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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1.09 10:53

나는 가수다 "그냥 하고 싶었어요, 무대의 본질을 깨닫다!"

가수는 노래를 부르고 관객은 그것을 듣는다. 순위는 결과일 뿐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잊고 있었다. 맞다. 과연 히트할 수 있을 지의 여부도 모르면서 음악인들이 제 돈까지 들여가며 음반을 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언제 빛을 보리라는 기약조차 없이 음악을 부여잡고, 고작 지인 빼면 손으로 꼽을 정도만 찾는 공연을 무리해서 연다. 어째서?

그곳에 무대가 있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가 있고 그것을 들어줄 관객이 있다. 순위는 다음이다. 그래서 꼴찌를 하고 떨어지든 그런다고 여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처럼 경연에서의 순위가 그들의 음악인생을 결정지을 것도 아니다. 여전히 그들은 공연을 할 테고 기회가 되면 음반을 낼 것이다. 무대가 있으니 서고 관객이 있으니 노래를 부른다. 당연한 이치다.

결국 신효범은 가수였다. 말할 것 없이 대중가수였다. 대중을 바라고 무대를 바란다. 무대에서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기를 바란다. 관객이 그녀의 노래를 듣고 감탄하고 감동하여 박수를 쳐준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감동받아 힘껏 박수를 쳐주는 이가 있다면 무대에 서는 의미가 있다. 그를 위해 음악도 하는 것이다. 멋지다.

과연 신효범의 무대는 말할나위 없이 훌륭했다. 노래란 어떻게 부르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듯했다. 마치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듯. 읊조리는 듯 힘을 빼고 들려주는 도입부뫄 점차 고조되며 격정이 넘치는 애드립으로 넘어가는 후반부, 다만 마지막에 마치 과시하듯 고음을 내지르는 부분은 조금 오버였다. 아마 데몬스트레이션이 아니었을까? 나는 신효범이다. 신효범이 돌아왔다. 관객들에 자신을 알린다. 자기의 목소리를 알린다. 그 부분만 빼면 노래는 완벽을 넘어섰다. 최고였다.

신효범이 부른 '이별연습'의 마지막 과도한 애드립까지 포함했을 때 가장 좋았던 무대는 다름아닌 적우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였다. 바로 이런 것을 신명이라고 부른다. 환히에 넘쳐 부르는 찬가였을 것이다. 적우의 영혼으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다. 영혼으로부터 느껴지는 희열이었다. 그녀는 진정 자기의 모든 것을 던져 노래를 부른다. 어느새 어깨를 들썩이고 심장은 거침없이 뛰고 무대에 매료된다. 어린아이 같이 순수한 적우의 미소도 좋다. 어떻게 저 나이에 저처럼 해맑은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2위는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역시 최고의 무대였다.

윤민수의 '짚시여인'에 대해서는 김현철과 평가를 같이한다. 왜 하필 '짚시여인'이었을까? 가사가 주는 의미와 전혀 맞지 않는다. 가사는 상당히 관조적이고 애잔한데 무대는 지나치게 격렬하다. 다만 곰곰히 씹어보면 어쩌면 이것은 역설의 미학 아니겠는가? 상당히 멋지게 폼잡고 떠나간 그녀에 대한 조롱과 분노. 나는 이렇게 아프고 힘든데 그녀는 너무나 우아하고 아름답다. 과연 나는 무언가? 내게 있어 그녀는 어떤 존재인가? 중간에 랩도 아니고 노래도 아닌 반복된 대사는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나의 사랑은 당신에게 의미가 없는 것인가? 상당히 박력이 있었고, 아마 가사와의 불일치만 아니었다면 상당히 높은 성적을 기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미에 대해서는 아마 <나는 가수다>라는 사실만 몰랐다면 임정희가 부르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장기호 교수의 말에 동의한다. 중저음이 매우 깊고 매력적이다. 한껏 감정을 머금고 부르는 것이 확실히 80년대 임정희의 스타일과 2000년대 거미의 스타일을 구분짓는다. 노래에 충실한다. 오로지 노래만을 부르고 들려준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요즘에 그다지 듣기 힘든 미덕이다. 가창력을 자랑하고 싶었을 텐데, 그러나 가창력이란 어떤 아크로바틱한 기교가 아니라 노래를 대중에 전달하는 진정성이다.

테이의 경우는 아마 자기가 먼저 노래를 느껴버린 듯하다. 청자에게 들려주는 노래여야 하는데 자기가 먼저 느끼며 부르고 있다. 힘이 나뉜다. 테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부분과 청자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부분, 상당히 심심하다 여긴 것이 그래서다.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웅얼거리며 혼잣말하듯 절반은 자기가 삼키고 있었다. 그렇게 흐르는 땀을 처음이었다.

김경호와 '밤차'는 최악의 조합이었다. 물론 필자의 생각이다. 샤우트란 말 그래도 호소다. 절규다. 그런데 '밤차'의 정서는 자조다. 체념이다. 미련을 희망삼아 견디려는 애잔함이다. 그런데 김경호의 샤우트는 그것을 직접 내질러 버린다. 감정을 머금어야 하는 중간이 없이 그대로 김경호의 목소리를 통해 바로 들려 버린다. 이건 '밤차'가 아니다. 최소한 이렇게 부를 것이었으면 가사는 바꿔 불렀어야 했다. 전혀 가사가 들어오지 않았다. 김경호의 춤만이 보였다. 리메이크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원곡이 갖는, 특히 가사가 갖는 느낌은 살렸어야 하지 않을까?

박완규는 꼴찌를 예감했다. 선곡이 나빴다. '내일을 향해'는 멜로디 자체가 매우 단순한 노래다. 경연에 어울리는 드라마틱한 구성의 노래가 아니다. 단조로운 멜로디와 단조로운 반복, 더구나 멜로디에 약간의 뽕기가 있어 박완규의 약간 끄는 듯한 비브라토와 안 좋은 상성을 보인다. 연주는 메탈지향의 질주하는 스타일이지만 노래를 소화하는 박완규에서 브레이크가 걸린다. 달리지도 못하고 빠져들지도 못한다. 도입부는 무척 흥미로웠다. 그러나 나머지는 아니었다. 지루했다.

아무튼 결국 조용필이며 김창완이며 <나는 가수다>에 비판적이던 선배가수들마저 고집을 꺾고 출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하기는 조용필 자신도 말하고 있었다. 여전히 가수들과 노래에 순위를 매기는 것에 대해서는 좋게 생각하지 않지만 대중들이 좋아하니 출연을 결심했노라고. 대중가수로서 그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한가? 자신의 노래를 듣고자 하는 대중이 있고, 그들을 위한 무대가 있고, 그 무대에 서달라 섭외가 왔다. 당연히 서는 것이다. 평가는 나중에 해도 좋다. 그것이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오랜만에 보고 있으려니 한창 때에 비해 많이 힘이 빠진 듯하다. 전반적으로 무대에서 압도하는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한결 편안하다. 어쩌면 그것은 필자 개인의 변화인지도 모른다. 신효범의 주문에라도 걸려든 듯 순위는 아랑곳없이 무대 자체만을 즐긴다. 누가 1위를 하고는 나중 문제다. 다만 이 순간 무대가 있고 가수가 있고 노래가 있으니 그것을 즐긴다.

결국은 마음먹기에 달렸을 것이다. 순위를 보는가? 아니면 단지 무대를 즐기려는가? 내 돈 내고 들어도 아깝지 않은 가수이고 무대였을 것이다. 좋은 가수의 좋은 노래를 듣는다. 그 한 가지면 충분할 것을. 그래도 꼴찌하면 탈락이라는 것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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