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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1.23 15:54

남자의 자격 "걸리적거리니까 들어가 있어! 설을 직접 느껴보다!"

왁자한 수다의 부활, 원래의 주제와 양식을 되찾다. 기대를 품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필자가 가장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가난해도 행복하다'는 말이다. 하긴 그래서 가난해'도'라 말하는 것일 거다. 가난한데도 행복하다는 말은 그러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뜻이기때문이다.

한겨울에도 불을 땔 엄두도 내지 못하고 물이 어는 추운 방안에서 옷을 끼어 입은 채 그렇게 지낸다. 연탄이 빨리 탈까봐 불구멍도 맞추지 않고, 전기요금 더 나올까 TV도 없이 라디오만을 듣는다. 필자 역시 혹시라도 연탄이 빨리 탈까봐 공기구멍을 아예 꽉 틀어막은 채 연탄을 때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불구멍조차 맞추지 않는 절박함은 필자도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가족이 있음에도 만나지 못한다. 자식이 있다. 그런데 사는 곳을 알지 못한다. 연락처는 알지만 일부러 연락하기도 미안하다. 서로 사는 처지를 아는 때문이다. 저 살기도 바쁜데 굳이 부모라고 얼굴을 비추라 탓하기가 너무 미안하다. 공부라도 많이 시켰으면. 무어라도 가진 게 있어 자식들에게 도움이라도 줄 수 있었으면. 자식 입장에서도 아마 아무것도 없이 부모를 만난다는 자체가 부담이었을 것이다. 서로가 보는 것조차 미안하다.

그래서 나오느니 죽는 이야기다. 죽었으면 좋겠다. 죽지 못해 산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희망이 없다. 살아있는 의미를 찾지 못한다. 차들이 정신없이 지나는 도로에서 아예 체념한 듯 자기 키보다 더 높은 리어카를 끌고 힘겹게 걸어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느끼는 비애와 같은 것이다. 차가 빠르게 지나가는데 전혀 두려워하거나 움츠려 하는 것이 없다.

차라리 공원에서 소일할 수 있는 노인들의 처지라는 것도 그러고 보면 얼마나 여유로운가. 하다못해 노인요양시설에라도 몸을 의탁할 수 있으면 안전한 곳에서 보호받으며 또래들과 남은 삶을 보낼 수 있을 텐데 그조차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과연 이벤트처럼 겨우 한두 번 찾아 얼굴을 보고 연탄이며 먹을 것을 건네는 것이 무슨 큰 도움이 되겠는가?

사실 그래서 자선이라는 말도 싫어한다. 굳이 개인이 자기 주머니를 털고 시간을 나누어 그분들을 찾아뵙고 도울 필요가 무에 있겠는가? 그런 분들이 조금이라도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국가에서 무료시설을 많이 지어 운영한다면 그쪽이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다. 더 이상 사는데 경제적인 부담이 없다면 자식들도 어려워하지 않고 보다 자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선은 베풀어도 자신의 세금이 그런 곳에 쓰이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자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로부터 받는 보조금조차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모두가 개인의 탓이니까. 본인 자신이 안되면 자식이라도 책임지면 된다. 왜 굳이 국가가 나서야 하는가? 사회가 나서서 그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가? 고령화사회에서 노인문제나 저출산문제가 갖는 근본적인 원인이 여기에 있다. 굳이 일부러 찾는 사람이 없어도 그분들이 나름대로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보장해줄 수 있다면 이처럼 눈물나는 상황따위 없어도 그만이었을 것이다.

TV를 보면서는 동정하며 감동받고, 그러나 TV밖 세상에서는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해고 쓸쓸히 또 하루를 절망 속에 보내야 하는 이들이 있다. 이 역시 모순이며 역설일 것이다. 그렇게 동정하는 마음이 강하고 감동이 진심이라면 보다 근본적인 대안들에 대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하기는 그런 문제로 넘어가면 정치적인 논쟁으로 번지며 싸움만 커지고 만다. 아직까지 그러한 개개인의 삶에 대해서까지 사회가 고민하기에는 아직 미성숙한 부분이 많다.

아무튼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우리나라 노인문제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유형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긴 군사독재, 여기에 급격한 경제발전으로 인해 낙오되고 도태된 이들이 있다. 맨몸으로 월남해서, 혹은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어찌어찌 살다 보니 어느새 이 나이가 되었다. 의지할 곳도 마음 둘 곳도 없이 홀로 되어 더욱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한다. 차마 노인분들 하는 이야기 끝까지 들어주기조차 아픈 때가 많다.

