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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3.25 08:03

로열 패밀리 - 최후의 5분, 그 관능적인 긴장!

스스로 증명했고 이제 다시 증명받아야 한다.

 
군가에 그런 노래가 있다. 최후의 5분에 승리는 달렸다. 말 그대로다. 단 5분. 3월 24일 방영된 MBC 수목드라마 <로열패밀리> 의 8회 방영분에서 마지막 5분은 그렇게 숨가쁘게 길고도 짧았다.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치밀하게 짜여진 화면이 해일처럼 거칠고 사납다. 벅차다.

마침내 김인숙(염정아 분)은 손윗동서 임윤서(전미선 분)과 위치를 바꾸는 데 성공한다. 재벌가의 공주인 그녀를 철저히 궁지로 내몰고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는다.

“저것 치워!”

그것은 바로 전까지 김인숙을 향해 쏟아지던 경멸이었다. 무시였다. 공순호(김영애 분)의 그 한 마디는 이제까지 구성의 큰딸로써 JK의 큰며느리로써 모든 지위와 명예와 권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김인숙의 것이다. 그리고 임윤서가 김인숙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최고의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JK패밀리의 일원으로써, JK가의 며느리로써, JK그룹의 지주회사인 JK클럽의 사장으로 취임하는 그 순간, 그러나 드라마는 참으로 짓궂다. 그렇게 마음고생을 시키더니 마지막 순간에도 김인숙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것은 시련이다. 그리고 시험이다. 인간으로써의. 그녀가 그토록 증명하고 싶어했던 인간으로써의 마지막 시험이다. 최고의 순간 시험은 그렇게 최악의 형태로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아예 없었던 일처럼 묻어두고 잊고 싶었던 과거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 그것을 결코 포기할 수 없을 때 마치 저주처럼 그녀를 찾아온다. 과연 그녀의 선택은? 인간으로써의 그녀의 선택은?

차라리 그보다 일찍 나타났다면?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때, 그 무엇도 누리지 못하고 있을 때, 그때 그녀 앞에 그가 나타났더라면. 아직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때, 그러고서도 아무련 미련도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았을 때. 그랬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나 엄마야, 지훈아!”

“자식을 버려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네가 어떻게 알아?”

“이것이 내가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어쩌면 그조차도 거짓이었을까? 차라리 JK로부터 도망치자는 한지훈의 말에 어머니임을, 그리고 인간임을 절규하듯 토해내던 그 비명같던 외침마저도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거짓 가운데 하나였을까? 하지만 병준이를 포기할 수 없다는 그녀의 말은 상당부분 진심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로써 자식을 포기할 수 없다. 그랬기에 뜻밖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그리 동요하고 두려워했던 것이겠지.

아예 잊어버릴 수 있었다면. 아예 없었던 것처럼 잊고 무시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렇게 흔들릴 것도 없었겠지. 작가의 의도가 참 얄궂다. 어떻게 어머니로서의 모성을 그 시험의 대상으로 삼았을까? 병준에 대한 집착과 한지훈에게 보여지는 순진무수한 미소, 그리고 마주치고 싶지 않은 진실 앞에서의 또다른 돌변한 모습들.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한 그녀의 시험은 이렇게 가혹하다.

혼란과 경악, 그리고 공포. 연회장에는 사장취임을 위해 공순호를 비롯한 JK패밀리와 각계 인사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고, 그 사이 늦은 김인숙을 찾아 내달리던 엄기도(전노민 분)과 마주친 염정아는 공황에 빠져 있다. 염정아의 목에 걸린 곰목걸이와 의문의 청년의 가슴에 안긴 커다란 곰인형. 한지훈의 방에 놓인 커다란 곰인형과 청년의 가방에서 뒤를 돌아보고 있던 똑같은 모양의 곰인형. 청년은 건물의 밖으로 비틀거리며 빠져나가고, 김인숙은 다급히 연회장으로 들어선다. 청년이 건물을 빠져나가는 순간 김인숙도 연회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 연단에 선다. 굳어 있던 한지훈의 얼굴이 밝아지고 굳어 있던 김인숙의 얼굴도 어느새 환한 웃음으로 바뀐다. 건물을 빠져나와 어디론가 가는 청년과 김인숙을 마주하고 환한 웃음을 짓는 한지훈과. 드라마는 심화된다. 감정과 긴장은 고조되어 어떤 막다른 끝으로 달려가는 듯하다.

마치 몽타쥬처럼. 어떤 구체적인 정황이나 묘사조차 없이 그 모든 것을 압축해 보여준다. 대사 한 마디 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농축해 들려준다. 그것은 드라마가 이제까지 걸어온 이다. 그리고 동시에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다. 한 편에서는 행복의 정점에서 자신의 과거를 도려내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다른 한 편에서는 그녀의 인간으로서의 일부가 비틀거리며 건물에서 빠져나간다. 그녀의 가슴에서 흔들리는 곰목걸이와 가슴을 꽉 누르고 있는 청년의 곰인형. 과연 임윤서가 ‘저것’이 되어 끌려나갔을 때 염정아의 놀란 얼굴은 단지 청년을 발견했기 때문만이었을까?

