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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5.11.18 08:05

[김윤석의 드라마톡] 육룡이 나르샤 14회 "정도전과 땅새의 만남, 위로와 길을 찾다"

이방원의 결혼과 분이의 고백, 시대에 엇갈린 연인의 인연

▲ 육룡이 나르샤 ⓒS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육룡이 나르샤. 가장 듣고 싶었던 한 마디였다. 그러나 가장 잔인한 한 마디이기도 했다.

"스스로를... 용서하거라!"

네 탓에 아니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책임져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니다. 댓가를 치러야 하는 것도 네가 아니다. 차라리 그들을 미워하라. 그들을 원망하라. 대신 자신을 자유롭게 놓아주라. 행복해져도 좋다. 기뻐해도 된다. 조금 더 자신에 당당해지라. 자신을 사랑하라.

그러면 그동안의 시간들은?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버텨온 지금까지의 나날들은? 오로지 그것 하나만을 의지해 견뎌왔던 자책과 자학의 순간들은? 당장이라도 죽고 싶었고 이제라도 죽고 싶었다. 하지만 살아야 했다. 살아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속죄였고 사명이었다.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죄를 갚고야 말겠다. 변명처럼 그렇게 땅새(변요한 분)는 비겁한 자신을 인내하며 비루한 삶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아도 된다니.

부정당한 것 같다. 배신당한 것 같다. 그렇다면 자신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 고통의 시간들을 지나왔던 것인가. 그토록 자학하고 자책하며 스스로를 상처입혀 왔던 것이었는가. 이제 자신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금까지의 자신은 또한 이제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그럼에도 끝내 정도전(김명민 분)에게 칼을 겨누고도 베지 못한 것은 마른 논바닥처럼 단비같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갈라진 영혼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가장 절실한 위로였고 변명이었다.

분이(신세경 분)가 마지막 순간까지 이방원(유아인 분)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필사적이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난세를 산다는 자체만으로 모두가 죄인이 된다. 땅새는 연희(정유미 분)를 지키지 못했다. 분이는 무력한 오라비 땅새를 몰아세워 떠나게 만들었다. 연희 역시 모두를 버려두고 혼자서 떠나오고 말았다. 떠난 이들은 떠난 이들대로, 남겨진 이들은 남겨진 이들대로, 고통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난세이기에 그들은 서로에게 죄인이 된다. 그런데도 자신만 행복해도 좋은 것인가. 자신만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도 괜찮은 것인가.

고통스럽기에 오히려 달갑다. 힘들기에 오히려 더 기껍다.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 같다. 시대를 짊어져야 하는 이들의 공통된 모습일 것이다.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전혀 거리끼지 않는다. 죽어도 좋을 것이다. 차라리 죽으면 다행이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새로운 내일을 여는 동력으로 삼는 것은 과연 지식인의 역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무엇때문에 이토록 고통스럽고, 이토록 힘들며, 그렇다면 그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도전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까닭이다. 땅새처럼 그들도 정도전에게서 자신들이 간절히 바라던 위로와 새로운 희망을 얻는다. 살아갈 이유를 얻는다.

혐오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혐오하고 그런 자신이 손에 넣은 권력까지 혐오한다. 자신을 타락케 한 그 권력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자학에 가깝다. 그동안의 신중함이나 영활함마저 한순간에 모두 잃고 만다.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쥔 순간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을 고문했던 간수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때려죽인 것은 어쩌면 자신에 대한 환멸이며 증오였을 것이다. 끊임없이 탐욕하고, 끊임없이 증오하고 저주하며, 자신을 비롯한 모두를 비웃고 경멸한다. 이인겸(최종원 분)이 가만히 앉아서도 꿰뚫어 본 민제(조영빈 분)와 민다경(공승연 분)의 의도를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로 인해 해동갑족인 황려 민씨와의 혼인이 무산되었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지나치고 만다.

이성계(천호진 분)로부터 거절당한 것도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성계로부터 자신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읽는다. 이제부터 이인겸을 대신하여 도당을 주도하게 될 자신일 터였다. 고려의 최고권력자가 된 자신과 손잡는 것이 이성계에게도 훨씬 유리했을 텐데도 그는 가차없이 자신을 밀어내고 말았다. 그만큼 지금 자신의 모습이 이성계가 보기에 끔찍하도록 추악하고 흉물스러웠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애써 스스로 변명하며 위로해 보지만 이미 곪아 썩은 상처가 다시 한 번 벌어져 잊고 있던 아픔을 일깨운다. 정도전의 판단과는 달리 이성계의 선택은 효과가 있었다. 어찌되었가나 홍인방 역시 한때는 자부심높은 사대부였을 것이다.

