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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2.28 09:37

뿌리깊은 나무 "정기준, 백성은 지혜를 가짐으로써 속게 될 것이다!"

미처 하지 못한 나머지, 비로소 하게 된 한 마디, 의미를 생각한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이를테면 태평양전쟁 당시의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생산한 모든 재화는 전쟁물자로 공출당하고, 남성은 군대로 여성은 근로정신대로 각각 징집되어 동원되고 있었다. 날아드는 전사통지서와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의 비, 전장에서 총맞아 죽고, 총을 쏴보기도 전에 물에 빠져 죽고, 폭탄 맞아 죽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국민들은 어떠했을까?

에도시대 일본의 농민들은 끊임없이 도쿠가와 바쿠후의 바쿠한체제에 저항하고 있었다. 심지어 7할이 넘는 세금을 거두어 가는 경우마저 있었다. 흉년이 들면 수입이 줄까봐 오히려 더 많은 세금을 거두고 있었다. 당연히 살 수 없게 된 농민들은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근대화된 구일본제국에서 일본의 국민을은 그러한 절박한 상황에서조차 '팔굉일우'를 부르짖고, '대동아공영'과 '귀축미영'을 외치고 있었다.

어리석기에 속일 수 없다는 건 다른 것이 아니다. 요순시대에 불려졌다는 격양가에도 나와 있듯이 고래로 백성들이 바라는 바는 오로지 하나였다. 내가 내 힘으로 내 땅 갈아먹는데 괜히 성가시게나 하지 마라. 무언가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해주려 세금을 더 걷고, 역사에 남을 위대한 군주가 위대한 정복사업을 위해 백성들을 병력으로 징집하여 전장에 동원하고, 그래봐야 결국 백성들에 돌아오는 것이 무엇이던가?

흔히 하는 말이 있다.

"그것 하면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밥이 나오지 않으면 떡이라도 나와야 한다. 무어라도 좋은 것이 있어야 백성들에게도 좋은 것이다. 밥도 떡도 나오지 않는 위업따위, 대단한 업적다위 백성들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왕의 영광이 무엇이고, 나라의 번영이 도대체 무엇이던가?

실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의 백성들이 그랬다. 조정이야 일본이 쳐들어오네 뭐네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지만, 정작 물자를 징발당하고 노동력을 동원해야 하는 것은 다름아닌 백성들 자신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지어야 할 농사조차 제대로 짓지 못하도록 백성들을 내몰고 있으니 백성들로서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임진왜란이 일어난 초기 조정으로부터 이반하여 침략자인 일본군의 편에 서 조선군에 창을 들이댄 백성들마저 있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서포 김만중이 훗날 쓰기를 전쟁준비에 백성들을 더 이상 내몰지 않아 백성들의 마음을 잃지 않은 것이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말하고 있었겠는가?

고려조에도 몽골군에 쫓긴 거란이 고려를 침략해 왔을 때 많은 고려의 하층민들이 그에 동조하고 있기도 했었다. 이어진 몽골과의 전쟁에서도 강화도에 틀어박힌 채 백성들의 안위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세금이나 더 거두려 하는 최씨정권에 분노한 백성들이 오히려 고려 조정을 배반하고 몽골에 협력하는 일마저 있었을 정도였다. 밥이 하늘이고, 내 몸 편한 것이 순리다. 나를 편안케 하는 것이 내 나라이고,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 내 겨레다. 나라에서 백성을 제대로 보살피지 않으면 백성은 나라를 배반하여 멸망케 만든다.

