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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2.01 08:04

뿌리깊은 나무 "정기준, 삼강도 오륜도 모르는 것들이 관료가 되는 세상이 올 지도 모른다."

철인과 대중, 밀본과 정기준의 딜레마...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지금도 선거 때면 나오는 말이다.

"무엇보다 인물을 보아야..."

1997년에도, 2002년에도, 그리고 2007년에도 그래서 바람이 불었었다. 최근에도 젊은 층에서 인지도가 높은 특정인에 대한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공통점이 있다. 성공한 사람이다. 성공할 것 같은 사람이다. 결국은 나를 성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거물이다. 대단한 사람이다. 누구나 알만한 대단한 실력과 인격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두고 지도자라 부른다. 나를 바른 길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플라톤의 철인정치가 그러하다. 정치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 남보다 뛰어나고, 남들보다 훨씬 탁월한 어떤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대부사상의 근간이다.

사대부의 사(士)란 선비의 사다. 대부(大夫)란 관리를 말한다. 선비란 지식인이다. 그것도 단순히 지식만 쌓는 지식인이 아니라 덕성까지 함께 갖춘 지식인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지성이란 다름아닌 개인의 도덕성까지 아우르는 개념이다. 항상 예법을 지켜 행동을 삼가고, 보편의 도덕과 윤리를 쫓아 자신을 다스린다. 유학에서 말하는 배움이란 바로 그것을 말한다. 그런 바탕이 된 연후에 그 위에 다른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쌓는 것이다. 그런 준비된 지식인이 대부, 즉 관리가 되어 조정에 출사했을 때 비로소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

즉 사대부라는 자체가 플라톤이 말한 철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였던 것이다. 지식을 쌓고, 지성을 연마하고, 도덕성을 갖추고, 그래서 남들보다 우위에서 그들을 가르치고 이끌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런 존재가 되었을 때 마땅히 그만한 자격을 갖춘 준비된 이들에게 정치를 맡겨야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대부사회에서 가장 사대부들을 두렵게 만든 것이 사대부답지 않다는 것이었다. 배움이 부족하거나, 교양이 부족하다거나, 행동거지가 천박하다거나. 사대부라면 당연히 뭇백성들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아주 오랫동안 그같은 믿음은 지켜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출신이었다. 출신이란 하늘이 내려준 운명이다. 왕의 자손으로 태어나고,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나고, 혹은 노비의 후손으로 태어나고, 그것이 정해진 운명이며 사람은 그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인간의 의지가 하늘이 정해준 운명을 대신하면서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출신보다 후천적으로 획득한 개인의 역량에 더 많은 것을 기대게 되었다. 고귀한 자가 고귀한 것은 그만큼 비천한 자보다 남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지식과 교양과 예법과 도덕과 윤리. 근세 유럽이 귀족들은 그래서 부르주아의 천박함을 비웃었고, 부르주아들은 농민과 노동자의 비루함을 경멸했다. 그들만이 비천하고 비루하기 이를 데 없는 어리석은 이들을 다스릴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근대의 민주주의는 그러한 사고 자체를 뒤집어 버렸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근대 민주주의 또한 시민이 선택한 특별한 누군가였다. 시민은 단지 자신을 대신할 특별한 누군가를 스스로 선택해서 특별한 자리에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시민주의의 확산과 개인과 실존에 대한 발견은 인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아마 그러한 변화를 가장 처음 경험하게 된 것이 군대였을 것이다. 전술은 범장을 전제한다. 혼자서 백만대군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관우나 여포 같은 장수들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서도 절묘한 책략으로 위의 백만대군을 물리치는 제갈량의 지략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러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승리할 수 있는 그런 전략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설치했던 참모부로부터 비롯된다. 한두 개인의 특별함이 아니라 여러 더 많은 보통 사람들의 규범화된 체계. 기본적인 훈련만 되어 있으면 평범한 보통의 지휘관으로도 얼마든지 승리를 일굴 수 있다.

