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3.30 07:42

강력반 - '단지'가 만들어내는 공포

악마는 '단지' 안에 산다...

 
SF소설의 대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정한 로봇 3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첫째 로봇은 인간을 해쳐서는 안 되고, 둘째 첫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며, 셋째 첫째와 둘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경우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로봇이라면 예외없이 지켜야 하는 이러한 원칙에 대해서도 로봇을 이용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두 대의 로봇이 있을 경우 한 대의 로봇에게는 시간이 되면 음료수에 독약을 타도록 하고, 다른 로봇에게는 그것을 주인에게 가져다 주도록 시키는 것이다. 처음의 로봇은 단지 음료수에 독약을 탔을 뿐이고, 다른 로봇 역시 단지 독이 든 음료수를 모르고 주인에게 가져다 주었을 뿐이다.

어쩌면 사람이 쓰는 말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 ‘단지’가 아닐지. 작년 반 년 가까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타블로사태만 하더라도 그렇다. 타블로의 무고함이 밝혀지고, 네티즌의 무도함이 드러났을 때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단지’.

“단지 의혹이 있어 말했을 뿐이다.”

“단지 의혹이 있어서 해명을 요구했을 뿐인데 그런 말도 못하는가?”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그 전 몇 번인가 연예인들이 악성루머와 비난들로 인해 불행한 선택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까지 보았다.

“그런 일로 왜 죽어?”

“그런 일로 죽는 게 오히려 잘못 아니야?”

오래전 우리나라에는 멍석말이라는 형벌이 있었다. 국가적으로 행해지는 공식적 형벌이 아니라 향촌사회에서 사적으로 이루어지던 형벌이었다. 방법은 대상자를 멍석으로 둘둘 만 다음 누가 때리는지도 모르게 모여서 매를 주게 하는 것이었다. 맞는 사람도 모르고 때리는 사람도 모른다. 단지 매 한 대를 더했을 뿐이었다. 설사 그 과정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더라도 그것은 결코 누구의 책임도 아니게 된다.

바로 3월 29일 방영한 KBS의 월화드라마 <강력반>에서 이소민(김윤혜 분)은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하는 한송희에게 이렇게 외쳐 말하고 있었다.

“내가? 넌 아니고? 내가 살인마면 넌 뭘 것 같아? 쓰레기! 너는 김소영이 왜 떨어졌는지 알고 있었어. 그리고 그 여형사가 널 구하다 죽었는데도 겁에 질려서 아무 말도 못했고. 왜 그랬어? 동영상 때문에? 그렇게 해서라도 살고 싶었니? 비굴하고 비겁하게? 너 때문에 죽은 거야. 너 구하려다가. 그런데 넌 입을 다물었어. 너 혼자 살아보겠다고. 병신. 왜 그러고 사니? 넌 살인마야, 한송희! 그 여형사를 죽인 건 너야! 네가 그 여자를 죽였다고!”

확실히 그녀에게는 잘못이 없다. 단지 소외된 아이들과 어울려주었을 뿐이고, 어울리면서 명품을 팔고 돈을 빌려주었을 뿐이고, 그 돈을 받으려 했을 뿐이었다. 진미숙(선우선 분)형사가 죽을 때도 이소민은 단지 한송희가 눈에 거슬리니까 혼만 내라 했을 뿐이었다.

“전 누구에게도 죽으라고 한 적 없어요. 단지 빌린 돈 달라고 했지.”

실제 김소영이 죽을 때도 이소민이 김소영더러 죽으라 한 것은 아니었다. 진미숙이 죽었을 때도 진미숙을 죽이려 불을 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잘못은 그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한송희에게 있다. 상황을 그렇게 몰고 갔고 그것을 침묵하고 외면했던 한송희에게 오히려 더 큰 잘못이 있다.

아마도 현대사회의 병폐가 아닐까? 사회가 고도화되고 첨단화되다 보니 개인의 간격이 너무 좁아졌다. 돋보기로 형체를 보다 크게 보려면 어느 정도의 거리가 필요하다. 너무 가까워지면 제대로 보기 힘들어진다. 너무 가까워지면 얼굴도 목소리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내가 지금 한 행위로 인해 어떤 결과가 돌아올 것인지.

그래서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상상력이 결여되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여유를 가지고 살피고 하면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입체적으로 자기의 말과 행동의 결과에 대해 살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정보화시대라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진다. 직접 경험하고 이해하기 이전에 이미 정의되어 주입된다. 더욱 현실감을 잃어간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단지’. 악마가 만들어낸 마법의 단어다. 죄의식을 지워버리는.

단지란 그 자체로는 잘못이 없다는 뜻이다. 돈을 빌려준 것은 잘못이 아니다. 빌려준 돈을 받으려 한 것도 잘못이 아니다. 혼내려 한 것은 있지만 죽이려 한 적은 없다. 단지. 단지 그랬을 뿐이다. 그 단지라는 말 뒤에 숨어 어느새 죄의식이란 사라져버리고 만다.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말하고 행동하고 그 책임마저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길 수 있다. 나는 전혀 아무 잘못이 없다. 내가 책임질 것은 없다.

인터넷에서. 악플러들이. 아니 대부분은 자신이 악플러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않는다. 오히려 정의롭다. 그들은 더없이 선하고 도덕적이다. 그들이 악플을 다는 이유는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선하지 못하기 때문에. 도덕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단지 그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비판을 가하고, 가벼운 응징을 할 뿐이다. 단지. 그 결과로 상처를 입고 그래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면 그것은 그 자신의 나약한 탓이다.

