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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2.21 09:13

천일의 약속 - "비현실적인 침착함과 잔잔함, 미완의 비극으로 끝나다"

집에서 직접 보살펴야만 사랑이고 책임이라 여기는 낡은 결론에 실망하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실제 그런 경우가 있었다. 종손이었다. 오래전에 혼자 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어머니께서 치매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민했다. 과연 어찌해야 하는가? 자식된 도리로 어머니를 집에 모시고 가까이서 보살펴드려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부담이 너무 컸다.

결국 결론을 내렸다. 어머니를 요양시설에 모시자. 마침 아내도 일을 하고 있었기에 차라리 조금 더 돈을 들이더라도 시설 좋은 곳에서 편히 모시고 자주 찾아뵙도록 하자. 그러나 문제는 말했듯 그 사람이 한 문중의 종손이었다는 사실이다. 난리가 났다. 어찌 어머니를 버리려 하느냐? 치매에 걸렸어도 어머니인데 자식이 직접 보살펴야지 어찌 남의 손에 맡기려 하는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을 다시 보았다. 술김에 이야기를 들었다. 차라리 돌아가셔서 다행이다. 부부관계도 원만치 못했다. 온가족이 어머니의 병구완에 매달리느라 아이들마저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병을 앓는 자신만 피폐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위까지 피폐해진다. 병을 앓는 자신만이 기억을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위마저 그 기억을 잃어간다. 그 동안의 정과 사랑을 잊어간다. 지쳐가며 끝내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알츠하이머란 단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병이 아니다. 사랑을 피폐하게 만든다. 사랑을 소모케 만든다. 오랜 병에 효자 없다고 알츠하이머는 특히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과 사람을 위험한 시험에 들게 만든다. 과연 아무리 효자이고 마지막까지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신 이라고 가실 때까지 단 한 번도 원망하거나 차라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었을까? 그럼에도 그것을 죄스러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중의 고통인 셈이다. 차라리 그럴 것이면 전문적으로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보살펴주는 시설에 맡기고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자주 찾아뵙는 쪽이 낫지 않을까?

아내 이서연(수애 분)의 병으로 인해 남편 박지형(김래원 분)은 더 이상 자기 일을 못하고, 고모(오미연 분)마저 이서연을 보살피는 일에 매달리느라 매일매일이 고단하다. 그런데 그런 고모를 이서연을 알아보지 못하고 발길질까지 하기에 이른다. 아이는 불안해서 본가에 맡기고, 혹시나 이서연이 집을 나갈까 길을 잃을까 모두가 노심초사하고. 혹시라도 이서연이 사라지면 가족 모두가 달려들어 찾아 나서야 한다. 박지형이야 자기가 선택한 결과라지만 주위는 어떨까?

아니 가족들이야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니 그렇다 치자. 하마트면 이서연이 철길에 뛰어들 뻔 했을 때 만일 곁에서 누군가 막아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오랜 고통 속에 살아가게 했을까? 이서연이 혹시라도 교통사고를 당하면 그것도 문제지만 정작 분간을 못하고 헤매고 다니는 것은 운도 나쁘게 잘못 치어 사고를 일으키고 만 운전자의 입장을 생각하면 청천벽력도 이런 청천벽력이 없는 것이다. 이래저래 여러 사람 피곤케 한다.

이제는 시설들도 무척 잘 되어 있다. 예전을 생각하면 안 된다. 전문적인 자격증을 소지한 직원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고, 최대한 환자를 고려하여 준비된 시설들이 무리없이 환자로 하여금 일상을 영위케 한다. 안전사고가 일어날 일도, 그로 인해 주위가 곤란할 일도 없다. 물론 거기에서 일하는 살마들은 모두가 고되고 힘들다. 직업병 하나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다. 버리는 것이 아니다. 환자를 위해 최선의 환경에서 마지막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환자를 곁에서 보살피느라 일상이 피폐해지고 사람이 피폐해지고 마음이 피폐해지면 그것이 과연 환자 자신을 위한 것이던가 말이다.

물론 남의 일이니까 감동이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아내가 가는 길을 지켰다. 알츠하이머로 인해 더 이상 이서연이 아니게 된 이서연을 끝까지 지키며 보살폈다. 하지만 과연 그래도 좋은가? 마치 시설에 맡기는 것이 무책임한 일인 것마냥. 시설에 맡기고 보호를 받도록 하는 것이 그녀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는 것마냥.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그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것이다. 그런 선택도 물론 있을 수 있지만 드라마가 들려주는 뉘앙스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끝까지 함께 하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이다.