아무리 뛰어난 요리사라도 혼자서 만드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규모가 큰 레스토랑이라면 수많은 손님들을 다 상대하자면 주방의 모두가 그와 비슷한 맛을 낼 수 있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람의 손이라고는 전혀 닿지 않은 채로도 단지 기계를 작동하는 것만으로도 최대한 근사치의 맛이 만들어져야 한다. 수십년 경력의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특별한 손맛보다 모두가 그대로만 따르면 그 맛을 제현할 수 있는 레시피가 더 중요하다. 숙련된 요리사의 손맛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누구나 쉽게 값싸게 맛볼 수 있다.

그것이 근대다. 숙련된 장인의 손에 하나하나 두드려가며 만들던 자동차가 단지 자기가 맡은 분야에 대해서만 충실하다면 그다지 오랜 경험이나 숙련도 없이도, 남다른 재능 없이도 얼마든지 자동차를 대량생산할 수 있다. 과거 총을 한 정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한 숙련된 기술자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기계와 분업화로 인해 최소한의 지식과 경험만으로도 얼마든지 총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특별한 누군가의 존재란 필요없어진다. 다만 덕분에 특별한 누군가도 사라진다. 오히려 특별한 누군가에 의지하지 않음으로써 그 한 사람의 실수가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막을 수 있다. 서로 나누어 작업을 하다 보면 한 사람의 실수는 그야말로 전체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게 된다. 인간의 가치가 그만큼 작아지는 부작용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즉 과거에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은 자동차를 잘 만드는 장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동차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지식과 기술, 무엇보다 재능을 지닌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동차를 만든다 하면 조립을 하고, 용접을 하고, 나사를 박고, 페인트를 칠하고, 그러한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작업을 떠올린다. 그러한 아무른 특별한 재능도, 남다른 기술이나 지식 없이도 사람들은 자동차를 만들 수 있다. 바로 다름아닌 정기준(윤제문 분)이 두려워하는 미래였다. 더 이상 사대부가 가진 특별한 지식의 힘이 필요없어진다. 숙련된 장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최소한의 훈련만 받으면 자동차공장에서 일을 할 수 있듯 지식인 역시 그러한 한 부분이 되어 그 가치가 퇴색되어 가리라.

물론 과연 그러한가?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설계하는데는 여전히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 소량만 겨우 생산되는 고가의 슈퍼카 가운데에는 지금도 숙련된 장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지식이 보편화되는 시대라 할지라도 지식인의 가치가 아주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레시피대로 한다면 누구나 비슷한 맛을 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숙련된 주방장의 손맛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보편의 다수는 그러한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것들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지식인의 존재는 특별하지만 과거처럼 그렇게 절대적이지는 않다. 조금만 욕심을 버리면 얼마든지 만족하며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굳이 최고의 디자이너와 최고의 설계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족하다.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와 효율은 전혀 다른 말이다. 민주주의와 결과와도 전혀 반대편에 있는 개념이다. 더 수월하게 더 놀라운 결과를 내자면 몇몇의 천재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차라리 숙련된 기술자 몇 명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만들어내라 하는 것이 편하지 굳이 별로 대단하지 못한 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대신 더 비싸진다. 더 좋아지는 대신 더 귀해지고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타협한다.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운동복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조금은 부족하고 아쉬운 것이 있어도 모두가 함께 입을 수 있으니 좋다. 싸게 쉽게 가까이에서 얼마든지 구해 입을 수 있다. 모두에 의해. 그러한 다수 가운데 느리지만 분명 잘못이나 오류 역시 바로잡아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인 것이다.

