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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사회
  • 입력 2012.01.02 17:37

왕따, 억압적이고 획일적인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보다!

오히려 왕따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책임을 강요당하는 모순된 현실에 대해..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아마 중학교 수준에서 배우는 내용일 것이다. 인간이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그다지 지켜지지 않는다.

아니 사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도 관계가 있다. 인간은 원래 인간 자신을 목적으로 여기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집단의 가치와 정체성을 개인의 가치와 정체성의 위에 놓는 경우가 흔함을 뜻하는 것이다. 집단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 당연하고 미덕으로 여겨진다. 바로 그로부터 몰인간과 인격상실의 문제가 발생한다.

당장 왕따라는 것이 일어나는 근본원인일 것이다. 과연 우리사회에만 왕따라는 것이 있는가? 다른 사회에서는 왕따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 지금에만 왕따는 존재하는가?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사는 것과 왕따의 존재는 항상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따란 상징이다. 집단에 어울리지 못하는 대상을 찍어내고, 몇몇의 시범케이스를 통해 다수의 구성원들에 경고를 한다. 대표적으로 군대에서 일상으로 벌어지던 고문관에 대한 왕따가 있을 것이다. 고문관에 대한 따돌림은 경우에 따라 군기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권장되기도 했었다.

왕따라고 하는 사실이 학교나 주위에 알려졌을 때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아마 조금 어이없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정작 당사자가 되고 나면 전혀 행동을 달리하게 된다. 왕따로 인한 피해자에게 먼저 책임을 묻는다. 사람이 정상적으로 무리에 잘 어울리고 했었다면 과연 왕따를 당했겠는가? 학교의 왕따에 대한 무책임한 대응은 그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괜히 학교 시끄럽게 만들고 선생들을 불편하게 성가시게 만든다. 학부모나 학생들도 왕따로 인해 피해자가 입은 상처보다는 그로 인해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고 면학분위기를 해치는 것에 더 문제를 느끼게 된다. 오히려 그러한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만다.

어째서 그런 것이 가능한가? 그만큼 한국의 사회와 개인들이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집단문화 아래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모두가 1+1의 답을 3이라 말한다면 3이 맞는 것이다. 2가 옳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틀린 것이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모두를 위해서는 3이 정답이 되어야 한다. 외눈박이가 사는 동네에서는 눈이 두 개인 사람이 비정상이다. 차라리 자기 한쪽 눈을 찔러서라도 외눈을 만드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도저히 자기 한쪽 눈을 찌르지 못하겠거든 그것을 도와주는 왕따도 있는 것이다. 군대에서 말하는 고문관이 그런 경우였다. 왕따가 일어나고 그 사실이 알려졌을 때 단지 피해자와 어울려 주었을 뿐이라 말하는 가해자의 말은 결코 거짓말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설사 왕따가 일어나고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더라도 결국 집단의 논리에 의해 모든 것이 이해되고 해결된다. 과연 누가 왕따를 당했고 그로 인해 어떠한 피해를 입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로 인해 얼마나 상처받고 고통속에 사는가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보다는 얼마나 가치있는 다수의 개인들이 그로 인해 불편을 겪고 곤란을 겪는가가 더 중요하다. 고통마저도 계량된다. 가치없는 한 개인과 가치있는 다수, 혹은 집단으로. 답은 명징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라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주관적이고 온정적인 어떤 것이다. 그것은 다수가 정한다. 피해자는 그러한 다수의 논리에 의해 어느새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는 도리어 피해자가 되어 동정받는다.

하기는 그 또한 왕따가 갖는 영악함일 것이다. 괜히 집단의 논리를 거스르거나 그것을 뒤집을 수 있는 위협적인 상대에게 왕따를 하는 무모함따위 비루하고 나약한 인간에게서는 그다지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그보다는 적당히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오히려 탓을 하고 비난을 할 수 있는 만만한 상대를 찾는다. 학교와 가정이라고 하는 그들이 속한 집단이 그렇게 그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킨다. 그래서 그들은 옳을 수 있다. 그야말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어른들로부터 배운 바를 충실히 행동에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왕따를 저지르고서도 어른들의 말을 잘 따른 피해자가 되는 것이고, 피해자는 오히려 그들을 가해자로 만든 가해자가 되어 책임을 지고 비난을 듣는 것이다. 다수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가해자가 옳다. 

결국 왕따가 알려지더라도 피해자만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받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니 전혀 제 3자조차 어느새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혹시 피해자에게는 문제가 없었는가? 피해자에게 왕따를 당할만한 원인제공이 있지 않았겠는가? 얼마전 문제가 되었던 어느 만화가의 웹툰이 그러한 경향을 보여준다. 피해자에게도 문제가 있다. 피해자의 가족에게도 책임이 있다. '정상'적인 경우였다면 결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눈다. 정상이라는 보편의 - 보편적 다수의 논리가 피해자가 겪은 일들을 정당화시킨다. 가해자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과연 왕따란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 어떻게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는 집단 속에 동정받고 이해되어지는가? 피해자의 정의는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아니 비단 학교에서 일어나는 왕따만이 아니다. 과연 왕따사실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역시 왕따사건을 접한 학교나 학부모의 반응처럼 세상의 반응 역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게 된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비정상에 대한 아낌없는 증오를 보낸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났고 그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보다 그들이 생각하는 비정상에 대해 비난하고 증오를 표현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얼마나 더 엄격하게 가혹하게 가해자들을 비난하는가를 경쟁이라도 하려는 것 같다. 이를테면 세상으로부터의 왕따일 것이다. 과연 왕따의 가해자들에게는 그만한 이유는 없었겠는가? 세상 어떤 일도 이유와 원인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일상에서 보게 되는 모습들이기도 하다. 나와 다르다. 무언가 모두와 다르고 어긋나 있다. 그것을 나타내는 단어가 '비호감'이다. 그러한 '비호감'을 대하는 대표적인 행위로 '깐다'라고 하는 것이 있다. 당연히 까이는 것이다. 어째서? 그들이 정한 답에서 벗어나 있으니까. 서로가 서로의 정당성을 증명하며 한 개인의 신상을 파헤치고 그의 약점을 들추어 공격을 퍼붓는다. 만일 누군가 그것을 비판하고 제지하려 든다면 그 또한 같은 무리에 불과하다. 폭력은 그들에게까지 돌아가고 만다.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역시나 집단이라는 권력이 휘두르는 나름의 정의로운 폭력인 셈이다. '까이는' 사람은 까일만한 행동을 했고 그를 제제하는 것은 정당하다.