책사의 역할이다. 결정은 오로지 주군인 이성계가 한다. 자신이 어떤 책략을 올리든 그것을 채택하는 것은 오로지 주군인 이성계의 몫이다. 이성계의 위에서 쥐고 흔들려 했다면 정도전 자신이 왕이 되어야 했다. 이성계를 읽는다. 이성계를 판단한다. 고단하지만 희망이 있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그러나 기대되는 것이 있다. 가장과 가족, 아버지와 아들, 조선을 관통하는 가부장적 성리학의 질서가 그렇게 벌써부터 이성계를 통해 구체화된다. 이성계는 아버지다. 왕은 한 나라를 책임지는 만백성의 어버이다. 백성이란 왕의 자식과 같다. 자신은 단지 이성계를 섬기는 책사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와는 또 다른 미묘한 신뢰다. 전적으로 서로를 따르지는 않지만 서로가 뜻한 바를 믿고 서로의 역량을 믿는다. 흥미롭다.

길태미(박혁권 분)가 땅새보다 한 치 쯤 강했다. 말했듯 무협이란 칼부림이다. 마초적인 원초의 칼싸움이다. 누가 더 센가. 누가 더 센 무공을 가졌는가. 한 번 싸워보고 땅새는 자기보다 길태미가 아직은 더 고수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만다. 백윤을 죽이면서 그의 호위무사를 단 두 수만에 제압하고, 비국사의 주지 적룡(한상진 분)에 대해서마저 우위를 보였던 땅새였다. 무휼(윤균상 분)의 실력은 아직 미지수다. 조영규(민성욱 분)의 말처럼 아직 이렇다 할 실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땅새와의 한 번 겨룸으로 그의 힘이 땅새를 한 번에 날려버릴 정도로 대단한 것은 보여주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우(이승효 분)의 실력 또한 아직 보여진 것이 없다. 유치할 정도로 노골적인 서열싸움이 작품 전반을 통해 일어난다. 그것이 전부다. 누가 더 세고 누가 더 약한가. 흥미요소다. 이름만 겨우 언급된 최고수 척사광의 존재도 궁금함을 더한다. 길태미를 이겼다는 쌍동이형 길선미도 등장할 것인가.

해동갑족이란 원래 특정한 가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단 한 번의 부침도 없이 대대로 고관과 명사를 배출하며 상당한 세력을 과시했던 가문들을 일컬어 부르던 이름에 불과했다. 최영(전국환 분) 역시 철원 최씨로 해동갑족의 하나였다. 다만 극적 재미와 흥미를 높이기 위한 장치로써 해동갑족을 특정한 가문으로, 그리고 특정한 세력으로 한정하여 고려를 움직이는 배후로써 설정한다. 바로 이들 해동갑족과 결탁함으로써 이성계는 비로소 도당의 권문세족과 맞서 조선을 건국할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역사와 따로 간다. 이미 벌써부터 이성계는 다양한 혼맥을 통해 중앙정계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황려 민씨의 딸과 전주 이씨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만나 협상을 하듯 청혼하고 계약을 하듯 받아들이는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고증과는 별개로 극적 긴장감을 높이며 색다른 재미를 준다.

홍인방과의 관계를 단절한 대신 고려를 지탱하는 실질적인 힘인 해동갑족을 끌어들여 연합을 맺는다. 홍인방이 이인겸을 밀어내며 최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던 스스로 치우게 된다. 한 발 물러서서 이인겸은 모든 상황을 관조한다. 정도전의 정체가 드러난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배후에서 상황을 유리하게 움직이려 한다. 책사와 책사의 머리싸움 가운데 실제 칼을 뽑아 부딪히는 무사들이 있다. 정도전을 암살하려 한다. 하필 그 장소에 벌써 정도전을 죽이려 땅새가 먼저 가 있었다. 연희도 분이도 모두 구해내고 싶지만 이미 난세는 그녀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의지로 혁명의 소용돌이 몸을 던지도록 만들었다. 운명처럼 땅새는 첫사랑과 유일한 혈육이 있는 그곳으로 한 걸음 내딛게 된다. 지금의 희생과 고통이 아닌 내일의 희망을 위해서.

자기가 자기인 채로 남아있을 수 없으니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새 여기까지 떠밀려오고 만 그런 시대니까. 그래서 난세일 것이다. 자기가 자기인 채 온전히 자신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으면 난세라 부르지도 않는다. 홍인방처럼. 연희와 땅새처럼. 이성계도, 정도전도, 이방원도, 분이도 모두. 그 자체가 이미 비극일 것이다. 수렁과도 같은 운명 속을 허우적거리며 버텨낸다. 절절한 아픔이 연희와 분이의 눈물, 그리고 땅새의 분노를 통해 드러난다. 누군가는 난세와 영합하고, 누군가는 난세와 맞서며, 누군가는 난세를 살아간다. 

어쩔 수 없는 분이와 이방원 사이의 간극을 확인한다. 스스로 희생양이 되고자 한다. 차라리 상처와 고통으로써 자신을 위로하려 한다. 이방원이 결혼하려는 순간 그들은 서로에게 진심을 고백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까지 단지 그것 뿐이라는 사실이 분이에게 느끼는 아쉬움이다. 더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한다. 여성인 것일까. 필수요소가 시작된다. 사랑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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