더 대단한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다. 그런 대단한 특별한 누군가만이 이해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는 그런 정치가 아니다. 그렇게 대단하지도 특별하지 않아도 모두가 함께 나누어지고 나아간다. 조금은 더 느리고 조금은 더 서툴겠지만 그러나 대신 모두가 함께 책임을 나누며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굳이 밀본의 사대부들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역시 세종이 아니더라도. 굳이 그들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밀본의 딜레마다. 정작 밀본 자신은 스스로가 백성들 위에 특별한 존재로써 군림하기를 원한다. 지식을 독점하고 그것을 권위삼아 백성을 지배하고 이끌 수 있는 위치에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들은 세종에 대해 보통의 평범한 사대부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정치를 말한다. 특별한 재능을 지닌 군주가 아닌 보통의 더 많은 사대부에 의해 이루어지는 모두가 납득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보편의 정치다. 백성들 위에 사대부란 초인이지만, 세종이라는 초인 앞에 사대부란 평범한 다수에 불과하다. 사실 필자가 줄곧 세종대왕과 한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아마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대단한 세종이고 그토록 훌륭한 한글인데 왜 저리 부정적인 내용만을 쓰고 있는가? 왜 그토록 안 좋은 이야기만을 반복해 쓰고 있는가? 모르지 않는다. 세종대왕의 위대함이나, 한글의 대단함, 아마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다지 없을 것이다.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세종대왕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한글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감탄하며 칭찬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문제인 것이다. 필자 또한 그래서 세종대왕과 같은 군주를 바란다. 말한 바 있을 것이다. 세종대왕과 같은 뛰어난 군주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단지 그에 복종하며 기대고만 싶다. 그리고 그래서 현실에서도 선거만 있으면 모두는 세종대왕을 찾는다. 대단한 사람, 훌륭한 사람, 무언가 특별한 사람,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에 의존하기보다 세종대왕과 같은 특별함에 기대어 해결하기를 바란다. 민주주의와 영웅숭배는 결코 함께 갈 수 없다. 민주주의가 영웅숭배를 만나는 순간 전체주의가 되고, 전체주의는 필연적으로 전제주의로 흐른다. 과연 지금 세종대왕과 같은 훌륭한 정치인이 눈앞에 있을때 그를 왕으로 받들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사대부들은 틀렸는가? 정작 정기준이 말한 수백년 뒤 조선을 바꾼 것은 오히려 한글이 아닌 한자였다. 조선사회의 근간을 뒤흔든 일대사건 - 동학농민전쟁 당시 그 주역은 대부분 서당을 통해 한자를 배우고 유교의 소양을 쌓은 중인과 상민들이었다. 중앙권력으로부터 소외된 향반과 잔반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결국 동학농민군 안에서도 소통은 한자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구한말 일제에 항거하던 의병 역시 한글보다는 한자를 통해 일어나고 있었다. 비록 한글이 아니었어도 수백년의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상당수 농민들마저 한자를 배우고 유교의 교양을 배울 수 있는 시절이 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유교에 의해서도 백성들의 의식은 바뀔 수 있다. 반드시 한글이어야만 했겠는가?

한글이 있어 더 나아진 것은 있지만, 과연 그렇다고 사대부들이 마냥 틀리기만 했는가? 오히려 틀렸다면 정기준일 것이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굳이 한글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한자가 백성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널리 퍼지게 된다면 같은 결과를 맞을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추구하는 성리학적 이상국가란 바로 그러한 조선의 백성들이 유교의 교양을 쌓게 되는 사회를 말한다. 백성들을 유교로부터 완전히 유리시키지 않는 이상에는 결국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보다 다수의 평범한 백성에 의한 정치는 비록 책임지는 누군가 특별한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런 만큼 사대부의 독주로 인한 오류를 줄이리라. 더 무식하고, 더 교양없고, 더 염치없는 백성에 의한 정치지만 사대부보다 느리더라도 그렇게 나아가게 되리라. 그것이 바로 역사인 것이다. 어느 한 영웅에 의해서도 역사는 발전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에 의해서도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조금은 더 한참을 돌아가게 되더라도.

인물이 아닌 정책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정책은 곧 구조다. 시스템이다. 그래서 이념이다. 누구인가보다는 어떤 정책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보다는 그가 추구하는 정치가 어떠한 정치인가? 그것은 얼마나 내가 속한 구조와 합치되는가? 하지만 여전히 인물을 따지는 이유는 왕을 바라고 사대부를 바라는 때문이 아닐까? 세종대왕을 바라게 된다. 결코 흔한 것이 아님에도. 세종대왕은 오로지 세종대왕 한 분 뿐이기에 세종대왕인 것이다. 세종대왕보다는 사대부가 더 가능성이 높고, 사대부보다는 백성이 더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민주주의인 것이다.