고령화로 인해 치매환자가 갈수록 늘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그로 인한 부담을 스스로 져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 과연 끝가지 환자와 함께 하는 것만이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것만이 책임을 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차라리 이서연을 시설로 떠나보내고 시간이 흘러 아이와 함께 이서연을 찾아가는 엔딩이었다면 어땠을까? 안락한 시설에서 그러나 무감동하게 삶을 소진해가고 있는 이서연 앞에서 이서연을 그리워하고 반가워한다. 여전히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녀를 알아보는 모두가 그녀의 모습에 반가워하며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영문모르는 아이와 함께. 무덤보다는 그쪽이 훨씬 더 감동적이지 않았을까?

아마도 요양시설이라는 것에 대한 편견이 깊게 자리한 세대인 때문일 것이다. 젊은 감각을 흉내내려 해도 이미 일상에 녹아든 그러한 선입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시설이 아닌 집에서 함께 지내며 보살피는 것만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자기가 직접 보살피고 끌어안는 것만이 그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병에 걸리면 병원에 가야 하고 때에 따라 입원도 해야 한다. 병원에 가족을 입원시킨다고 그것을 무책임하다 말하지는 않지 않은가. 알츠하이머도 병이고, 알츠하이머 환자도 환자다. 요양시설은 치료까지는 무리더라도 최대한 안락한 마지막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사실 마지막회에 보여진 이서연의 모습이 이미 몇 주 전부터 방송을 통해 보여졌어야 했다. 모든 것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어떻게 고모야 어머니 대신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장명희(문정희 분)조차 그저 착하기만 한가? 아버지 박창주(임채무 분)가 보다 못해 시설에 보낼 것을 권유하기도 하지만 이서연의 알츠하이머를 직접 감당해야 하는 아들 박지형에 대한 걱정이 그리 보이지 않는다. 역시 노향기의 일로 아직까지고 감정이 다 풀리지 않은 것일까? 제가 선택한 일이니 제가 알아서 하라. 알츠하이머리는 병의 무서움에 비해 누구도 그로 인해 고통받거나 상처입는 것 같지 않다. 그저 담담하고 그저 평화롭다.

하기는 이서연의 병이 조금 깊어지는가 싶은 순간 어느새 이서연의 무덤이 보이고 있다. 운이 좋았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이서연의 병을 견뎌하지 못하기 전에 알아서 일찌감치 죽어주었다. 덕분에 이서연의 병으로 인해 상처받을 일도, 고통스러워할 일도, 원망하고 다툴 일도 없이 좋은 기억으로만 남았다. 이제까지처럼. 마치 주근깨투성이 아가씨의 얼굴을 그리며 주근깨가 보기 싫다고 그리지 않는 것과 같다. 주근깨 아가씨의 얼굴에서 주근깨를 지우니 제법 아름답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은 아가씨 자신의 얼굴일까?

역시 결론이다. 정작 알츠하이머를 소재로 삼았음에도 알츠하이머라고 하는 비극을 형상화하는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알츠하이머의 공포도, 알츠하이머의 비극도 어느 것 하나 살려내지 못했다. 덕분에 이서연의 마지막을 지켜낸 박지형의 헌신도, 끝까지 이서연을 곁에서 보살핀 고모의 희생도 부질없다. 여상하다. 과연 이것이 그렇게 심각해 할 문제인가? 강수정도 그 평온한 얼굴에 변화를 주었으면 싶었다. 그녀가 울부짖는다. 그토록 침착하던 강수정이 아들을 위해, 손녀를 위해, 그리고 이서연 자신을 위해 화내고 원망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고함을 지른다. 어쩌면 강수정으 침착함이야 말로 이 드라마가 갖는 근본적인 한계였을지도.

아쉽다. 끝까지 애매한 드라마로 끝나고 말았다. 비극은 충분히 비극적이지 못했고, 알츠하이머라는 소재 역시 충분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런 만큼 결국 박지형과 주위의 헌신적인 사랑 역시 두드러지지 못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이서연은 그렇게 병에 걸려 죽었구나. 아마 알츠하이머가 아니었어도 드라마 자체는 별 문제가 없지 않았을까? 백혈병이든, 암이든, 루게릭이든, 단지 병에만 걸렸으면 좋았을 것이다. 더 이상 이서연의 비극에 깊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면.

아무튼 이 역시 이서연의 그 한 마디는 노향기로 하여금 박지형에 대한 모든 미련을 접게 만드는 주문이 되었다. 노향기는 그렇게 뻔뻔한 타입이 못 된다. 진심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쉽게 진심이 되어 버린다. 이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찌꺼기를 남길 수 없다. 비로소 마음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편안한 얼굴이 귀엽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어쩌면 비판이란 보상받지 못한 기대에 대한 불만의 표시일 것이다. 기대가 없었다면 비판도 없다. 절말 기대했었다. 그리고 재미있게 보았었다. 하지만 과연 알츠하이머어야 했던 필연은 있는가? 그냥 드라마였다. 멜로드라마. 그것을 보았다. 한숨을 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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