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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1.13 09:45

해를 품은 달 "궁궐의 화려함과 가려진 그늘, 사람의 슬픔이 판타지를 아름답게 한다."

아역들의 매력이 장차 성인연기자로의 전환을 안타깝게 만든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권력이란 참 외로운 것이다. 권력을 바라는 이도 많고, 권력에 바라는 것도 많고, 그렇기에 더욱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도 강해진다. 부모자식도 없다. 형제도 없다.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지이고 공신이더라도 권력 앞에서는 타인일 수밖에 없다.

조선의 태종은 이복동생인 방번과 방석을 죽였다. 아저씨라 부르던 정도전도 죽였다. 친형인 방과마저 유배보냈다.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죽였다.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을 죽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산군이 실정을 했을 때는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중심으로 사대부들이 모여 반정을 일으켰고, 역시 광해군 또한 조카인 능양군이 주도한 반정에 의해 왕위에서 내쫓기고 있었다. 영조는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죽였고, 대원군은 자신을 내쫓은 며느리 명성황후를 제거하고자 외세의 힘을 빌기도 했었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유교사회에서는 건국초와 같은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왕족의 정치참여에 대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왕이 내쫓기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상관이 없는데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피가 흐른다. 피가 흐르면 당연히 혼란이 찾아오고, 또 그 피를 흘리게 만든 이들이 자기 몫을 찾으려 들게 된다. 드라마에서도 의성군을 역모로 몰아 죽인 대비 윤씨(김영애 분)과 외척 윤대형(김응수 분)이 자기 몫을 찾아 권력을 쥐게 되는 것이 그런 예다. 공신에게 주어지는 이익이란 필연 다른 이에게 돌아가야 할 것들이기 쉬웠다. 차라리 아예 권력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그와 같은 불행을 막자.

사실 그런 이유에서 부원군이란 조선사회에서 그다지 영양가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김조순이 정조에 의해 아직 어린 순조의 후견인으로 선택되기까지 오히려 왕의 외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왕실과 사대부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고 있었다. 물론 그렇더라도 왕의 장인이고 혹은 외조부이기에 상당한 지위와 권세를 보장받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권력의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입장이었다. 조선이 가장 잘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권력을 쥐고 독주할 수 없도록 철저한 견제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전근대사회로서의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영정조의 탕평으로 말미암아 그 균형이 무너지기까지 그런 것들이 조선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다시 말해 드라마에서처럼 권세를 이어가고자 국혼을 노리는 경우는 최소한 조선중기까지만 하더라도 그다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조선 명종 연간 문정왕후와 그의 외척인 윤원형에 의한 세도정치가 나타나고 있기는 했지만 윤원형조차도 사실 부원군 - 즉 국구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정왕후가 어머니의 정으로 명종을 압박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으로써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 역시 바로 제거되게 된다. 사실 이 부분도 극적 재미를 위한 의도된 오류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래서 조선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바로 왕족과 왕의 사위인 부마들이었다. 처음에는 왕의 사위도 군의 칭호를 받았다. 그때는 관직에 나가 군사를 이끌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미 세종 때에 부마에 대한 작호는 군에서 위로 낮춰졌고 이후 왕의 딸과 혼인한 부마들은 철저히 권력에서 배제된 채 왕이 딸과 함께 딸려보낸 막대한 재산과 왕의 사위라는 지위만을 누리며 만족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딱 그만한 인물들만을 부마로 골랐다. 부마의 자리라도 노려야 하는 한미한 집안이거나, 아니면 부마가 되어도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그런 인물들이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김안로와 같이 부마를 가족으로 두었다는 이유로 권세를 누리는 경우도 있었다. 어쨌거나 어쩔 수 없이 그런 인물들과 혼인해야 했던 조선 왕의 딸들도 그다지 신세가 좋지만은 않았다. 이야기에서처럼 남달리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가지고 있어 딸을 주어 그를 측근으로 끌어들이는 것과 같은 일은 최소한 조선에서는 없었던 셈이다.

왕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이 되지 못한 왕자라는 것은 나머지에 불과하다. 만에 하나라도 지금의 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이 왕이 된다. 그러나 그 전에는 오히려 왕의 자리를 노릴 수 있는 위험요소에 불과하다. 더구나 자신은 가만히 있으려 해도 왕자라는 신분으로 인해 주위에서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세조만 하더라도 당장 힘을 가진 종친이라는 이유로 김종서가 그를 죽이려 했고, 또한 종친이기 때문에 한명회와 같은 이들이 모여들어 야심을 품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의 입장에서도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사촌형제 구성군의 존재가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철저히 죽어 지내야 했었다. 차라리 파락호가 되는 것이 낫지 괜히 재능을 드러내다가는 언제 어떻게 죽는지 모르게 죽을 수 있었다.

