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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2.24 09:03

위대한 탄생 "드라마가 없다. 기대주도 없다. 멘토만 보인다."

오디션을 통해 바라는 공정함이란 정의이며 당위다. 당위가 보이지 않는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오디션 프로그램이 방영될 때마다 항상 공정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결국은 대중이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얻고자 하는 어떠한 가치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공정했으면 좋겠다. 객관적이었으면 좋겠다. 부당한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정의로웠으면 좋겠다.

어쩌면 대중이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보고자 하는 판타지일 것이다. 될 사람이 된다. 되어야 할 사람이 된다. 안 될 사람은 어차피 안 된다. 당위다. 그리 되어야 하는 당연한 법칙이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그 피해자라 여긴다. 부당하고 불공정한 사회와 구조에 의한 희생자라고. 그래서 바란다. 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공정성 논란이 불거지는 것이다. 내가 보았을 때 이 사람은 반드시 되어야 한다. 이 사람이 되는 것이 당연히 옳다. 저 사람이 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분명 다른 의도가 있다. 음모론이 생겨나고 각종 루머가 불거지고 서로 음해하고 싸우는 사람들마저 나온다.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옳다. 그것이 바르다.

문제는 과연 무엇이 정의인가? 사실 앞서 한 말에 그 답이 들어 있다. '당연히' 그리 해야 한다. '반드시' 그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위다. 당위란 순리다. 명제다. 정답이다. 그가 반드시 되어야 한다. 그는 당연히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법칙이다. 그러면 과연 누가 그러한 당위의 법칙의 대상이 될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서사일 것이다. 그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그에게는 자격이 있는가? 그에게는 그래야만 하는 필연이 있는가? 그에 공감한다면 그는 당위를 얻는다. 정의를 구현할 대상으로써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다. 그가 되는 것이 옳다. 거기에 자신의 정의가 있다. 아니 모두의 정의가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그는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가 하는 서사가. 그것은 시청자로 하여금 출연자에 자신을 이입하도록 만드는 주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떠한가? 사실 올초 김태원의 멘토스쿨이 거꾸로 <위대한 탄생>이라고 하는 프로그램 전체를 먹어치워버린 데에도 그런 것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서사가 있었다. 이야기가 있었다. 백청강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손진영이라고 하는 사연이, 그리고 김태원과 외인구단이라고 하는 드라마가 있었다. 오디션을 넘어서버린 김태원과 외인구단의 감동적인 드라마에 어느새 사람들은 설득되어지고 있었다.

"아, 이 사람들이 우승했으면 좋겠다."

그것을 다른 어떤 멘토도 뛰어넘지 못했다. 심지어 손진영이 4강에서 떨어지고 만 것도,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대중이 미리 써 놓은 시나리오 때문이었다. 셰인도 물론 훌륭했지만 그보다는 오디션을 통해 대중이 보고자 하는 욕망이 그리 미리 결정지어 놓았다. 오죽하면 그래서 김태원 때문에 <위대한 탄생>을 망쳤다고 말하는 사람마저 있다. 김태원과 외인구단 때문에 <위대한 탄생>이 더 이상 <위대한 탄생>이 아니게 되었다. 너무 일방적이었다. 생방송이 시작된지 겨우 한 주만에 모든 결과가 예상되고 말았다. 거의 그대로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확실히 올해는 이상적이다. 누구 하나 먼저 치고 나가는 사람이 없다. 나름대로 훌륭했던 이승환의 멘토스쿨도 그다지 작년처럼 상식을 깨 버리는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윤일상이나, 박정현이나, 윤상이나,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해 멘토에 따른 멘토스쿨의 차별성을 그다지 발견하지 못하겠다. 어색한 첫만남과 서로의 정을 돈독히 쌓아가는 과정과 그리고 중간평가와 최종평가의 결과 탈락자가 발생하며 눈물을 짓고 헤어지는 모습까지. 이때 쯤 울겠지. 이때쯤 이런 대사를 하겠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게 문제다. 덕분에 과연 이 사람이다 할 만한 대상을 찾지 못하겠다. 반드시 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람이 되는 것이야 말로 <위대한 탄생>이 만들어진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다. 당연한 결과를 너무나 당연하게 미리 예상한 대로 지켜보고 싶다. 그런데 없다. 흥미도 가고 관심도 가지만 그렇다고 그가 반드시 우승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까지는 갖게 되지 않는다. 그저 여러 참가자 가운데 하나일 뿐.