김연옥 할머니의 사연이 가슴을 울린 이유였다. 하기는 다른 노인분들도 마찬가지였다. 급속한 경제발전 가운데 사회가 놓아두고 온 부분들이었을 것이다. 하기는 어딘들 안 그랬을까? 우리 외할머니께서도 그러셨다. 오히려 돌아가시고 나서 이모들이 울먹이며 그리 위로하고 있었다. 좋은 데 가셔서는 고생하지 마시라고. 자식들도 있었고 말년에 자식들에 의지해 보낼 수 있었는데도 그랬다.

어쩌면 그래서 더 눈물이 나는지도 모르겠다. 이경규와 마찬가지로 필자 역시 외할머니와 어린시절을 함께 보냈었다. 그 말도 안되는 카네이션을 추석이 다가오도록 가슴에 달고 다니시던 초등학교 시절의 외할머니를 지금도 기억한다. 이런 이야기에 너무 약하다. 끝까지 보기가 힘들었다. 때가 되었으니 당연하게 나올 법한 이야기였지만 그러나 여전히 이런 이야기들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쨌거나 노인분들을 찾으며 마치 반전처럼 이어진 아픔 이야기들은 이쯤 하더라도, 바로 직전까지는 진정 <남자의 자격>다운 예능의 본질에 충실한 방송이 보여지고 있었다. 설을 맞아 명절이라고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남자들에게 여성들의 일을 대신해 직접 체험해 보라. 여성들이 명절이라고 해야 하는 일들을 직접 경험하며 깨달아 보라.

보는 내내 무릎을 치며 공감하고 찔려 했다. 특히,

"걸리적거리니 비키라!"

말 그대로다. 못해서가 아니다. 안해서다. 하려고 들지 않아서다. 혼자 내버려두면 잘하던 사람들이 어째 아내가 있고 어머니가 있으면 바보가 되어 버린다. 하라고 시켜 놓으니 자기들끼리 잘하는 것을 정작 처음 해보라 시키니 어떻게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한다. 정확히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왜 해야 하는가를 모르는 것이리라. 반드시 해야 하는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습관처럼 받아먹는데에만 익숙하다.

설마 자기가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이경규의 말이 그 모든 것을 대변한다. 물론 많이 바뀌었다. 마트에서도 직원들이 대답하듯 이제는 남성들도 곧잘 이런 일들을 많이 함께 한다. 그러나 여전히 남성이 할 일과 여성이 할 일을 구분하여 여성들에 모든 것을 떠넘기고 아예 자기 일이 아니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결국은 그렇게 길들여져 온 때문이었다. 그렇게 살아왔던 아버지와 그런 방식에 익숙한 어머니에 의해. 바꾸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의미가 있다. 해보니 된다.

무엇보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도 하려면 할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이 생겼다. 칭찬이 듣고 싶은 김국진의 모습이 바로 남자의 본모습이다. 남자를 부려먹으려면 칭찬은 확실히 해주라. 칭찬은 국민할매의 걸음까지 바꾸는 힘이 있다. 처음의 어색하던 모습이 언제였냐는 듯 이경규가 가장 힘이 넘친다. 대구댁 양준혁은 자기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주방일을 마주하자 자신감이 붙은 것인지 말이 많아졌다. 언제까지인가는 두고 볼 일이다.

먹기는 참 쉬운데 만들기는 어렵다. 한식을 만들어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다. 조리는 쉽다. 어지간한 패스트푸드보다도 더 빠르고 간편하다. 다만 준비가 어렵다. 한국요리는 재료를 준비하는데 모든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달걀을 풀고 달걀물을 입혀 부치는데에는 사실 그다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지 않는다. 기술은 필요하지만 힘들다고까지 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러기까지 손이 가는게 보통 손이 가는 것이 아니다. 아마 그런 점을 이용한 한식 패스트푸드도 있을 것이다. 역시 어머니와 누이들의 고생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설에는 빈둥거리고 싶은 이 본능은 무엇이란 말인가. 역설이지만 그것이 남자의 길들여진 본성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이 부산출신 이경규와 실향민의 아들인 김태원 사이에서 이루어진 제사방식에 대한 논쟁이었을 것이다. 이렇게나 다르구나. 제사음식을 썰어 대문을 열고 내놓는다는 것이 신기했고, 조상님들이 제사음식을 드시는 동안 잠시 자리를 비켜주는 것은 우리집에서 제사지내는 것과 같았다. 다만 우리집에서는 제사나 차례에 닭을 쓰지 않는다. 원래 쓰지 않는 것인지 언제부터인가 쓰지 않게 된 것인지는 모른다.