조선에서 유독 백성들로부터 거두던 세금이 낮았던 이유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군포를 포함하더라도 조선의 세율은 조선백성이 농사를 지어 거두어들이던 생산물의 3할을 넘어서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리 못살겠다 했던 것이었다. 당장에 살기가 고단하니까. 정작 세수가 부족해서 관리들에게 충분한 녹봉조차 지급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래서 군비를 하려 해도 예산이 부족해서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차라리 군비를 줄이고 왕실의 재정을 줄여서라도 백성들이 내는 세금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어리석지만 그래서 속이기가 쉽지 않다. 오로지 백성들을 위하려 할 때만이 백성들은 진심으로 나라를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바뀌었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처음으로 총력전이라는 개념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전쟁이란 단지 지배계급 몇몇에게나 해당되는 일이었다. 지배계급 몇몇의 이익을 위해 백성들로부터 세금으로 거둔 그들의 재산으로 치르는 전쟁이었다. 백성이란 약탈할 수 있는 훌륭한 보급창고이거나 아니면 혹시나 전쟁을 틈타 반역을 꾀할 수 있는 위험한 제 3자에 불과했다. 그런 백성을 동원해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는 일이었다. 말했듯 백성은 제 배가 고프고 제 안위를 위협받으면 목숨을 걸고 저항하게 된다.

그런데 근대에 접어들며 국가라는 개념이 백성들에게가지 강요되기 시작했다. 백성은 국민이 되었고 민족이 되었다. 1차세계대전은 비로소 수직적으로 나뉘어 있던 세계가 수평적으로 국경에 의해 나뉘게 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의 인터네셔널은 와해되었다. 연대하던 노동자들조차 각각의 국적과 민족에 따라 징집되었고 혹은 자원했으며 전쟁에서 서로 총을 겨누고 싸우게 되었다. 민족의 영광이 개인의 안위를 대신했다. 백성을 착취하여 전장으로 내보내 죽음으로 내몰고 있음에도 오로지 국가와 민족만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아마 구일본제국의 상황에서도 에도시대의 농민들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일본정부에 저항하려 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미국에 협력하여 일신의 안위를 꾀하려고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반역을 의미했다. 정부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에 대한 반역이었고, 일본인이라고 하는 민족에 대한 반역이었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 당시의 피폐함을 그리워하는 이들마저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국민이란 어리석은 존재인가를 보여준다 할 것이다. 백성이라면 결코 그대로 속아넘어가지는 않았다.

결국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근대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나타날 때 그와 함께 나타난 것이 바로 국민교육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자유주의자 가운데는 공교육에 대한 경계와 적대감을 심지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국가가 국가의 필요에 의해 교육을 시킨다. 국가를 주입시키고, 민족을 강제하며, 그것으로 자신을 대체하도록 만든다. 국가에 충성하고, 민족에 헌신하며, 궁극적으로 권력자를 위해 봉사한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만든다. 각각의 개인을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길들이게 된다.

2차세계대전 당시의 파시즘은 그것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 경우였다. 히틀러는 그저 체코출신의 연금으로 먹고 사는 백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독일민족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 히틀러에 열광한 독일국민 역시 오히려 패전을 통해 더욱 강력하게 독일민족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이들이었다. 기꺼이 자발적으로 조국을 위해 희생한다. 애국주의의 열풍은 그렇게 독일을 거대한 파멸로 몰아가고 있었다. 파시즘이란 곧 '자발적'이라는 뜻이다. 일본의 경우도 과정이 약간 다르기는 했지만 텐노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신민에 의한 군국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러면 지금이라고 다른가? 당장 월급이 적어 먹고 살기가 힘들다. 도저히 이대로는 자식들 교육은 물론 기본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하다. 그래서 먹고 살겠다고 파업을 한다. 그러면 어느새 비난이 퍼부어진다. 국가경제가 볼모가 된다. 국가경쟁력이 그 이유가 된다. 그들은 반역자가 된다.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참으라. 모두를 위해서 개인의 어려움은 어떻게든 참고 견뎌야 한다. 영광을 위해서. 번영을 위해서. 국민소득 얼마, 혹은 선진국 진입을 위해서. 지금 내가 굶어죽을 판인데 수출 몇 달러에 국민소득 몇 달러가 고픈 배를 달래주고 마는 것이다.

물론 그런 한 편에서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익을 위해 당당히 정부에 항거하며 권력에 대항하는 국민들이 있다. 시민이라 부른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스스로 판단하여 실천한다. 다만 그런 경우에조차 그들이 주장하는 그것들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이 정의라 믿는 그것이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는가? 스스로 옳다고 여기고 행동에 나선 그것이 과연 진정으로 옳은 일인가?