사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김태원의 멘토스쿨이 여럿이 되는 것이다. 서로가 반드시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당위가 여럿이어서 그만큼 더욱 치열하게 대립하며 다투는 것이다. 대신하여 레이스를 펼친다. 누군가는 푸니타를 지지하고, 누군가는 에릭 남을 지지한다. 누군가는 50kg이 되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그렇게 서로가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바를 쫓아 열기가 뜨거워지며 분위기도 달아오르게 될 것이다. 조용하다는 것은 그만큼 재미가 없다는 증거다.

얼마나 말들이 많았는가? 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사람은 절대 되어서는 안 된다. 온갖 곳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니 시즌2에서도 '위대한 캠프'까지는 그런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멘토들이 멘토스쿨을 먹어치워 버렸다. 멘토는 보이는데 멘티는 보이지 않는다. 멘토의 눈물은 보이는데 정작 멘티의 드라마는 보이지 않는다. 이입할 대상이 없다. 뜨거워질 대상도 없다.

과연 이제까지 누구의 멘토스쿨이 있었고 어떤 멘티가 어떤 성장과 발전을 보여주었던가? 사실 그다지 기억에도 없다. 노래야 어차피 멘토스쿨까지 갔을 정도면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은 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보다 못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놀라운 히트를 기록하며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조차 있다. 일정 수준 이상 되면 이미 자격은 되었다고 보면 된다. 다만 <위대한 탄생>이라는 오디션에서 우승을 할 것이냐? 혹은 몇 위를 기록할 것이냐? 그런데 그에 대한 어떤 기대도 없었다. 그들 자신이 만들어갈 드라마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없던 탓이었다.

어째서 어떤 가수들은 훌륭한 노래와 뛰어난 노래솜씨에도 히트를 기록하지 못하는가? 외모나 스타일에서 전혀 뒤지지 않음에도 항상 주류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가? 역시 프로가수 역시 서사다. 그들이 하는 말, 행동, 패션, 스타일, 노래의 장르나 가사의 내용마저, 무대에서의 매너조차 모두가 그를 나타내는 이야기이며 드라마인 것이다. 하물며 생판 아마추어들이 아무런 드라마도 없이 대중과 만나려고 하는가?

그나마 남았다. 가장 강력한 드라마를 가지고 있는 멤버가. 구자명도 이렇게 밋밋하게 갈까? 이선희란 얼마나 훌륭한 멘토이며 음악인으로서도 대단한 사람인가? 어떻게 이선희는 멘토로서 멘티들을 가르치고 성장시킬 것인가? 멘토 이선희의 눈으로 멘티를 보려 하고. 그래서야 이선희는 남을 지 몰라도 구자명은 남게 될 지 모르겠다.

아쉽다. 솔직히 지금 생방송 무대에 일단 각 멘토스쿨의 최종평가를 통해 올라가게 된 멤버가 누구인가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누가 되기를 바라는가도. 누가 되었으면 좋겠는가 하는 것도. 누군가 될 것이라는 기대나, 반드시 되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도. 그냥 지켜본다. 철저히 구경꾼으로서. 보거나 말거나 그것으로 그만이다.

시즌1보다 좋아졌다. 그러나 시즌1보다도 나빠졌다. 좋아진 것은 멘토들의 화학적 조합이 좋은 것이다.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시즌 1에 비해 어느 한 쪽으로 쏠리려는 것을 막는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래서 고만고만해진 탓에 주의가 흩어지고 흥미가 사라진다. 관심이 옅다. 하향평준화일까? 조금 더 뜨겁고 격해져도 좋으련만. 참가자만이 아닌 시청자도 함께 더 뜨거워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은 너무 잔잔하다.

이선희의 멘토스쿨을 기대해 본다. 그래도 조금은 다르리라. 예고편도 확실히 달라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스타일이 <위대한 탄생>의 멘토스쿨 스타일로 고착될 위험을 경고한다. 재방송은 원래 재미가 없다. 답습이란 사람을 지루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지금으로서는 그럴 여지가 보인다. 안타깝다. 멘티의 노래들은 재미있었다. 많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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