴다.

사실 고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1학연 조그만 아이를 그렇게 따귀를 때리던 선생님이나, 혹은 장애가 있는 아이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던 주위 사람들이다. 악의 없이. 어쩌면 선의라고 생각하고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니 대부분 그렇다. 자기는 선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고 평생의 한이 남는다.

상상력이 결여된 것이다. 오로지 나만을 본다. 나만을 기준으로. 나를 통해서만. 다른 사람의 입장이야. 다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가도 상관없다. 그런 오만과 이기가. 그래서 누군가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그로 인해 일생을 망치기까지 한다. 과연 자신이 김태원과 같은 처지에서 초중고 12년의 세월을 학교에 전혀 적응 못한 채 겉돌고만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라. 그러나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니까,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이렇게까지 잔인해지는 것이다.

오히려 아직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 아니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보호하고 기르는 역할을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하는 것이다. 이웃에 대해서는 자기 아이처럼. 자기에게 그런 아이가 있다 생각하고서 보다 신중할 수 있었으면.

하여튼 그래서 김태원의 예능이 재미있는 것일 게다. 김태원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자기 이야기인데도 자기 이야기가 아닌 척 한 걸음 물러서서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자기 이야기이기에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 마치 족집게 과외를 보는 것 같다. 이 부분에서 재미있고 이 부분에서는 감동하면 된다.

결국 자기 이야기에 스스로 깊이 빠져들지 않기에 가능한 것이다. 오히려 자기 입장이나 감정을 강요하려 하기보다는 단지 담담히 들려주려 한다. 그래서 더 빠져드는 것이다. 김태원이 자기 이야기와 거리를 두는 만큼 듣는 사람은 더욱 가까이 다가가서 듣게 되기 때문이다. 거꾸로 남의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인 것처럼.

그래서 남의 이야기인데도 어느새 내가 위로받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김태원 자신의 이야기인데도 마치 내 이야기인 것처럼 나 자신이 위로받는다. 이번에도 역시. 초등학교 시절 공유하고 있는 기억과 어쩌면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아들의 이야기에서 뭉클하며 다시 한 번 감동을 받는다. 강요된 감정이 아닌 자발적인 동조에서 나오는 감동이다.

걱정했었다. 예능에 출연하기 시작한지 2년이 넘고, 한 번 출연하지 않은 예능이 없다 할 정도로 여기저기 나와서 많은 것들을 털어놓았는데, 이제 와서 과연 할 말이 더 남아 있겠는가. 더구나 얼마전에는 김태원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까지 제작되어 방영되었었다. 괜히 보기도 전에 김이 빠지는 것 같아 그다지 기대를 않고 보았었는데.

역시 이야기는 스토리보다 텔링이다. 무엇을보다는 어떻게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김태원이 하니 재미있다는 것. 스스로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철저히 타자로써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대단한 능력이다.

KBS <남자의 자격>에 달렸던 자막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음악으로 풀렸으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하기는 음악인이다. 음악이란 언어다. 말로써 다 하지 못할 말을 더 극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음악일 것이다. 그의 말이란 그의 음악과도 같다. 그다지 어휘가 풍부하지도 문맥이 연결되는 것도 아닌데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쏙쏙 들어온다. 그건 마치 세뇌와도 같다. 그래서 할매도사일까?

어쩌면 예능이란 얼마나 잔인한가? 남의 아픈 부분마저 끄집어내어 감동이라는 이름으로 소비한다. 함께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 의미있었다. 재미있었다. 결국은 그조차도 계량화하여 이용하려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함일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기대 이상의 재미가 있었다. 아직 들어보지 않은 이야기들도 적지 않았고 진솔한 가운데 감동과 공감이 있었다. 적당한 허풍과 그 허풍을 이내 인정하고 마는 솔직함과 사람들에게 귀기울이게 만드는 센스와. 김태원의 예능을 굳이 찾아 보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가치가 있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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