아니 인터넷만일까? 보다 값싼 농산물을 사고자 농민들로 하여금 희생을 강요한다. 단지 더 값싸고 질좋은 농산물을 사려 할 뿐이고, 따라서 그러한 행위는 농민들과는 전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농민이 생기더라도. 더 값싸게 제품을 소비하고자 할 때 대형마트에 의해 생산자에 대해 이익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생산자가 입는 피해 역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단지 제품을 보다 싸게 소비하려 할 뿐이다.

MP3 불법다운로드로 인해 대중음악시장이 붕괴되다시피 했을 때에도 사람들은 말했다. 단지 보이기에 다운로드받았을 뿐이다. 돈 주고 살만한 음악을 만들어 내놓으면 누가 음반을 사주지 않겠느냐? 돈주고 살만한 음악을 만들지 않는 음악인의 탓이다. 대여점과 불법스캔으로 만화시장이 무너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불법다운로드로 인해 영화의 2차시장이 아예 소멸하다시피 한 상황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단지 있었을 뿐이고 그래서 좋기에 그리 했을 뿐이고 그 결과는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너무 머니까.

그렇게 구조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는 건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인데. 내가 하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큰 영향을 미칠 지 모르는데.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이 있고, 그로 인해 절망하는 사람이 있고, 그로 인해 끝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러나 너무 가까워진 나머지 너무 먼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단지 그리했을 뿐이고 그런 것들과는 나와는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죄가 아닌데 죄가 되고 마는 것이다.

과연 이소민의 저같은 말과 행동들이 이소민이라는 한 인간의 인격에 문제가 있어서만 그런 것이었을까? 처음부터 인성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일들을 저질렀던 것일까?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아직 미성숙한 미성년자의 행동은 바로 어른을 보고 따라 배우는 것이다. 사회화의 과정에 있는 아이들의 행동이란 그 사회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단지 픽션의 한 드라마에 불과할 테지만 말이다.

이소민이 사이코패스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한송희를 향해 절규하듯 토해내던 말에서 어떤 죄의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에게는 죄의식이 없다. 김소영과 진미숙의 죽음에 대해 자기에게 책임이 있음을 알았을 때 본능적으로 그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한송희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바로 네 탓이다.”

“모두 네가 잘못한 때문이다.”

하기는 이제까지의 모든 행동이 마찬가지다. 그나마 자각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점에서 아이답달까? 어른이 되고 나면 그러한 자각조차 사라지게 된다. 무심해지고 무관심해진다. 과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더욱 ‘단지’라는 말에 매달리게 된다. 어른은 그래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단지 결과가 그리 나왔을 뿐이다. 그렇게 이소민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오만하기까지 한 당당한 그 모습처럼.

정말 간만에 수사드라마다웠다. 처음으로 수사과정에서 긴박감이 있었고 궁금증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여전히 수사과정은 허술하고 결국 수사보다는 사건이 일어나는 주변의 이야기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지만, 그렇더라도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형사들의 의지가 돋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래봐야 결국에 진미숙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남태식(성지루 분)의 눈물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도대체 정일도(이종혁 분)는 이소민의 중학교시절 친구를 만나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왜 다른 형사들과 공유하지 않고 있을까?

역시나 기대했던대로 진미숙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 공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강력반>이라고 하는 드라마에 있어 가장 큰 문제이고 한계일 것이다. 기왕에 캐릭터도 여럿 등장한다면 그 가운데 관계를 설정하고 역할을 부여하여 유기적으로 움직이도록 해야 할 텐데 그것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심지어 그나마 상당한 비중이 있을 것이라 여겼던 과장 정일도마저 단지 박세혁의 전처 허은영(박선영 분)과의 러브라인을 위한 캐릭터인 듯 보이고 있으니. 남태식과 신동진(김준 분)이야 말할 것도 없다. 조민주의 친구와의 러브라인과 CCTV모니터 말고는 거의 존재감이 없다.

그래서 오히려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이번에도 잠시 얼굴만 비추고 말았던 보험회사직원 알렉스 리(에반 분)의 비중을 보다 높여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기왕에 강력반은 하는 일이 없고, 오히려 조민주와 알렉스 리 사이에 오가는 전문적인 이야기들에 더 관심이 간다. 이런 경우 어떤 저변의 이야기가 있고, 그에 대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사례나 데이터가 있는가. 수사가 부실하다면 그를 대신할 것들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건의 수사보다 사건과 관련한 주변에 관심이 많다면 그것을 객관적으로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의 역할도 아주 의미없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제작진이 알아서 할 노릇일 테지만 말이다. 이제까지의 안이함을 벗어던지기 위한 계기가 필요하다.

아무튼 그동안 계속해서 실망만 했었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만족스럽게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척 즐거웠다. <강력반>에 이렇게까지 엄격한 것은 그만큼 필자가 이런 종류의 수사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재미있기를 바란다. 지금 만큼만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다면 아주 만족하지는 못하더라도 더 이상 크게 실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정작 진미숙이 사라지고 나서야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겠지만 말이다. 아쉽다면 여전히 시청자의 감정에 호소하려는 등장인물들의 눈물이랄까?

조금 더 냉정해졌으면 좋겠다. 조금 더 이성적으로. 조금 더 합리적으로. 수사라는 본질에 충실해서 사건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로맨스야 그 과정에서 얼마든지. 그나마 가능성을 볼 수 있어 겨우 기대라는 걸 가져보게 되었다. 부디. 기대가 또 한 번의 만족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