독립되어 있다는 것은 지식으로부터도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혜로부터도 독립되어 있다. 누군가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자기 자신마저 의심하며 올곧게 진실을 쫓가 고민한다. 그것이 바로 이성이라는 것일 테지만 그것이 과연 쉬운가? 오히려 똑똑해서 더 속이기 쉽다. 정치에 대해 깊이 알수록 대중에 대해 회의하게 되는 이유다.

사실 정기준(윤제문 분)의 저 말은 정기준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과연 밀본의 가치는 정기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정기준 스스로 사유하고 고민하여 내놓은 결론인가? 그는 과연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독립적으로 판단하는가? 혹시 정기준은 오히려 지식인이기에 정도전의 사상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는 죽을 때까지도 밀본의 본원이었고 정도전의 조카였다.

차라리 강채윤(장혁 분)을 본다. 그는 단순하다. 정말 어리석을 정도로 단순하다. 그래서 그는 세종의 말에도 속지 않는다. 세종(한석규 분)이 아무리 좋은 말로 달래도 그는 절대 속지 않는다. 그를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소이(신세경 분) 뿐이었다. 한글이고 뭐고 오로지 소이를 생각하는 진심만이 그를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소이를 좋아하는 마음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을까? 그에 비하면 세종의 의지에 동조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린 소이의 결정은 그녀에게서 비롯되었는가? 혹시나 소이는 세종에게 속은 것이 아닐까?

항상 의심한다. 의심하고 의심해도 의심에는 끝이 없다.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근거조차 과연 옳은가 의심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중용이다. 의심하고 의심하여 올곧은 한 가지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의도하는 바를 찾아내는 것. 그것은 오히려 더 단순한 것이다. 오로지 당연한 한 가지다. 그것을 양심에 묻는다. 의심하며 또 의심하는 자기 자신에게 묻는다. 올곧게 자신이 진정 바라고 추구하는 바를 묻고 답을 구한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곧 옳은 것이다. 

오히려 너무 많이 알고 있기에 편견이 생긴다. 너무 많이 듣고 있어 선입견에 지배당한다. 자기에게 물으려 해도 자기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 물어도 답이 들리지 않는다. 알몸이 되었을 때 그것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양심의 알몸이다. 이성의 알몸이다. 가장 강하고 가장 확실한 믿음과 진실이야 말로 그것을 가리는 가장 크고 가장 두터운 장막일 것이다. 거짓에 가리워진채 진실이 무엇인가조차 알지 못하고 속고 만다. 지혜롭기에 속고 마는 이유다. 지혜가 없다면 오히려 속지도 않는다. 오롯한 알몸의 자신을 볼 수만 있다면. 

정기준의 마지막 말은 결국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이었다. 이데올로기 이전에는 그것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강요된 보편적 가치. 보편적으로 강요되는 가치. 개인의 판단을 대신한다. 개인의 정체성을 대신한다. 종교적인 광신이 오히려 교육이 보편화된 근대 이후에 나타나게 되었음을 생각케 한다. 성경을 읽을 수 없을 때 오히려 광적인 신앙은 드물었다. 성경을 스스로 읽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종교가 자신을 대신했다. 과연 우리는 속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지혜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이성이나 지식에 대한 부정도 아니다. 단지 경고다. 네가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바가 반드시 옳다고 여기지 마라. 가장 똑똑한 사람이 가장 사기당하기도 쉽다. 똑똑하다 여길수록 빈틈은 많은 법이다. 어리석은 자가 오히려 빈틈이 적다. 어리석지 않으려면 더 영리해져야 한다. 누구도 속일 수 없도록.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나머지였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한 가지이기도 하다. 백성은 어리석으나 속일 수 없지만, 그러나 지혜를 가짐으로써 속게 될 것이다. 사실 그것도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할 테지만 말이다. 속지 않는다. 경각심을 갖는다. 그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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