인간으로서 최고의 위치에 섰을 때 역설적으로 그녀는 인간으로서 최악의 선택을 한다. 인간임을 스스로 증명하려는 순간 그녀는 인간임으 스스로 부정한다. 장차 청년의 정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겠지만, 정황은 청년이 누구인가를 너무나 분명히 말해준다. 그것은 일본의 불행한 역사이기도 한 동시에 우리의 불행한 역사이기도 하다. 가난하던 시절 막연한 꿈을 쫓아 무작정 이 땅을 벗어나고자 했던 서글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시 그녀가 자신이 딛고 있던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탐욕과도 같다.

이제 그녀는 JK의 사람이 되었다. 조현진이 말한 그대로 JK를 위해 존재하는. 아니 이기적인 탐욕만을 위해 존재하는. 가족이 가족이 아니다. 개인이 개인이 아니다. JK라고 하는 부와 권력 그를 위한 수단으로써 존재한다.

“JK에 이익이 되는 사람만이 가족이다.”

그것은 그 냉엄한 원칙이기도 한 것이다. 피가 이어져서가 아니다. 마음이 이어져서도 아니다. 인정에 이끌린 관계가 아니다. 이익이 되기에 가족이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가족이 아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점장이에 불과한 청운거사를 찾는 공순호의 모습은 의외의 나약함일 것이다. 매몰차고 단호해 보이지만 한 구석에는 점장이의 말에 의지하는 나약함이 있다. 그것마저도 김인숙은 이용해 버린다.

“어머니는 참 무서운 분이세요. 그런데 K는요 어머니보다 백 배는 더 무서운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빈틈을 파고들어 공순호에게 인정받은 것은 김인숙의 능력일 것이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어떤 불길한 예감으로 만일을 대비하는 것은 무리를 지켜야 하는 암호랑이로서의 신중함일 것이다. 그녀의 나약함조차 그녀의 강함의 이유인 것이다. 그녀는 그 순간에도 다음 싸움을 준비한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공순호는 K를 김인숙으로 인정했지만 아직 완전히 그녀를 믿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욕망의 정점에 섰기에 김인숙의 욕망을 인정하지만, 욕망마저 객관화할 수 있는 그녀의 냉철함은 김인숙의 집요한 이끌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불안감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그때는 한지훈과 조현진도 한 자리 하고 있을까? 여전히 인간이 아닌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공순호의 모습이 묘하게도 한지훈과 조현진과 어울린다.

어쩌면 김인숙에게 한지훈이란 어쩌면 아들 대신인지도 모른다. 청년이 비틀거리며 건물을 빠져나가고 혼란스런 표정으로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 한지훈의 모습을 발견하고 김인숙은 다시금 밝은 웃음을 짓는다. 오로지 한지훈 앞에서만 김인숙은 순진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어느새 김인숙을 떠올리며 얼굴을 굳히는 한지훈이란 또 하나의 비극을 예고하고 있을까? 어머니는 아들을 죽이고 아들은 어머니를 죽인다. 잔인한 존속살인의 현장. 권력은 그렇게 피보다도 진하고 향기롭다.

강충기(기태영 분)의 일반형사부 발령도 공교롭다. JK에 대한 수사를 강제로 접고 일반 강력범 수사를 맡게 되었을 때 사건이 일어난다. 원작에서의 한지훈의 역할을 강충기가 대신 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이 JK에 대해 수사하려는 강충기의 정의감에 대한 징계라는 점에서 그의 발령은 충분한 개연성을 갖는다. 본격적인 드라마의 시작을 위한 준비가 갖춰지려 하고 있다. 인간의 정점에서. 욕망의 정점에서. 그리고 타락과 몰락의 심연으로. 준비된 비극의 시작이다.

조동진(안내상 분)의 캐릭터가 무척 흥미롭다. 그동안 존재감이 없더니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서 그의 존재가 유독 두드러진다. 어쩌면 JK와는 어울리지 않는 평이함. 그것 때문에 공순호에게 불신을 받는 것일 테지만. 그는 자신이 바람피는 사실 자체에 분노하지 않는 임윤서에 도리어 분노할 정도로 임윤서를 사랑한다. 어쩌면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가족으로서다. 무능력하고 무존재해 보이지만 어쩔 수 없이 풍기는 사람의 향기란 어찌하지 못한다. 앞으로 역할의 변화를 기대해 볼 수 있겠다.

드디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려 한다. 이제까지가 프롤로그였다. 프롤로그였다기에는 장대한 인간의 서사였다. 김인숙은 스스로 인간임을 증명했고, 다시 인간으로서 증명받아야 한다. 이제까지는 김인숙 스스로 인간임을 증명했다면 앞으로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증명받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인간이었는가? 인간으로써 스스로 증명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증명과 상실의 경계에서. 인간이란?

5분이다. 아니 5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다. 66분의 전체 방영시간 가운데 고작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시간. 그러나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시간들이다. 그 압축된 감정들. 농축된 이야기들. 너무 진해서 심장에 좋지 않다. 지금도 두근거리며 떠오르려 한다. 아직도 벌겋게 취해 있다.

스포일러가 없도록 상당히 신경쓰며 쓰고 있다. 워낙 좋은 드라마인 때문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드라마를 그 내용을 미리 알아버리면 힘빠진다. 자세한 내용은 드라마를 보면서. 한 주가. 또 하루가. 그렇게 흥분되고 즐겁다. 그 알아가는 시간들이. 좋은 드라마는 일상의 활력이다.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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