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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공소리 칼럼니스트
  • 칼럼
  • 입력 2015.11.18 08:06

[공소리 칼럼] 한국 여성들, 백 년 전 나혜석 외침보다 진보되지 않았다

▲ 나혜석 자화상 ⓒ나혜석

[스타데일리뉴스=공소리 칼럼니스트] 정월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에서 용인 군수를 지낸 아버지 나기정의 2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진명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도쿄에 유학 중이던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17세의 나이로 한국 여성 최초로 동경 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최초의 여류화가 개인전 등 성공을 이룬 신여성이었다.

나혜석은 유학 시절 등에서 <여자계> 발행 참여, 단편소설 <경희, 1918>를 발표, <학지광>, <이상적 부인> 등의 글을 발표했다. 또한, 임신·출산·육아 경험하면서 ‘아이는 엄마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신랄하게 서술한 <어머니가 된 감상기, 1922>로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고, 대표적으로 <우애결혼, 실험결혼>, <이혼고백서> 등 인습에 대한 입장을 강변하는 글을 발표했으나 사회적으로 냉대 받았다.

나혜석은 변호사인 김우영과 결혼하며, 신혼 여행지를 전연인 최승우 묘지를 방문하여 비석을 세우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또한, 다른 결혼 조건도 걸었다. 1) 일생을 두고 나를 사랑해 달라. 2)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라. 3) 시어머니와 전부인 딸과 따로 살게 해 달라.

내용은 사랑의 신의와 약속으로 보인다. 남편 김우영은 당시 나혜석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으로 보아 지극히 흠모한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신문물을 접한 근대적인 변호사 김우영도 여자들을 집에 데려와 잠자리하는 둥 대놓고 외도를 일삼았다. 나혜석은 남편의 외도에 불만이 많았고,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정조를 지킬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결국, 남편과 마찬가지로 외도하는데 유럽 여행 중 최린과 연인관계를 맺는다.

그녀는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라고 말했다. 그 시절 아무리 유학 생활과 유럽 순회를 거쳤다 해도, 동서를 막론하고 파격적인 가치관을 내세웠다.

당시 정조관념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엄격했고, 나혜석은 이혼당한다. '혼외정사는 진보된 사람의 행동.'이라고 주장한 나혜석은 아마도 규율과 인습에 대항하며 정체되고 사고(思考)하지 못하는 자들을 꾸짖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이혼 고백서에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라는 대목은 지금 보기에도 그리 낯설지 않다. 여전히 성적으로 봉건적인 모습이 남아있다.

나혜석의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인습에 대한 의구심은, 아버지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본다. 영향력 있는 아버지는 세 명의 첩을 두었고, 그중 한 명은 그녀보다 1살 많았다. 가정환경 속 분노와 가부장적 인습에 반발심을, 자유연애와 양성평등으로 눈을 돌렸다.

나혜석은 이혼 후 사 남매 자녀들과 강제로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자신을 원망치 말고 제도와 도덕, 법률, 인습을 원망하고, 자신은 과도기의 선각자이자 희생자라는 심정을 서술했다. 그녀는 언제나 신랄하고 정확하게 말했다. 진정성의 흐트러짐도 없이, 미래에 대한 통찰력으로 말하고 서술했다.

나혜석의 쓸쓸한 강변은 지금도 실현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에 나왔던 강변이 전혀 진보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금도 정조관념은 남성에게 더 관대하고, 여성에게 더 엄격하다. 법적, 사회 통념적으로 일부일처제지만 체제를 벗어난 관념과 시각은 관대하지 않으며, 공평하지도 않다.

우리는 왜 과거의 나혜석보다 진보된 사고를 외치고, 행동하지 않는 걸까? 근대를 지나 현대에도 한국 여성은 여전히 남성에게 의존적이며, 평등으로 나아가는 행동이 부족하다. 말로만 양성평등을 주장하고, 파격적인 성적 가치관을 내세우면 무엇하나?

여전히 남자가 토라진 기분을 알아서 풀어주길 바라고, 고된 일은 여자보다 남자가 나서서 하길 바라고, 술자리나 클럽에 나간 남자를 기다리며 불안해하면서 주체적인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여성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혹자는 말하고 싶다. 여성 스스로 주체적인 다음에야 성적 가치관을 내세울 수 있는 게 제대로 된 길이라고. 또한, 현대 여성으로 살면서 스스로 남성에게 의존하는 모습이 나혜석 이름 앞에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느냐고 묻고 싶다.

마지막으로 나혜석의 이혼고백서를 인용하고 싶다.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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