다른 것을 용납지 않는다. 못한 것을 용납지 않는다. 집단이 모든 것을 정의한다. 모두가 정의롭다. 그런 가운데 개인은 단지 하나의 부속에 불과하다. 그 모두를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거기에서 왕따는 일어난다. 아이들의 논리는 결국 어른의 논리다.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배우고 바로 행동에 옮기는가? 왕따가 일어났는데 피해자가 입었을 상처와 겪었을 고통보다는 내게, 내 자식에게 피해는 없을까부터 걱정하는 부모에게서는 그런 자식밖에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상식에서 벗어났다고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마저 증오를 배설하려고만 드는 사회와 어른들에게서는 그런 아이들밖에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 모두의 자신의 문제다.

대안은 무엇인가? 너무나 자명하다. 거꾸로 가면 된다. 집단이 중요하다면 집단으로부터 개인을 분리해내면 된다. 집단의 논리를 위한 희생양으로만, 수단으로만 여기려 한다면, 대신 개인을 독립된 존재로서 목적으로 존중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러나 말처럼 그리 쉽다면 처음부터 왕따와 같은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말했듯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관계된 것이다.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 무리를 유지하는 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어떻게 하는가? 인간이 위대한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에게 주어진 본능이라는 구속조차 이성의 힘으로 이겨내며 올바른 길을 찾아간다.

학습 뿐이다. 훈련 뿐이다. 그를 위해서는 자각이 필요하다. 무엇이 원인인가? 이 모든 일들의 원인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인정한다. 이것은 모두의 문제다. 어느 특정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새 구조화된 문제가 민감한 아이들을 통해 표출되었을 뿐이다. 어느새 왕따사실이 알려져도 집단의 힘을 이용해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을 압박하는 가해자 가족의 행동이나, 학교의 입장을 위해 피해자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드는 교사들의 행동양식이 아이들을 통해 그렇게 나타난다. 나아가 단지 아이들을 비난함으로써 스스로 책임을 면하려는 비겁함이 고스란히 그를 통해 드러난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그러한 자각을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이성이란, 정의란 완성된 어떠한 것이 아닌 그것을 이루어가는, 쟁취해가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다. 정확히는 얼굴을 마주하고서 침을 뱉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아무리 밉고 싫은 사람이더라도 얼굴을 마주하고 나면 약해지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독립된 개인이란 그같은 힘을 갖는다. 독립된 단위로써 마주하는 개인이란 그런 무게를 갖게 된다. 인간을 목적으로 여기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하나의 단위로서 독립된 존재로써 정면으로 마주하려 한다. 그것이 되지 않으니까. 그것이 두려우니까.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마 드라마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유독 관계를 중요시여긴다.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이나 사건이 아니라, 그것이 나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에 더 의미를 두고 가치를 둔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관계 그 자체를 독립적으로 인식하면 좋을텐데, 그러나 드라마를 보면서 어느새 주인공을 중심으로 그 관계에 선악을 나누게 된다. 옳고 그름과,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어 판단하고 결론내린다. 대중문화는 바로 그러한 대중의 숨은 무의식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한국사회의 다수의 대중은 과연 어떻게 사물을 판단하고 인식하고 결론내리는가? 관계 속에 답이 있고 결론이 있다.

아무튼 그래서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단순히 가해학생 몇몇을 처벌해서 끝낼 문제가 아니다. 관련학교와 관계자들만을 문책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대로라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게 될 판이다. 가해자가 처벌당했으니 피해자의 탓이다. 학교 관계자가 문책을 당했으니 피해자의 잘못이다. 학교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다. 전학을 가더라도 그러한 기억은 낙인처럼 피해자의 뒤를 따라다닐 것이다. 지금의 그다지 대수롭지 않는 불편과 곤란을 이유로도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고 있는 현실에서는 말이다.

근본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무엇이 문제이고 근본적으로 어떻게 그것을 풀어가야 하는가? 결국은 말한 인간을 존중하는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일 게다. 인간을 독립된 단위로서 보고 그를 존중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보다 인간으로서 자격을 갖추는 교육에 중점을 둔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상황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모두의 잘못이라 여기는 이유다. 대개 많은 사회적 문제는 사회 그 자체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안타깝다. 비단 죽은 중학생의 경우만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알게모르게 많은 왕따피해자들이 만들어지고 때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다. 상처가 쌓여간다. 더께더께 상처가 쌓이고 사람이 세상이 비명속에 일그러져간다. 대안은 무엇인가? 답은 있는가? 나는 전혀 상관없다는 방관자적은 태도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나 또한 당사자다. 자각이 필요하다. 단지 가해자를 증오하여 감정을 배설하기보다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일 것이다.

무엇이 괴물을 기르는가? 무엇이 왕따의 가해자와 같은 괴물을 길러내는가? 과연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일이기만 한가? 고민은 깊어진다.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무게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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