부족한 것 많고 오류 투성이인 보통의 사람들이 하는 정치가. 때로 실수하고, 때로 잘못도 저지르고, 때로 엉뚱한 길로 들어 헤매기도 하지만, 결국은 스스로 짊어질 바다. 왕에게 탓을 돌릴 수도, 사대부들에게 원망을 돌릴수도 없이, 온전히 자기가 지고 가는 것이다. 세종대왕과 같은 업적은 없어도, 밀본과 같은 뛰어남은 없어도, 기껏 배운 글로 인터넷에서 남을 음해하며 고통받는 모습에 기뻐하고 있을 뿐이더라도, 그러한 부분까지 가지고 함께 간다.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또 나쁜대로, 그런 것들까지 함께 바로잡아 나가며. 단번에 좋아지기 위해 어떤 특별한 누구낙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기대는 것은 결코 민주주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시민일 수 없다.

아무튼 흥미로운 부분일 것이다. 조선왕조에서 노비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한 예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양인 출신은 더 많았다. 물론 그에 대한 반발도 무척 거세었다. 하지만 그런 한 편으로 비천한 노비가 그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까지 하게 된 것을 기특하게 여기는 시각도 많았다. 더불어 사대부의 선비들에게도 노비에게조차 뒤진 것을 탓하는 여론들도 있었다. 조선사회에서 신분이 천하다고 글을 배우는 것까지 터부시되었던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천 것들도 글을 알아 성현의 도를 아니 그것이 기특하다. 그래서 천한 신분으로도 성현의 도를 행하면 그것도 좋게 보아주고 했다. 물론 사대부의 고유한 영역을 넘어서지 않는 선에서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했다. 확실히 드라마라는 것이 이런 부분에서 지나치게 과격하지 않은가? 과연 그렇게까지 분개하며 목숨까지 내던질 일인가?

또 하나 아쉽다면 어째서 밀본은 굳이 세종의 글자를 두고 "모든 백성이 글자를 알게 될" 것이라 지레 단정하여 말하고 있을까? 듣는 입장에서 귀가 솔깃해지지 않는가? 백성 입장에서야 반가울 것이고, 사대부 입장에서도 궁금하여 호기심이 생길 것이다. 오히려 역효과가 아니었을까? 이 부분은 상당히 작가가 허술하게 꾸민 혐의가 있다. 오히려 세종의 글자만 더 홍보해주고 있다.

이방지의 이야기는 곁가지였다. 그다지 있어도 없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곁가지에 불과했다. 그보다는 강채윤(장혁 분)이 세종(한석규 분)에게 하려 하는 청이 더 흥미롭지 않을까? 당대의 조선제일검 무휼(조진웅 분)과 이방지의 대결도 흥미를 끈다. 과연 이방지는 강채윤에게 밀본에 대한 어떤 단서를 건네주게 될까? 어떤 열쇠를 쥐고 있을까?

말하지만 굳이 한글이 아니어도 정기준이 걱정한 세상은 바로 500년 뒤 마침내 찾아오게 된다. 한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성리학과 천주교가 서로 만났다. 서구의 사상이 밀려들며 어느새 사대부에 의해 확산된 한자는 조선을 변화시키는 견인의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 그렇다고 백성들에게 아예 한자를 가르치지 않을 것이면 성리학적 이상국가라는 것도 의미가 없다.

더불어 무지렁이 상민이며 천민들이 글을 배워 그것을 무기로 삼고, 마찬가지로 세종이라는 초인 앞에 사대부라는 범인들이 글을 무기삼아 버틴다. 이중적 구조다. 의도한 것인가? 아니면 어쩌다 그리 되어 버린 것인가?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일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자격이 있는 사람이 정치를 해야.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정치를 맡겨야 한다. 인물부터 따지고 개인의 됨됨이에 열광하는 이유일 것이다. 정기준이 그리 말하는 이유이고, 정기준이 부정되어야 하는 이유다. 인물이라면 세종일 터이고 사대부일 터다. 세종이면 족한가? 아니면 사대부라면 족한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게 한다.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다. 앞이 있으면 뒤가 있고,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다. 왼쪽이 있으면 오른쪽도 있다. 어느 하나만 보려 한다면 결국 편협이라는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세종은 위대했다. 한글도 위대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 항상 생각이 너무 많다. 그것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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