사실 왕(안내상 분)은 무척 아들 양명군(아역 이민호)을 위해주고 있는 것이다. 왕이 그렇게 거리를 두고 배척하지 않으면 자질이 뛰어난 만큼 그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사람들이 모이면 구설에 휘말리고 자칫 정쟁의 희생양이 되어 언제 어떻게 죽임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왕의 아우인 의성군이 그렇게 죽었다. 왕이 되지 못하는 왕자의 처지란 그렇게 비참하다. 세조의 찬탈 이후로 더욱 왕이 되지 못한 왕족에 대한 통제는 강화되고 있었다. 관직에도 나가지 못하고, 정치적인 활동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오로지 왕족이기에 누리는 몇 가지 이권에만 의지해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 그러다가 왕실에 후사가 끊기면 후사를 이을 수 있는 핏줄을 제공하는 것, 파락호로써 살아가다가 자신의 아들을 효명세자 - 익종의 비였던 신정왕후 조씨의 양자로 들여 일약 대원군으로까지 불리게 된 흥선대원군의 예를 보면 알 것이다. 말이 왕족이지 그 신세가 여느 사대부가만도 못했다. 양명군과 그의 후손 또한 아마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마 드라마의 배경이 조선인 이유일 것이다. 궁궐이라는 공간이 주는 화려함과 그 화려함 뒤에 가려진 애잔함의 그늘, 장차 왕이 될 세자의 빈을 간택하는 자리일 텐데도 그 영광된 자리에 딸을 보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이란 그다지 편치만은 않다. 아직 어린 민화공주(아역 진지희)가 제아무리 남달리 뛰어난 외모와 자질을 보이는 허염(아역 시완)을 사모하여 그를 원하여도 그가 가진 재능이 뛰어나기에 오히려 왕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여줄 수 없다.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양명군이지만 그의 남다른 뛰어남이 도리어 장차 왕이 될 세자 이훤에게 해가 될 수 있어 아버지인 왕은 그에게 솔직하게 사랑을 베풀지 못한다. 모두가 권력이 가져다 준 비극일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협박하고, 아들은 그런 어머니를 위협하고, 모자지간의 정보다는 권력을 사이에 둔 정적의 대립이 있다. 그런 가운데 오롯하게 서로에 대한 순수한 마음만을 이루려 하는 세자 이훤(아역 여진구)와 어린 허연우(아역 김유정)의 사랑은 얼마나 풋풋하고 사랑스러운가?

바로 비극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화려함과 화려함 뒤에 숨은 슬픔, 그 슬픔을 만들어내는 살벌함과 그런 가운데 꽃피우는 사랑스러운 해맑음, 역설이 비극을 심화시키고, 심화된 비극이 더욱 희망을 갈구하게 만든다. 안타까워하게 연민하게 그리하여 진심으로 바라도록 만든다. 저들은 행복하기를. 세상이란 원래 슬픈 것이라 그런 가운데서도 저 어린 순수한 마음만은 지켜지기를. 드라마가 인기있는 이유가 아닐까? 세자 이훤과 허연우가 만나는 바로 지붕 위에서 꽃가루를 흩뿌리던 상선의 마음이 바로 관객의 마음이다.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오히려 궁궐의 살벌함을 주욱 지켜봐왔던 상선이기에 더욱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런 점에서 역시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성수청의 도무녀로써 언젠가 사라지고 말 전통의 운명에 대한 비애를 느낀다. 언젠가는 유학자들에 의해 사라지고 말겠지만 자신의 대에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왕실을 지켜야 하는 성수청과 그러나 성수청을 지키기 위해 이미 왕실의 식구가 된 세자빈을 죽여야 하는 현실과, 결국 원작에서 도무녀 장씨(전민서 분)은 그러한 모순 가운데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현실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지켜야 하는 사명 또한 저버리지 못한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비극의 한가운데 있게 만들고 마침내 후회하며 죽도록 만든다. 그녀의 마지막은 참으로 비감했었다.

그러나 친구의 유명을 받들고 있는 지금의 도무녀 장씨에게서는 그와 같은 비극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돈된 화려함만이 느껴질 뿐이다. 사실 그런 부분이 성수청에 대해 그다지 깊이 느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통의 무격이란 바로 한이 부르는 신명이었다. 도무녀가 입고 있는 화려한 의복이 아니라, 그녀가 추는 멋드러진 춤사위가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깊은 슬픔이었다. 뭇백성들과 공감하는 그러한 슬픔이야 말로 무격의 아름다움이었을 텐데. 슬픔이 배제된 화려함이란 참으로 공허하다.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느끼는 아쉬움일 것이다.

비극에 이끌린다. 그러면서도 희망을 보고자 한다. 슬픔의 끝에서 함께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을 판타지라 부른다. 현실에서 비극은 단지 비극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런 비극을 딛고 사람은 웃으며 살아간다. 판타지란 또한 현실이다. 현실이 판타지다. 드라마를 보는 이유다.

벌서 16살의 세자 이훤이 13살짜리 허연우에게 이끌리는 심정을 알 것도 같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되바라지게 사랑스럽다. 표정 하나하나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물론 풋사랑의 감정에 취해 어쩔 줄 몰라하는 이훤의 나이다운 순박함도 무척 보기에 좋다. 어린 설(서지희 분)은 동글동글한 것이 딱 조카 삼았으면 좋겠다. 성인연기자로 넘어가게 되면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즐거움들이다. 드라마 만큼이나 아역 연기자들이 사랑스럽고 보기에 즐겁다.

드디어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간다. 허연우는 세자빈으로 간택되었고, 세자빈의 자리를 노리는 대비와 윤대형은 그녀를 죽이려 한다. 허연우의 죽음을 중심으로 숨가쁘게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후 7년이라는 시간동안 드라마에서는 어떤 일들이 펼쳐지게 될까? 흥미롭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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