예란 묻는 것이다. 예란 모두가 같은 것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고, 장소에 따라 다르고, 집안에 따라 다르다. 다만 워낙 사는 것이 각박하다 보니 원래 하던대로 격식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기가 어려워진 것이 어느샌가 그것이 하나로 뭉뚱그려져버리고 말았다. 함경도 출신인 아버지와 경기도 토박이인 어머니가 어느새 같은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예법에 대한 교육도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어디 경조사라도 있으면 이제는 전문가들이 알아서 표준화된 격식으로 가르쳐주고 대신해준다. 씁쓸한 단면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이경규와 김태원의 세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역시 재미있는 부분이다. 집안 어른들께 여쭤 본다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역시 <남자의 자격>의 예능은 수다다. 전부터도 사실 <남자의 자격>의 웃음은 거의 멤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수다에서 나왔다. 딱히 캐릭터랄 것도 없고 관계랄 것도 없이 그저 떠든다. 떠드는 사이 캐릭터가 잡히고 관계가 드러난다. 억지로 무언가를 할 필요 없이 나이 만큼이나 연륜이 쌓여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오랜만이었을까? 이렇게 모두가 모여서 수다를 떨어보기도 오랜만이었을 것이다. 한 데 모여 음식을 만들며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을 보니 비로소 <남자의 자격> 같다. 직접 차례음식도 마련하고 그런 과정에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김태원의 롤은 매우 특별하다. 양준혁은 다시 대구댁으로 돌아왔지만 김태원의 롤은 확장을 거듭하며 진짜 할매가 되어 버렸다. 시어머니다. 오히려 이경규보다 더 짓궂다. 가장 번거로운 백숙을 윤형빈에게 떠넘기고, 차례를 지내는데 김국진에게 이것저것 잔소리를 퍼부어댄다. 그러면서도 억삼이라는 캐릭터를 이용 이야기의 진위와는 상관없이 허풍으로 몰리며 무너지는 것도 한 재미다. 확실하게 이경규의 보좌역을 맡았다. 가장 확실한 공격수이며 가장 확실한 샌드백이다. 과연 김태원이 아니었으면 이경규 혼자 어떻게 견뎠을지.

이윤석의 캐릭터를 요리연구가 이혜정씨가 바로 짚어주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은 답답하지만 정확하다."

이보다 더 적절히 이윤석의 캐릭터를 묘사한 말은 없지 않을까? 가장 성실하고 정확한데 그러나 느리고 어딘가 답답하다. 성실성을 보게 되는 미션에서는 가장 돋보이는데, 웃음을 보자고 하면 무언가 굉장히 답답하다. 어떻게 살리는가가 프로그램 및 MC의 역량이다. 그러나 역시 <남자의 자격> 미션 가운데 이윤석이 주인공인 미션이 적지 않았었다. 그 이유를 말해준다.

설에 어울리는 미션이었다. 직접 차례상을 차려보고, 그러면서 설에 대한 여러 다른 이야기들을 나누고, 그리고 나아가 이웃들과 음식을 나눈다. 마치 한가족처럼 북적이는 모습도 좋았다. 설이란 그렇게 모두가 모여 북적이는 맛이 있어야 한다. 가족이 모이고 이웃이 나눈다. 정말 오랜만에 <남자의 자격>다운 색깔을 찾은 것 같아 더욱 좋았다. 이런 재미에 필자는 <남자의 자격>을 챙겨본다.

양준혁은 역시 대구댁을 밀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과거 <1박 2일>에는 몽장금이 있었다. 산만한 덩치의 양신과 대구댁은 확실한 역설의 반전을 이룬다. 그 자체로 웃음을 준다. 김국진은 이제는 아예 결혼의 아이콘이 된 듯하고. 그래서 친척들 모이는 곳에 가기가 꺼려지는 것이다. 시장사람들마저 그의 재혼을 걱정한다. 그리고 언제나 확시한 이경규, 김태원. 밉상 전현무.

다만 그럼에도 여전히 스테레오적인 전형성을 답습하는 부분은 고민할 필요가 있겠다. 특히 자막은 일부러 피한다. 도저히 손발이 오그라들어 끝까지 보고 있기 힘들다. 재미있었다. 간만의 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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