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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2.01.09 09:13

남자의 자격 "어느새 돌아보니 스스로에 대해 묻게 되다!"

중년의 방황과 혼란에 대한 쉽지 않은 답을 구하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조각이란 상처를 내는 것이다. 정으로 쪼고 끌로 깎는다. 줄로 다듬고 사포로 마무리한다. 과연 아무런 상처 없이 아름다운 조각이란 가능하겠는가? 그리고 상처란 결을 따라 나는 것이다. 인위의 조각품이 아닌 자연의 조각품은 그렇게 결을 따라 자연스런 모습으로 완성되어 간다.

사람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누구나 상처가 있다. 다만 그 상처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김태원이 오히려 PD교체와 그에 따른 멤버의 교체사실을 듣고 놀라고 당황해하면서도 PD를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아픔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그렇기 때문에 김국진은 애써 태연한 척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담담히 사실을 받아들이던 양준혁이나,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혹시나 PD에게 마지막 부탁을 건네는 이윤석이나, 그에 비하면 아예 묻지조차 못하는 윤형빈은 아직 어리다. 이미 모두는 그러한 상황들에 경험이 있다. 다만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이경규는 베테랑이다. 예능인생 30년이다. 그동안 PD를 몇 명이나 보내봤을까? 출연자도 많이 교체되었을 것이다. 상황에 익숙하다. 익숙하다 못해 그런 상황에서조차 냉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프로그램을 위해서도,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그런 상황에 프로그램에 남아 있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모두를 위해서라도 모두 남거나, 모두 떠나거나, 정히 안된다면 한두사람 교체하는 것이 낫겠다. 상처는 인간을 단련시킨다.

사실 이경규의 공황장애는 바로 실험카메라를 통해서도 예견된 바 있었다. 그토록 스스로의 진정성에 집착하고 있었다. 진정성을 의심받고 싶지 않다. 진정성을 인정받고 싶다. 그토록 자기 자신에 엄격한 사람이다. 그가 어떻게 아직까지도 최고의 예능인으로서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부분일 것이다. 가혹할 정도로 자신에 엄격한 그러한 태도는 결국 강박으로, 공황장애로 이어진다. 자기에 관대한 사람은 공황장애와도 거리가 멀다. 30년이나 최고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채찍질할 수 있기에 그는 최고인 것이다.

김국진의 외로운 그림은 그의 삶과 그가 겪어야 했던 상처들을 보여주었다. 김태원의 그림에서는 그의 자폐적인, 그러나 세상으로 나오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현무는 대범한 사람이다. 사소한 부분은 사소하게 무시할 줄 안다. 그것이 잔정이 없어 보일 수 있지만 그는 항상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다만 그것이 비겁하게 보일 수 있다. 반대로 이윤석의 경우는 소심하게 상황을 수용하며 의지하려는 야간 모습을 보이지만 굳이 책임을 피하려 하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남자의 자격>에서 가장 올곧게 보수적인 사람이라면 이윤석일 것이다. <무한도전>에서 하차할 당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하니 얼마나 놀랐을까? 그러나 혼자인가 아니면 결혼하여 가족이 있는가에 따라 반응도 이렇게 달라진다. 가족을 위해 비굴할 수 있다는 것도 용기다. 윤형빈은 결국 <남자의 자격>에서 보여진 모습 그대로였고. 양준혁도 솔로인 것이 이유가 있다.

결국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자리일 것이다. 그들이 서 있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그들 자신일 것이다. 미처 돌아보지 못한 진실. 세월이 깎고 다듬고 덧붙여 만들어낸 진체.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다.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그리 되도록 조종한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이 겪어온 삶이었으며, 그 삶 가운데 그들 스스로 선택한 결과였다. 그래서 지금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서 있다.

모르고 있을 때는 모른다.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막연히 알면서도 부정하려 든다. 그러면서 더 혼란에 빠진다. 그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그러나 알고 나면 다르다. 인정하고 난 다음에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구원이다.

모든 갈등과 분쟁의 원인일 것이다.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보려 하지 않는다. 모두는 약하다. 모두는 어리석고 한심하다. 불완전하다. 그래서 문제가 불거진다. 그런데 하물며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로 보려 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러는가 왜 그러는가도 모르고 막연히 불안하고 두려울 뿐이다. 하기는 그래서 중년의 사춘기인 것이다. 이루어 놓은 것은 많고, 따라서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그것들 때문에 현실을 인정하기도 힘들다. 자기가 생각하는 현실과 실제의 현실이 괴리를 일으킨다. 어려서의 사춘기가 성장해가는 자신의 몸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라면, 중년의 사춘기는 삶에 부대끼며 어느새 다른 모습이 되어 있는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일체화의 과정일 것이다. 나는 나다.

한결 후련해 보였다. 이유를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갈등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이유를 알았을 것이다. 불안하고 답답한 이유도 알았을 것이다. 몰라서 두려운 것이지 알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그조차 인정하고 나면 굳이 부대껴 할 필요도 없다. 나는 지금 이렇다.

전같지 않다. 몸도, 마음도, 정신도. 가족관계도 마찬가지다. 교우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데 그러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먼저 자신은 누구인가부터 대답해 보라.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서 있는가? 중년이 아니라도 필요한 과정일 것이다. 지금을 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남자의 자격>다운 미션이었다. 그야말로 그들 또래의 이야기였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않기에 더욱 두려운 나이, 그리고 그런 나이를 공유하는 이들이 들려주는 답이었다. 정답은 아닐지 모르지만 힌트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이야기다. 우리의 이야기다. 의미있었다.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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